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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I do

1907

눈부신 날이었다. 창 밖의 시퍼렇게 자라나는 플라타너스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이 나는 계절이었다. 6월 치고 꽤나 선선했던 날들을 한 순간에 잊게 만드는 대기이기도 했다. 강렬한 태양의 냄새, 아스팔트 위로 어그러지는 사람들의 그림자, 조금은 어색했던 부채질이 드디어 어울리는 시간, 시원한 생수보다는 커다랗고 속이 빨간 수박이 더 생각나는. 그래, 이런 게 초여름의 분위기였지. 이렇게 애써 생각해내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마른 체격에 우아한 턱선을 가진 간호사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잘 들어보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도 버거운 그에게 자꾸만 미소를 보여달라고 하고 있었다. 최근 의료진이 그의 재활에 열을 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 계획에 ‘양 입술 끝을 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이기’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좀처럼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그 간호사는 다시금 부탁했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당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아니, 하고도 남는다. 두 달 넘게 누워 있다가도 요즘 두 발로 서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이런 것쯤 진작 할 수 있었다. 오늘 오후에 이 모습을 가족들, 특히 형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차분히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술을 살짝 들어 올리는 듯했다.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 대신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내었다. 간호사는 시원하게 웃더니만 어깨를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는 손 소독제에서 알코올을 듬뿍 짜내어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오후가 되었다. 전신 드레싱은 역시나 사십 분 넘게 걸렸다.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나아졌다. 그가 가진 문제, SJS에 왕도가 어디 있을까. 나아지길 기대하며 매일매일 드레싱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형의 결혼식 때까지는 훌훌 털어보자고 기적 같은 약속을 하긴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형의 인생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의 형이 늘 하는 말, OK, Bro. Life goes on. 그의 질병 때문에 모두의 인생을 멈출 수는 없는 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특단의 조치를 생각해내었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그가 참여할 수 있는 결혼식-바로 환자의 옆에서 미니 결혼식을 치러내는 것이었다. 그게 오늘이었다. 아까 그 간호사는 다시금 그에게 미소를 부탁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도 그에게 축전을 한 마디씩 던졌다. 심지어 어떤 간호사는 그의 기관절개관에 두꺼운 거즈로 보타이를 만들어주었다. 시리도록 빛나는 창문에 커다란 풍선들이 붙었다. 결혼을 축하하는 멘트가 영롱하게 새겨진 캘린더도 이내 걸렸다. 초여름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그가 울고 웃는 이 작은 방에서 누군가의 인생이 새로 정점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객들이 도착하였다. 약간 상기된 모습의 어머니, 늘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말끔한 정장이 낯선 아버지, 면도를 말끔하게 하고 그 숯 많던 검은 머리칼을 포마드로 한껏 올려붙인 그의 형, 여름의 햇빛만큼이나 화사하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피앙세, 그리고 그 밖의 친지들. 그의 침대를 원탁처럼 따뜻하게 둘러쌌다. 그는 진물 나는 피부 위에 소복이 드레싱을 덧대고 병원 로고가 진하게 박힌 새 환자복을 입고, 무릎 위엔 빳빳하게 다린 듯한 시트를 덮은 채로, 허리를 가능한 만큼 높인 채 꼿꼿이 그들을 맞이 했다. 그리고 문 밖에는 까맣고 풍성한 머릿결에 단단한 눈꼬리를 가진 간호사가 그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접촉주의’를 요하는 환자였기에 다들 비닐 가운을 하나씩 추가로 입고 있었다. 최대한 창가 가까이로 침대를 끌어내고 그 주변에 비닐과 정장을 동시에 착장 한 사람들이 엄숙하게 둘러싼 그림이라니. 나름대로 진풍경이었다.


아직도 굳게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발치에 신랑과 신부가 자리했다. 그의 아버지가 태블릿 PC를 꺼내더니 찬찬히 식순을 짚어가며 식을 진행하였다. 주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집안이라 조용히 듣고 있자면 어떤 미드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병실은 그들의 정성과 진심으로 조금씩 더워졌고 급기야 가운 아래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태양도 한껏 오른 시간이었다. 결혼식도 정점에 다 달았다. 그의 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서로의 법적인 그리고 영적인 배우자가 되겠느냐고. 그들은 기꺼이 대답했다. I do. 


순간 그는 입술을 움직였다. 희미한 미소를 보인 것도 같았다. 아니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들과 함께 대답했을 수도 있다. 꼭 낫겠다고. 열심히 치료받고 집으로 꼭 가겠다고. 그래서 대답하는 것이라고. I do. 


I do. 그의 형이 하는 단단한 다짐. 

I do. 그리고 그의 피앙세가 약속한 언어. 

I do.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롯한 의지인 것이다. 그는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나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표명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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