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셀린 Nov 16. 2019

스콜

1908

찐득하다. 피부를 긁고 나가는 바람이. 계란이 삶아지는 기분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하얗고 두꺼운 종이까지 울어버릴 만큼 습하고도 습한 날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댁에 다녀오는 버스 안이었다. 어머니는 손목 관절이 조금 아픈 것 말고는 별 문제는 없었다. 요새 한식 말고는 다른 음식을 못 먹겠다고 했다. 소화도 안 되고 예전만큼 맛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물로 사간 전복장과 명란젓을 오랜만에 들른 아들보다 더 반기는 눈치였다. 발치에 집에서 키우는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녹내장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15분 정도 안아주었더랬다. 


생명수 같은 에어컨 바람에 더위를 한 김 식히고 팔달문 근처를 지날 무렵 아직도 연락하고 있는 군대 후임에게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동생처럼 살갑게 굴던 친구였는데 뉘앙스가 오늘은 뭔가 걱정이 있는 듯했다. 역시나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맑지도 흐리지도 않았던 하늘이 구석에서부터 회색으로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위암이 의심되어 이런저런 검사를 하던 도중 피를 토했단다. 멀쩡하던 사람이 피를 쏟았으니 얼마나 놀랐을지 내가 다 아득해졌다. 그런데도 간호사가 금식 인지도 몰랐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말을 들어보니 위암에 특화된 병동인 듯싶었는데 왜 그런 실수가 있었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아 같이 씹어주었다. 지혈을 하러 시술을 다녀왔는데 어디서 나는지 알 길이 없다고도 했다. 지금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검사 결과는 위암 초기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진심을 다해 말해주었다. 나아진 것에 집중하라고 일러주었다. 일단 퇴원한 상태라 병원에 있을 때보다는 불안한 감은 있다고 했다. 정작 아버지는 훨씬 편안해하신다고도 했다. 


그 친구는 군대에서도 성실하기로 정평이 자자했다. 다만 인복이 없달까. 직속 상관도 선배도 모두 다 뭐 같기로 유명해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업무를 이리저리 부딪히며 깨우쳐갔다. 나와는 아예 다른 부서라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휴가나 다녀오면 책이라도 사다 주고 가끔 간식이나 나눠 먹는 수준이었다. 원래 팔자가 그 모양인지 전역을 하고 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새까매지도록 잔업을 하고 7kg이 쪘다. 가끔 술을 함께 마시게 되면 그래도 자신은 취직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여행도 다닐 수 있고 다음 달에 차도 살 것이라 하며 씩 웃었다. 키도 작은 게 그 날 만큼은 조금 커 보였다. 


그의 할머니는 폐암이 의심되었었다. 할머니의 손에 컸던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더 이상의 검사와 입원을 쉽게 포기하고(심지어 그의 누나도 간호사였다) 요양원으로 의견이 모아졌을 때 그가 나섰다고 했다. 검사비용부터 다 자신이 댈 테니 웬만큼은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다들 생업에 바쁘니 병원을 오가는 것도 자신이 도맡겠다 했다. 눈물까지 보였다고 했다. 결국 그의 할머니는 폐암이 아니었고 지금은 매우 건강한 상태라고 했다. 지금도 주말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 아직도 짠하다고 했다. 


잘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지금 가장 기특하다고 했다. 아버지도 빨리 병을 발견해서 다행인 거라고 했다. 이직을 준비하던 와중 그런 일이 생겨 잠깐 엎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사표를 안 낸 게 어디냐고 했다. 실업자로서 병을 마주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웬만한 일보다 최악일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수술을 마치는 대로 미뤄진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다. 환자도 환자지만 옆에 있는 사람도 숨 쉴 틈이 있어야 제대로 돌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그래서 형은 맨날 환자 보느라 그렇게 여행을 뻔질나게 다니느냐는 반문을 해왔다). 남들보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은 것 같아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너의 그릇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여태 그랬듯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게 딱 버티면 어쩌냐는 말에 지 까짓 게 뭔데, 안 비킬 리가 없어하고 비웃어주라고 했다. 그는 껄껄 웃었다.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탁탁. 버스 유리창에 흩날리더니 엄청난 굵기로 변했다. 5분 후에 내릴 예정인데 그때까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퍼붓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예고에도 없던 스콜(squall) 같았다. 점점 거세져서 쏴쏴 하는 소리까지 냈다. 도도하게 정류장에 내렸다. 거리는 그새 역류한 하수도와 뛰어다니는 행인들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심지어 여유 같은 것도 생겼다. 분명 지나갈 것이므로. 동쪽 하늘은 홀로 맑았으므로. 그리하여 곧 개일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작가의 이전글 I d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