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셜트래블러 Jul 21. 2021

#그녀에게 바치지 못한 헌사

블랙 위도우(2021 /케이트 쇼트랜드)

‡운명이라는 과정의 아름다움


 나에게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을 흔쾌히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마음에 흔적이 남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두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2004년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이며, 다른 하나는 2016년 영화 <컨택트>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그리고 운명이라는 강렬한 공통점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현대 문물의 발달로 돈을 주면 해당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시기를 지나 서로에게 편해지고, 결국 사랑의 끝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하는 몹시 아픈 결말처럼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준 상처로 인해 서로를 잊기 원하고 기억을 지운다. 그럼에도 운명처럼 다시 마주치는 그와 그녀들이 다시금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통해, 내 안에 자리한 이성이라는 벽에 살며시 구멍을 뚫어 감성이라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음을 내게 깨닫게 해 준 신기한 영화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운명’이라는 단어의 존재를 어렴풋이 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영화 <컨택트>는 <이터널 선샤인>보다 더욱 운명을 강조하는 영화다. 영화는 이미 예정된 슬픔으로 점철된 미래라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소중한 것이 있기에 그 운명이 비극적인 종착역에 다다를지라도 선택하고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특히 영화는 루이스가 운명을 선택하는 과정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는데, 관객의 감정을 결을 그대로 결말까지 루이스와 함께 가져가도록 만든다.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영화는 루이스가 외계인들이 지구로 온 이유를 알아내는 이야기와 영화 중간중간 루이스와 딸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엇갈리는데,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면 두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비밀이 한 번에 밝혀진다. 결말을 통해 그녀의 운명적 선택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데, 이는 관객들이 루이스의 행복했던 시간, 그리고 처절하게 슬픔으로 무너졌던 그 시간을 함께 스크린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주인공 루이스의 숭고한 선택에 더욱 마음 한구석이 아릴 것이다. 이렇게 관객의 마음, 특히 이성을 중시하며 운명은 허구로 취급하는 내 마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영화들의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는 탄탄함으로 우리를 설득시키고 몰입시킨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만큼 영화가 설득력을 지닐 때 소재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선사할 수 있지만 사실 여간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영화 내 주인공의 운명을 이미 관객들이 알고 있고, 운명이라는 종착지로 주인공이 걸어가는 길이라면 관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까?. 더욱이 종착지가 정해진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 중 한 명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애정을 받는 인물이라면 관객은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까?. 애정 하는 히어로의 정해진 마지막 서사를 통해 관객들의 마음에 그를 언제든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인장이 찍히기를 관객들은 당연히 기대하고 기도할 것이다. 그의 마지막 서사가 아름답기를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당연한 이야기다.  


 자,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으로 마블의 인피니트 사가라는 큰 시나리오는 막을 내렸다. 마블 시리즈는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9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까지 총 23편의 영화들이 개봉했으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자, 전설로 남을 만한 서사시로 평가될 것이다. 마블의 매력적인 히어로들에게 우리 지구인들은 약 11년간 흠뻑 빠졌다. 또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의 죽음과 퇴장에 함께 슬퍼하고 그들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이를 추억하는 지구인들에게 블랙 위도우의 솔로 무비는 우리를 설레도록 만들었고, 코로나로 영화의 개봉이 미뤄지며, 우리는 1년이 넘게 그녀를 기다렸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설레는 마음과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이미 엔드게임에 공개된 대로 그녀는 인피니트 스톤을 구하려고 목숨을 던졌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멋진 퇴장을 우리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개봉되는 영화 <블랙 위도우>는 이미 죽음이라는 운명이 정해진 그녀에게 바치는 헌사와 같은 영화이길 바랬다. <이터널 선샤인>과 <컨택트>의 정해진 운명으로 향하는 여정은 우리의 감정을 만졌을 뿐만 아니라, 그 운명으로 가는 길 자체가 아름다웠기에 영화는 명작으로 남았다. <블랙 위도우>를 기대하는 지구인들에게 이런 기대는 과한 것이었을까? 기대와 달리 아쉽게도 <블랙 위도우>는 극단적 PC주의에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 주인공을 소개하는 소재로 소비되고 말았다. 한 명의 팬으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영화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가족으로 이어지는 마블


