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7] 일단은, 계속 다니자
사실 회사에 다니는 게 예전처럼 싫지만은 않다. 어쩐지 묘하고도 얄궂은 일이다. 그래, 그러면 일단...... 일단은...... 나는 계속 그 단어만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하고 단정한 필체로 이렇게 적어내려 갔다.
일단은, 계속 다니자.
- 장류진, <달까지 가자> 중에서.
장류진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의 제목이 '달까지 가즈아'로 보인다면 당신은 지금 주식 또는 코인 투자 중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나에게 하는 말)
서점에서 손에 들자마자 한숨도 쉬지 않고 두어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아, 이런 몰입감이라니. 책 속에 직장인들의 모든 욕망이 담겨 있다. 퇴사욕, 이직욕, 일확천금욕, 인정욕, 승진욕, 조기은퇴욕, 그리고 그냥 욕, 욕...
내가 첫 책 <회사가 좋았다가 싫었다가>의 원고를 쓸 무렵은 퇴사 콘텐츠가 인기였다. 지속 가능한 직장 생활에 대한 고민, 사이드 프로젝트, N잡러 같은 키워드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기도 했다. 책이 나온 지난해 말 즈음부터 지금까지 소위 '파이어족', 조기 은퇴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이제 부동산도, 주식도 끝났고 조기 은퇴의 실낱 같은 마지막 한 줄기 희망으로, 소설의 문장을 빌리자면 '우리 같은 애들은 이제 코인뿐'이라며 암호화폐 열풍이 다시 불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꾸준히, 건강하게 일하는 법'을 말하는 내 책은 눈치가 없는 걸까? 한동안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청난 몰입감(내 얘기야..) 속에서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이 결국은 퇴사도, 내 사업도 아니고 일단 회사를 다니기로 결심하는 부분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계속 다니자'가 아니라 '일단은, 계속 다니자'여서. 그러니까, '일단'이여서. 일단이니까 언제든 멈출 수 있으니까.
물론 '일단'을 붙일 수 있었던 건 소설 속 암호화폐 투자 대박 덕분일 수도 있지만 최근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본 적이 있다. 얼마 전 언론 보도로 화제가 되었던, 평범한 직장인이 코인 투자로 수십억에 가까운 돈을 벌고 조기 은퇴한 실제 사례였는데,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직장인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하면서 어디선가 만났을 수도 있을 만큼 나와 비슷한 업계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코인 투자로 평생 먹고 살만큼의 돈을 벌었음에도 그는 퇴사 후 비슷한 상황의 지인들과 사무실을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만 출근하며, 평소 바랐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일, 오래, 꾸준히,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도, 이와 비슷한 현실 속 실제 주인공도, '일하는 삶'을 내려놓지 않았다. 많은 직장인들이 월급 때문에 일하지만, '월급'이 필요 없어졌을 때도 끊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일지를 고민하고 찾는다. 부동산에 이어 주식에 이어 코인까지 억울한 벼락 거지를 양산하는 요즘, 존버와 가즈아를 외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만 같은 요즘, 나의 노동 소득의 가치는 한없이 귀엽고 미미해지는 요즘 오히려 더욱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직 주식 대박도 코인 대박도 나지 않았지만, 로또 되면 뭐하지? 와는 조금 다른 결의 고민을 한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돈을 벌고 싶은 이유에 대해, 내가 원하는 일하는 방식에 대해. 예를 들면 나인 투 식스 하는 삶, 사무실로 출근하는 삶, 즉 '시간과 공간의 자유가 없는 삶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원치 않는 관계로부터의 해방' 같은 것.
직장 생활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끝을 모르겠지만, '일하는 자아', ‘일하는 나’라는 사람이 그 색과 결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며 점점 더 내가 원하는 모습, 건강한 모습이기를 바라본다. 조금씩 천천히 준비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