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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Jan 06. 2018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분명 그렇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문장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단언적인 마침표와 살짝 어색한 문장 구성까지 모두 말이다. 수없이 많이 쓰고 지우다 도달한 글의 도입부였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어떻게 말을 이어 나가는 게 좋을지 나는 참 막막했다. 소주 한 병 반의 시간이 흐를 때 즈음 나는 단어를 바꾸기로 했다.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이전만큼 울림이 강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신이 났다. 식상한 주제였지만 그렇기에 용기가 났다. 이것 즈음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나는 써 내려갔다.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먼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시절의 이야기다.

몇 살 즈음의 이야기인지 중요치 않은 이야기다. 먼 훗날, 나이가 아닌 풍기는 자신감과 근심의 냄새로 지상에서의 시간을 가늠하게 될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뻔뻔한, 식상한, 한 때 바라봤던 꿈의 높이보다는 낮은, 한 때 비웃었던 그런 어른들이 돼 있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순수한 기쁨이 넘친다. 불행이라는 단어가 식상해질 정도로 모두들 오래 불행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변호사가 되었고, 어떤 아이는 헬스 트레이너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중요치 않은 행복한 꿈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명 한 명, 으래 그랬듯이 약속 시간보다 늦은 사람들이 남은 자리들을 하나둘씩 메꿔 가며, 술잔을 기울이며, 웃음을 소비하며, 그렇게 밤이 깊어간다. 나는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다른 웃음을 띤다. 불행으로 가득 채운 나의 그릇은 이제 없다. 작은 알약들로 기도를 대신했던 나날들도 이젠 멀다.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진 나의 모습, 매일 걱정할 사람들의 생각을 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보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여럿 되는 빈자리 어딘가에 한 사람이 앉아있지 않음을, 올해에도 아마 공석으로 남을 그 한 자리를 나는 또렷하게 바라본다. 그러고는 건너 들을 수만 있었던 근황으로 그려 본다. 참 멋있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시간을 생각해 본다. 멋들어진 블라우스가 어울릴지, 캐주얼 한 평상시에도 자주 입던 헐렁한 티가 어울릴지 고민을 한다. 그렇게 술기운 속에서 상상을 한다.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먼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시절의 이야기다.

분명 그렇다.


그런 나의 왼쪽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선다. 이 시간 대에 도대체 누가 오는 건가 싶어 뒤돌아 본다. 눈이 마주친다. 나는 안도한다. 더 이상 그 눈빛에 잠시 숨이 멎지 않는 것에. 더 이상 그 얼굴에 쌉쌀한 애틋함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 더 이상 그 목소리에 주저앉지 않는 것에. 그렇게 나는 걸어간다. 살짝 웃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묻는다. 너는 일이 많았다고 대답한다. 그 짧은 화답 속에서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너 또한 그러는 것이 여전히 눈에 보인다. 그리고 취기 가득한 모두의 목소리가 침묵을 파고들기 전에 너는 말을 한다. 안녕이라고. 나도 답한다. 안녕이라고. 너의 얼굴이 웃는다. 나 또한 살짝. 웃는다.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먼 훗날,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시절의 이야기다.

분명 그렇다.’


나는 펜을 내려놓는다. 항상 연필보다는 펜이 편했다. 지울 수는 없지만, 매끄럽게 종이 위에 적힌 볼펜 자국들은 무언가 이뤄질 것 같은 착각을 줬다. 나는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문구를 중얼거렸다. 어느새 글을 쓰는 동안 소주 한병의 시간이 더 흘렀다. 고민을 한다. 몇 번을 읽어볼수록 마음이 확고해진다. 나는 펜을 들고 줄을 긋는다. 그러고는 줄 사이 좁디좁은 공간 사이에 마음을 밀어 넣는다. 선이 그어진 ‘이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위에 더 작게, 하지만 더 또렷하게 쓴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들어 찬찬히 읽어 본다. 누가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은 단어였지만 나는 확신했다. 나는 조금 밑에 이름을 적는다. 그러곤 날짜들을 적는다. 20160514. 20170514. 20171223. 20180106. 그러고는 점들에 다시 한번 펜을 가져다 놓고, 더 굵게 확고하게 그린다.


나는 기억의 서랍 어딘가에 글을 넣어둔다. 사라지지는 않을 곳에, 하지만 그렇다고 평상시에는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을 곳에 종이 몇 장이 서걱거리며 자리 잡는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 종이들 위에 잉크와 알코올과 눈물이 뒤섞인 자취들이 먼지를 덮어 갈 때 즈음에도 열어보지 말아야 할, 아니 그보다도 열어봐도 아프지 말아야 할,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분명 그렇다.


시온. 20160514. 20170514. 20171223. 2018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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