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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제 Oct 05. 2020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김금희 <경애의 마음>

2018년 가을, 책장을 넘길 만큼의 여유만 허락되던 지하철에서 그날도 나는 출근 중이었다. 정식 배치를 받은 부서는 사내에서 '3D'라 소문난 곳이었다. 처음이라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일은 밀려들기만 하고. 야근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러니 그날도 어김없이 출근길에서부터 야근을 직감한 평범한 날이었다. 그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빽'으로 사에 들어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상수는 자신과 비슷한 듯 다른 경애를 향해 애틋함을 느낀다. 경애는 과거 사내 파업 이력 때문에 회사에서 '문제 사원'으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된 두 사람은 이미 과거부터 연이 있었다. 연애상담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에서 말이다. 상수는 운영자 '언니'였고, 경애는 이별의 아픔을 '언니'에게 털어놓는 '프랑켄슈타인프리징'이었다. "아부지,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던 삼순이처럼 경애도 '언니'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버릴 수 있냐고. 위 문장은 '언니'의 대답이다.


이런저런 감정이 불편하고 괴로워 마음을 어디다 뚝 떼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한 적도 있었다. 고작 스물둘에. 학교에서는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 상황이 막막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고시를 시작했다. 과 사람 중 회계나 재무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기웃거린다는 회계사 시험을.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전문직 하면서 돈이나 잘 벌면 장땡이지. 합격하면 마이너스 통장이나 뚫을 거야.' 한껏 꿈과 낭만을 냉소하며 살았다. 마음에도 없던 시험을 2년 반이나 준비했어도 잘 될 리 없었다. 늘 1차 시험에서 합격자들의 들러리가 되었다. 독서실에서 울며 공부할 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합격이 너무 절박해 우는 게 아니라, 이 시간에 갇혀버린 막막함에. 하고 싶은 일을 더 찾아보지도 않고 쉽게 결정해버린 안일함에. 사람을 좋아하고 말랑말랑한 글쓰기를 좋아하던 내 감정은 온데간데없는 것 같은 상실감에 눈물이 떨어졌다는 걸.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며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그 후로도 마음이 모가 나고, 닳고, 비뚤어지려 할 때마다 그 문장이 나를 막아섰다. 그렇게 입사 1년을 넘겼고 고된 생활에도 함부로 비관하지 않는다. 초판 한정 작가 친필 사인본 증정이라는 말에 덥석 산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은 아득하기만 하던 1년을 견디게 해 주었다.


또 다른 힘듦이 나를 기다릴지라도 지금 이 마음만은 가능한 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무언가를 이유 없이 사랑하고, 때론 무감각해지길 원하는 대신 회복해내기. 스치는 풍경에 잠시 시간 내어주기. 낙관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무엇보다 예전처럼 감히 냉소하지 않기. 이 감정도 세월에 아주 천천히 나마 풍화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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