 항상 베일에 싸여 있던 블랙 위도우(이하 나타샤)의 과거. 그녀의 과거는 인피니트 사가 내 다른 영화에서 잠깐씩 등장했다. 나타샤가 소련에서 스파이로 어떻게 키워졌는지, 왜 그녀는 엔드게임에서 어벤져스의 죽음들에 슬퍼하며 홀로 자리를 지켰는지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이번 영화는 나타샤의 과거를 조명하고, 과거에 있었던 그녀의 과오를 정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1995년 오하이오 주. 평범한 가족으로 보이는 나타샤의 가정. 나타샤의 동생이 넘어져 다친 날 저녁,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피난 가듯 짐을 챙겨 어디론가 향한다. 그들은 이내 군사기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하고 비행기를 타고 탈출한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쉴드에게 쫓기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아슬한 추격전 끝에 엄마는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아빠는 차를 던지는 등의 괴력을 보이며 함께 쿠바로 탈출한다. 사실 이들은 레드룸이라는 단체의 일원들이었으며, 당시 쉴드에서 실험 중인 뇌 지도를 훔치는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가족으로 위장해 오하이오에 거주했던 것이다. 임무가 끝난 그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나타샤와 동생은 다시 레드룸으로 끌려간다. 

 시간이 흘러 21년 후, 소코비아 협정으로 수배자가 되어 숨어 사는 나타샤. 그녀는 부다페스트 은신처의 물품을 전달받고, 그 물품으로 인해 빌런 테스크 마스터의 공격을 받는다. 나타샤는 기지를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나고 물품을 있었던 부다페스트로 향한다. 부다페스트에서 동생 옐레나와 재회하고 레드룸이 건재함을 알게 된다. 이에 레드룸의 아지트를 알기 위해 위장 가족의 아빠였던 레드 가디언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엄마였던 멜리나를 함께 만나러 간다. 다시 만난 위장 가족. 그들은 함께 지난 과거의 향수를 되새기고, 해묵은 감정들을 서로에게 쏟아낸다. 그러나 이내 레드룸의 공격이 시작되고,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붙잡히고 만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관객들의 감정을 몰입시키는 흔한 소재로 사용하지만, 관객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기란 쉽지 않다. 한국에서는 가족 관련 소재는 대부분 소위 ‘신파’로 사용되어 관객들을 억지로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한국 영화 초창기에는 신파가 관객들의 공감을 얻었지만, 이제 신파라는 단어와 달리 진부한 표현의 대표주자가 되고 말았다. 할리우드에서는 가족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해석할까? 할리우드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영화처럼 억지로 눈물을 흘리도록 몰아붙이지는 않지만, 가족애를 가치의 중점으로 두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 뜬금없는 스토리가 이어질 때가 종종 있다. 최근작으로는 2021년 5월 개봉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아미 오브 더 데드>를 예로 들면, 화려한 액션에 가족의 부성애를 억지로 섞으니 영화의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려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에 도저히 공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마치 이제 조롱으로 쓰이는 '내가 아빠다'라는 표현을 넘어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에서는 '마샤'라는 엄마의 이름이 밈으로 쓰이며 놀림받는 현실을 목도할 때, 가족이라는 주제를 영화에 녹여내기란 여간 쉽지 않은 것은 틀림이 없다. 영화 <블랙 위도우>도 마찬가지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는 친모에게 버려지고 레드룸에서 살인 병기로 길러졌다. 그녀는 레드룸에 의해 불임수술까지 받게 되고 여자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의 삶이 포기된다. 그렇게 가족도 친구도 없이 살아가던 나타샤는 어벤져스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소속감을 느끼게 되고 또 하나의 유사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사람의 소중함을 느꼈던 그녀에게는 소코비아 협정으로 인한 어벤져스의 반목과 와해는 크게 상처로 다가왔기에 그녀는 어느 한 팀을 선택하지 않고 깍두기로 남았던 것이다. 타노스로 인해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고, 어벤져스마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들을 그리워하며 홀로 어벤져스 기지를 지킨다. 이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가족이라는 가치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그녀에게 블랙 위도우 솔로 영화는 어벤져스로 합류하기 전 그녀의 과거를 보여주며 그녀에게 또 다른 가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코비아 협정으로 뿔뿔이 흩어진 히어로들. 블랙 위도우 또한 정부에 쫓기며 숨어 지내는데, 그녀 앞으로 그녀의 과거가 담긴 소포가 도착한다. 소포를 계기로 그녀는 부다페스트로 향하고, 그곳에서 만난 동생 옐레나와의 재회한다. 옐레나를 시작으로 다시 만난 예전 가족들. 비록 위장 가족이었지만 그들이 가족으로써의 함께 살았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늘 혼자라고 생각했던 나타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이미 곁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로써 영화는 나타샤에게 가족에 대한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나타샤의 동생인 옐레나에게 블랙 위도우라는 정통성을 심어 놓는다. 이는 나타샤의 퇴장이 이미 확정된 결과에 따라 동생 옐레나에게 블랙 위도우라는 배톤을 넘기기 위한 서사다. 하지만 그 배톤을 넘기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문제다. 영화가 서로 간의 감정들을 세밀하게 쌓는 등 시간을 들였어야 했는데 부족했다. 잠깐의 대화로 진실된 감정이 서로에게 전달되고, 예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는 것으로 해묵은 감정이 해소될 리 만무하다. 즉 영화는 가족에 대한 서사를 관객들에게 부여하고 이를 설득시키는데 실패했다. 그저 블랙 위도우의 퇴장에 따른 2대 블랙 위도우를 소개하는데 소비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보인 나타샤의 소속감에 대한 책임감과 그 마음은 오롯이 관객들에게 전해져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과정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영화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극단적 PC주의의 폐해


