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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Aug 21. 2020

노악

2008

하아, 허전하다. 다음 달 카드 명세서가 살짝 걱정될 정도로 물건들을 사재껴도, 매콤한 닭발을 질겅질겅 씹어도, 잔치국수를 한 냄비 끓여서 배 터지게 먹어 치워도 이 빈 속은 채워지지 않아. 알아. 알고 있어. 그렇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물 한 방울만 더해져도 넘치는 댐처럼, 그 찰랑거리는 위험수위를 비워낼 때를 외면하고 싶었어. 여러모로 치밀해야 하고 신경 쓸 것이 많아 피곤하긴 하지만 그만큼 감안할 가치가 넘쳐나는 내 추악한 취미. 오래간만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늘 탁한 공기. 이 탈의실의 많은 사람들은 열쇠로 여는 구형이 아닌, 튀어나온 숫자를 누르는 버튼이나 돌려서 여는 방식의 자물쇠를 이용한다. 열쇠를 잊지만 않으면 편하게 관리가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의외로 허술한 것이 후자다.
모두들 마치 패턴처럼 비밀번호를 눌러 자물쇠를 풀고 짐을 넣고 옷을 갈아입고 잠근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다름 아닌 버튼 자물쇠의 낡음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것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느긋한 허술함이다. 하루에 두 번씩 꼭꼭 풀어지고 잠가지는 그것은 일 년만 지나도 400번이 넘게 소모된다. 기껏해야 다이소에서 삼천 원 주고 산 것이 반영구적 일리가 없잖아. 그깟 폰 하나에 백만 원씩 지불하고, 일 할 때는 그렇게 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짐을 지켜주는 것에는 왜 이리 허투루 마음을 놓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좌우간 낡은 그것의 번호를 모두 누른 상태에서 오픈 버튼을 힘껏 누르면 당사자가 설정한 비밀번호가 동시에 슬쩍 움찔한다(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렇게 수면 위로 찬란하게 떠오른 네 개의 숫자가 가지는 경우의 수는 고작 24개. 그 순서대로 비밀번호를 시도할 시간은 고작해야 3초 남짓이다. 3분 정도면 웬만한 것은 다 열 수 있는 찰나다. 들킬 염려가 있으니 차례대로 1분 정도만 시도하고 멈춘다. 안 되면 내일, 그리고 모레 하면 된다. 과정 자체가 절제의 쾌감인 셈이다.

  돌리는 자물쇠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비밀번호 세 자리 혹은 네 자리를 다이얼로 돌려 세로로 맞추게 되어 있는 방식이다. 물리적인 틈은 거의 어렵고 일종의 심리전으로 접근해야 한달까(그렇지만 역시 쉽다). 일단 목표로 삼은 사물함의 주인과 같이 퇴근을 해야 한다. 옷을 갈아입기 직전에 폰을 만지는 척하며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착착.
여기서 힌트. 최악의 비밀번호 1순위는 ‘password’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 보통의 사람들은 비밀번호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나 허술한 이 병원 사람들도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거의 같은 방식으로 자물쇠를 잠그고 해제한다. 누군가는 첫 번째만 돌려 잠그고 연다. 그것도 딱 세 칸만 움직이고. 다른 누군가는 두 번째까지 두 번씩 움직인다. 공통점은 약속이나 한 듯 오른쪽으로 잠그고 왼쪽으로 돌려 연다는 것. 소리의 패턴만 기억해뒀다가 역으로 몇 개만 돌리면 당장에 열린다. 가장 까다로운 부류는 아무 생각 없이 휘리릭 돌려 버리는 축이다. 이건 잠그는 것을 잊을 때만 노려야 한다. 답이 없다. 그래도 노렸던 것이 잘 안 열릴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땐 그저 잠금장치가 없는 사물함을 건드는 수밖에. 그저 장작에 불이 붙은 이상 하얗게 태우고 싶을 뿐이다.

  출근 시간은 중구난방으로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않는다. 자물쇠 소리도 퇴근 때보다는 아무래도 급하게 열기 때문에 명확히 들리지 않는다. 가장 좋은 시간은 일하는 중간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리면 CCTV가 탈의실 복도에 있기 때문에 의심받기 십상이다. 반드시 합당한 볼 일을 만들어두고 움직인다. 다만 늦게 퇴근하는 몇몇과 한 시간 이내의 시간 차 정도면 상관없다. 혹여 용의자로 몰린다 한들 나만 마킹되는 것은 아니니까. 물증이 없으면 누구나 무죄다. 더군다나 그렇게 얻어진 물건은 반드시 그 날 버리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외출하는 길이라면 지하철 역 쓰레기통이나 화장실에, 귀가하는 길이라면 헌 옷 수거함에 넣어 버린다. 처음부터 물건이 필요해서 시작한 행위는 아니었으니.
여태 잡히긴커녕 의심조차 받은 적이 없다.
감히 나는 완. 벽. 하. 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꼬맹이 때 가게에서 엄마 몰래 훔쳤던 분홍 젤리 하나 때문이었을까. 체육시간에 아프다는 핑계로 잠시 교실에 있다가 보건실로 움직이려던 그 찰나, 눈에 띄었던 매끈한 샤프 때문이었을까. 젤리는 먹다가 토했고 샤프는 곧바로 잔디밭에 버렸다. 분명 소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다지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없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른다는 쾌감은 일차적인 부분이다. 그 기저 뒤에 어쩔 줄 몰라하는 피해자의 당혹함에 대해 나의 낯짝을 한층 더 두텁게 하고 오히려 그를 위로하는 얄궂은 위선이 정말 참을 수 없이 즐겁다. 가면 뒤에서 낄낄 대는 내 얼굴이 기쁘다. 게다가 누구도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다, 이것이야.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것이다. 이것은 소유하고 싶다. 이토록 검은 쾌감, 이렇게 하얀 죄책감. 배운 적도 없다. Natural bone-뭐 그런 것일 테지.
어머, 반지가 없어졌어? 어떡하니. 다른 건 괜찮고? 대체 누구인 거야. 이거 맘 놓고 옷 갈아입겠나. 어휴. 어디 몰카라도 있는 거 아닌가 몰라. 그렇지?

  오히려 들킨다면, 현장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잡혀버린다면 시원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래 본 적이 없는 걸. 사실 나도 모르게 점점 대담해졌을 때가 있었다. 그때 모두의 시선이 탈의실로 쏠렸었지만 유야무야 지나갔다. 심장이 졸아든다거나 그 행동으로 인한 죄책감 따윈 없었다. 떳떳하지 않은 행동이란 것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모르나. 하지만 이렇게 생겨 먹을 것을 어쩌겠어.
  이후 거의 일 년 넘게 참아냈다. 잡음은 지양하고 최대한 오래 즐기고 싶어서다. 요새는 되도록 미스터리로 남겨졌으면 하는 심정도 은근히 들기 시작했다. 그 심정으로 끙끙 견뎌내다가 이제는 재개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을 때, 나는 마치 여덟 시간 내내 N95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벗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엄청나게 신선하고 명쾌했다. 대기라는 것은 이토록 달콤한 것이었다.

끊어야 하나. 언제까지 해야 하나. 아니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들키면 깨끗이 관두는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 당분간은 그럴 이유도 생각도 없다. 이미 2주 전에 한 건 했다. 손때가 곱게 묻은 누군가의 회색 장갑이었다. 비싸 보이진 않았지만 도난당했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보였다. 그만큼 나는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무척 차다. 역시 겨울은 겨울다운 맛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야비한 생리다. 그때쯤 마음이 헛헛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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