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와 독립
스파티필름은 목마른 티를 팍팍 내서 자주 눈에 띈다.
이번에도 풀이 잔뜩 죽은 얼굴로 축 처져있길래 주말 사이 물을 주었다. 반나절이면 방긋 살아나는 친구가 며칠이 지나도 계속 잎이 쳐지고, 노란 잎도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하자 분갈이를 할 때가 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분갈이를 한 번 해보고 나니, 이런 증세가 보여도 덜컥 겁나지 않았고 서서히 익숙해져 간다. 경험은 불투명한 미지를 투명한 감정으로 만든다. 성장이 두드러진 분갈이는 흡족한 시간이다. 식물은 무럭무럭 자라고, 식집사의 마음도 그만큼 느긋해지기 때문이다.
북향이라 볕이 잘 안 들고, 습도가 높은 집이다 보니 스파티필름의 생활기후와 잘 맞는 것 같다. 반대로 비슷한 시기에 데리고 온 고무나무가 어느 새부터 성장을 멈추더니 한 잎 두 잎 떨어지며 식물나라로 떠났다.
식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 무관심하고 게으른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슬퍼진다. 그러나 몇 번의 이별과 상심이 있고 난 뒤로 다시 무언가에게 관심을 쏟고 더 좋은 환경이 되고자 하게 만드는 것도 식물이었다.
생각만 했던 분갈이를 이제는 행해야 할 때. 고무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금전수를 옮겨 심고, 금전수가 있던 자리에 스파티필름을 심었더니 크기가 안성맞춤이다. 너른 화분에서 잎이 무럭무럭 자라 뿌리가 무성해지면 터를 옮길 준비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와글거리는 뿌리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생동감이 느껴진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자신의 지대를 넓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가족을 떠나 지내는 것이 그렇게 슬프지 않다.
금전수에게 물을 한 아름 먹이고 오랜만에 넉넉히 일광욕을 시켜주러 나갈 결심을 한다. 일광욕에 결심이 필요한 이유는 화분이 두 배 가량 더 커졌기 때문이다. 50cm 넘는 화분을 들면서 내 최초의 독립은 언제였을까 떠올려본다.
희미하고 아주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건 어쩌면 엄마가 나를 자주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다가 내가 너무 커버려서 엄마가 더 이상 안아주기 힘들다고 할 때 일지도 모르겠다. 묵직한 화분을 들며 낑낑 거리는 내가 이제는 엄마가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정오가 지나자 창틀이 익어가는 더위를 느꼈다. 검정 화분에 심긴 식물이 화상을 입을까 후다닥 나가 그늘로 데리고 왔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화분이 화끈하게 달구어졌다. 미지근한 손이 화분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화분에 지긋하게 손을 대어 본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애꿎은 식물에게 미안한 마음을 돌려보지만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말해주길 바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편리를 위한 마음이고 식물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온 힘을 다해 이야기 가지를 뻗어나갈 테다. 앞으로는 그 이야기에 눈길 맞추는 독자의 마음으로 식물을 관찰하기로 한다.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으니까.
해가 저물고, 이제 다시 화분을 들여보낼 때가 왔다. 이번 분갈이는 화분의 덩치가 더 커진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언젠가 만날 아이가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떠나고 싶다고 한다면, 충분히 잘 떠나보내기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안아주기 힘겨워질 때는 곧 품에서 놓아 보내야 할 때. 욱신거리며 좀 잘 돌봐달라는 몸 이곳저곳의 신호를 느끼며, 나도 품에 감싸는 게 최선이라고만 생각했던 내면의 아이를 이제는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것을 느꼈다. 낡은 걱정과 염려의 껍데기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안전지대를 기꺼이 넓혀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