 인간은 서로 평등하다. 평등은 존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평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에도 평등은 동일한 존엄을 향유할 수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특히 평등을 이야기할 때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이야기를 흔히들 하곤 한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 색깔의 앞치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 가지 색깔의 앞치마에 대한 가치는 색깔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앞치마라는 본연의 용도가 앞치마의 정체성(용도)을 구분한다. 이러한 예를 들며 평등을 흔히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표현을 하곤 하지만, 사실상 다르다고 하는 것도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 우리는 흑인과 백인이 피부색이 다를 뿐 동일한 인간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남성과 여성도 그저 성별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다름의 차이가 서열의 위계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서열의 위계는 인간 사이의 평등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한다. 지금껏 사회는 인종 간, 남녀 간 위계가 분명히 존재했으며,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평등을 보장받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외침은 환영받아 마땅하다. 이런 외침이 PC(political correctness) 주의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유행되었다. PC주의를 한글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번역된다. 이는 개인이 PC주의라는 사회적 신념을 통해 말의 표현 혹은 용어, 행동 등에서 인종과 종교, 성차별, 사회적 약자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PC주의는 궁극적으로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 세계적으로 PC주의가 특히 문화계를 휩쓸었는데, 영화계를 비롯해 다양한 곳에서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금 바로잡고자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당장 넷플릭스를 켜보시라. 흑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많아졌고, 돈에만 집작 하는 것으로 소비되었던 동양인들이 중요한 주연 및 조연으로 활약하고 있다. 얼마 전 <미나리>와 같은 한국 영화가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등 기울어진 운동장이 다시 평평해지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되고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2016년에 만들어진 <고스트 바스터즈>나 흑인 여성들이 NASA 과학자를 연기한 <히든 피겨스>,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올드 가드>, 할리퀸이 주연인 <버즈 오브 프레이>등이 있고, 우리나라 영화에는 라미란 주연의 <정직한 후보>, 이영애 주연의 <나를 찾아줘>, 여성들의 연대가 돋보였던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등이 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PC주의가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디즈니가 만든 다양한 애니메이션 또한 마찬가지다. 더 이상 디즈니의 주인공들은 백인이 아니다. 당장 디즈니에서 실사영화로 준비하고 있는 인어공주만 하더라도 주인공의 인종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처음으로 흑인이 인어공주로 데뷔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블랙 위도우>는 세계에서 현재 여성 배우의 정점인 스칼렛 조핸슨이 연기한 단독 히어로 영화로써 세계 마블 팬들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여성 주연의 영화로 그동안 마블 시리즈가 이야기했던 사회적이고도 철학적인 내용을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가 되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인류사 동안 여성들에게 쓰여 있던 굴레와 인식들을 레드룸이 여성으로 구성된 위도우들을 세뇌시키는 것으로 은유하였다. 세뇌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인권의 핵심 요소를 없애는 작업이며, 세뇌를 푸는 행위는 여성 인권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러한 PC주의적 표현을 여성 영화답게 영화에 주제를 자연스럽게 비유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와 같은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영화가 여성 중심의 서사를 자연스럽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아쉬운 점으로는 영화에서 표현되는 남성은 모두가 못난 사람으로 표현된다.