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만나는 속도 그리고 높이
네덜란드에서의 주요한 일과는 날씨를 확인하는 일이다. 스페인에 있을 때는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면 그만이었는데 습하고 흐린 이 곳에 오고 나니 하늘에도 변수가 많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비가 쏟아지곤 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날씨라 일반 예보로는 턱도 없다. 시간별 비구름 레이더 영상을 꼼꼼히 여러 번 확인하고 나서야 그 날의 산책을, 빨래를, 장보기를 계획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자전거 인프라가 좋기로 유명한 나라다. 단기 교환학생이든, 장기 유학생이든, 워홀러든, 직장인이든 다들 네덜란드에 오면 "일단" 자전거부터 마련하곤 한다. 이를 아는 주변 지인들이 "와, 그럼 거기 가면 다 자전거 타고 다니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나는 자전거에 아주 서툴다. 서울에서 따릉이를 타본 적은 있지만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가장 중요한 도로 주행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 곳 속도에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내가 다치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들의 암묵적인 속도와 기타 규칙 등을 내가 어길까 봐가 더 큰 걱정이다. 또 하나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날이 좋으면 무조건 걷고 싶어 지는 사람이고 날씨가 좋지 않으면 어차피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집에 있을 테니 자전거를 좀처럼 탈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튼 이런저런 핑계로 나는 아직도 네덜란드에 내 자전거가 없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근사한 핑계를 대보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 왜 자전거를 안 타냐며 나를 타박(?)하던 친구들에게 여러 번 설득하곤 했던 걷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두 가지다.
1. A에서 B로 가는 경로가 보다 다양하다. 자전거 혹은 자동차 전용도로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샛길로 빠질 수 있다. 심지어 걷는 속도도 주변 환경이나 법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주차장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즉, 산책의 출발점과 도착점이 달라도 된다. 주차를 하지 않으니 비용도 발생하지 않고 자전거의 경우 도난 우려도 없다.
아무튼 나는 이런 이유로 평소에는 3-4km 정도의 거리를, 마음을 먹고 나간 산책에서는 7km, 혹은 그 이상 되는 거리도 느린 박자로 한 없이 걷곤 했다. 한 때는 산책을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아무 배경음악 없이 도시의 소리를 듣는 게 또 큰 재미다. 물론 도시마다, 또 길마다 도보의 상태나 혼잡도, 소음 레벨이 다 달라서 어떤 길은 좀 더 빠르게 지나쳐 가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조바심 없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 또 이렇다 할 결심 없이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곤 한다.
걷다 보면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씩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동네 주민일 수도 있겠고, 늘 너무 빨리 지나가서 읽지 못했던 간판 글자의 귀여운 디자인일 수도 있다. 이제 막 움을 틔워 가까이에서만 보이는 새싹일 수도, 또 어느 날은 모퉁이에 자리한 소품점의 세일 정보일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도시가 걷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두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고, 또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걷는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순간들이 한없이 사랑스럽다. 며칠 전부터 벼르다 오늘에서야 챙겨 나온 엽서를 우체통에 넣을 때의 설렘과 길가에 핀 꽃들이 예뻐 한참을 서서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여유로움 같은 것들.
물론 자전거나 자동차, 버스 등의 수단을 이용할 때의 매력도 만만치 않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 잔상을 남기며 지나가는 풍경들, 도시를 채운 모든 키 큰 것들이 왠지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는 높이, 꼭대기층의 고양이와 눈이 마주칠 때의 유쾌함. 하지만 이런 속도에 익숙해지고 나면 고작 1분 연착되는 버스에도, 내 앞에서 바로 바뀐 빨간불에도 괜히 조바심을 내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나의 걷기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단적인 예로는 제주도 여행이 있다. 나는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렌트를 하지 않는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보다 배차간격이 훨씬 긴 일주 버스만 다니던 때에도 나는 버스 정류장 주변에서 바다를 보며, 오름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것에 아주 능했다. 내가 일상에서 유지하고 있는 여유로움은 다 그때 완성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 번은 버스 한 대를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던 적도 있는데 뒤의 일정이 쳐지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지금 있는 곳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제주는 워낙에 그런 섬이기도 하고.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쓰면 또 마음이 약간 간지러울 것 같으니까 마지막 문단에 짤막하게 남겨본다. 원래는 "타는 마음과 걷는 마음"이 제목이었는데, 그건 순전히 중의적인 의미가 좋아서였다. 무언가를 탈 때는 정말로(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1분 1초에 마음이 타들어가지만 터덜 터덜 걸을 때는 마음속 구름이 걷히는 기분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탈 것"들에 너무 박하고 싶지는 않아서, 원하는 만큼 걸을 수 있는 것도 결국엔 나를 실어다 옮겨주는 버스와 기차가 있기 때문이라서, 걷는 마음만 남겨두었다.
오늘은 해가 났으니 이만 커튼을 걷고, 빨래를 걷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