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은 메인 빌런이라 넘어갈 수 있지만, 위장 가족의 아빠로 나오는 레드 가디언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예전의 명성에 집착하는 개그 캐릭터로 소비된다. 심지어 나타샤를 옆에서 돕는 남성은 나타샤의 사랑 혹은 관심을 얻기 위한 찝쩍거리는 수컷처럼 묘사된다. 심지어 이런 감정을 감지한 나타샤가 남성에서 동료라며 선을 긋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남성들이 소비되는 것이 마치 지금까지 영화에서 소비된 여성들에 대한 '미러링'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러링'이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일베를 미러링 한다며 나왔던 워마드 또한 사회의 문젯거리로 대두되었다. 잘못된 미러링은 결국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가진 선한 가치들을 바닥으로 추락시킨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영화의 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넓은 포옹과 연대가 필요하다.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평평한 운동장을 기울이기란 쉽지만, 다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두세 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다른 상대방을 비하하는 방식은 오히려 반발심을 유발하고, 반목을 더욱 크게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상대방을 모욕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오히려 싸우자고 덤벼드는 행동에 가깝다. 굳이 남성들을 비하하지 않더라도 나타샤와 옐리나의 활약을 통해 충분히 주제의식을 강조할 수 있고, 오히려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블랙 위도우의 태도와 그녀의 감정들은, 남과 여를 넘어서 어벤져스라는 공동체를 조율하고 중재하는 등 함께 연대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장기이자 매력이었으며, 마블 팬들이 그녀에게 존중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러링이라는 ‘악수(惡手)’를 선택함으로 오히려 남녀 갈등을 부추기는 영화로 관객에게 비칠 수 있어 감독의 선택이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녀에게 바치지 못한 헌사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았던 그녀는 늘 어벤져스에서 갈등을 무마시키는 중재자이기도 했으며, 다른 구성원들을 돌보는 누나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남성 중심의 히어로 시리즈에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멋진 히어로이기도 하다. 그런 히어로의 숭고한 죽음으로 인해 이제 놓아주어야 할 시기를 맞은 관객들에게, 그녀의 무덤 앞에서 코를 푸는 장면은 더없이 모욕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새로운 페이즈를 준비하는 마블에게 나타샤는 그저 마블 영화의 페이즈를 이어 주기 위해 소비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더욱 안타깝다. 이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더없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 명의 팬으로 마블이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당당한 여성 히어로의 대표인 그녀의 퇴장에 부족한 글과 문장으로 박수와 헌사를 바친다.      


‡영화가 끝난 후

     

 디즈니에서 마블 시리즈를 드라마로 펼치고 있다. 완다비젼을 통해 완다는 각성했고, 팔콘 앤 윈터 솔저를 통해 미국을 대표하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가 백인에서 흑인(팔콘)으로 대중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며 이양되었다. 또한 로키를 통해 조금은 복잡하지만 멀티버스(다중 우주)가 앞으로의 시리즈에 도입될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지만 개념이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멀티버스를 통해 다른 우주에서 여전히 여성 히어로로서 활약하고 있는 나타샤를 잠깐이나마 카메오처럼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다시 한번 당당히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때는 철부지 같은 어벤져스 멤버들을 여전히 아우르며, 악당을 힘을 모아 무찌르는 연대의 아이콘으로 멋지게 등장하길 간절히 기도해본다. 

이전 13화 #억압과 배제의 로맨스 서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