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건(2017 / 제임스 맨골드)
한국에서 나는 주류에 가깝다.
성인 남성으로 직장을 가지고 있고, 가족을 이뤄 아이들을 양육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거의 주류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 나에게도 단 한 번, 사회에서 소수자 취급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때는 워킹홀리데이로 아내와 함께 호주에서 일과 여행을 할 때다. 차를 운전해 시드니를 가던 중 마주 오던 경찰차가 유턴한 뒤 사이렌을 울리며 쫓아왔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을 위로 들고 차에서 내렸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차에서 내리면 경찰은 위협받는다고 느껴 진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놀랐으면 그렇게 행동을 했을까! 다행히 경찰은 면허증을 본 후 몇 가지를 내게 묻고는 그냥 돌아갔다. 당시는 무사히 상황을 넘긴 것에 안도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동양인이기에 경찰에게 검문을 당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게 호주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이다. 그 추억 한편을 돌아보면 반년 간의 호주 생활은 늘 따듯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그 사회의 타인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가끔 호주를 다녀온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운이 좋았구나’
코로나로 전 세계가 침음 하는 지금, 21-22 시즌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관중들과 함께 개막했다. 우리의 영웅 손흥민은 개막전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으며 토트넘의 영웅임을 스스로 증명했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관중들과 호흡하며 긴 시간 동안 다시 돌아온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한 명의 손흥민 팬으로 매우 자랑스러운 경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경기가 시작하기 전 선수들은 무릎 꿇기 저항 운동을 한다. 예전에는 관중들도 운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처럼 침묵을 유지하였으며 운동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면 침묵이 곧 환호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달랐다. 오랜만에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돌아와서일까. 저항 운동을 하는 시간에도 매우 왁자지껄했다. 이제 그 의미가 퇴색된 것일까? 어쩌면 매번 경기마다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무릎 꿇기 저항 운동을 진행하는 그들이, 동양인을 비롯하여 유색인종을 쉽게 차별한다. 코로나로 더욱 그 차별은 심해졌다. 이제 경기마다 무릎을 꿇는 운동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난 21년 4월 손흥민은 경기중 얼굴에 가격을 당했다.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는 손흥민에게 경기 후 개를 먹는 다이버 등 손흥민 SNS에 혐오 표현이 넘쳐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솔샤르 감독도 ‘내 아들(SON)이었으면 굶겼을 것이다’라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사실 손흥민이 동양인이 아닌 영국인이었으면 이런 대접을 받았을까. 매우 속상한 일이다. 손흥민의 구단인 토트넘과 영국 프리미어리그도 자체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영국 내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운동이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탈 팰리스의 공격수인 윌프리드 자하는 무릎 꿇기 운동은 의미가 없다며 더 이상 무릎을 꿇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흑인 당사자이기에 운동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을 더욱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2021년을 살아가는 지금, 여전히 인종에 대한 차별은 유지되고 있으며, 오히려 코로나 때문에 흑인들뿐만 아니라 동양인에 대한 혐오 또한 더욱 확대되었다. 그 옛날부터 진행되던 인종차별과 혐오. 그 혐오가 끝없이 확대되면 그 끝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영화 <로건>에서는 더 이상 돌연변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잰더 박사의 말에 의하면 돌연변이의 통제를 원했던 과학자들이 전 세계의 음료수, 시리얼, 음식 등에 유전자 치료물질을 몰래 집어넣었고, 그로 인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돌연변이들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표준인 세상에서 돌연변이의 도태는 어쩌면 치료 혹은 예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엑스맨>이 표현하는 뮤턴트들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로건>에서의 세상은 소수자들을 말살하고 정상 인간이라는 획일적인 표준을 제시한 세상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사람을 말살한 토대 위에 살아가는 표준들은 행복할까?
엑스맨은 보통의 히어로 영화와 달리 상당히 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다. 엑스맨들은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특별함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자 사회에 숨어 사는 것을 선택한다. 이처럼 뮤턴트라 불리는 이들은 어벤저스처럼 히어로가 아닌 변종이자 소수자다. 사회는 이들을 혐오하고 두려워해, 이들을 제재할 법안을 준비하고 사회에서 내쫓으려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뮤턴트 중 하나인 찰스 자비에 교수는 학교를 세우고 뮤턴트들을 모아 능력을 조절하고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반면 찰스의 동료였던 매그니토는 인간들이 뮤턴트들을 사회에서 몰아내려고 하자, 뮤턴트들을 모아 인간사회에 저항한다.
영화 내에서 이와 같은 대립은 마치 인권운동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찰스 자비에 교수의 모습에서 비폭력 투쟁으로 인종차별이 없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사는 사회를 꿈꿨던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이, 평등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며 급진적인 투쟁을 펼친 말콤 엑스에게서는 매그니토의 체취가 느껴진다. 찰스 자비에와 매그니토는 뮤턴트들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꿈꾸며 서로를 의지하는 동료였으나, 결국 모종의 사건으로 갈라서게 되고 또 거대한 공통의 적 앞에서는 다시 힘을 합치는 등 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서사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영화 <로건>의 사회는 그들을 모두 사회 밖으로 밀어냈다. 결국 모든 뮤턴트들은 로건과 찰스 등을 제외하곤 모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찰스 자비에 교슈가 이끄는 뮤턴트들과 매그니토가 이끄는 뮤턴트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가 바로 ‘울버린(로건)’이다. 엑스맨 시리즈 1편부터 모든 영화의 중심에 있고, 어두운 과거를 가진 주인공이기도 하다. 울버린의 어린 시절 배다른 형제였던 빅터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총을 쏘고, 아버지는 죽음에 이른다. 분노한 그는 뮤턴트로서의 능력을 각성하고, 빅터의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사실 빅터의 아버지가 그의 친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어두운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그의 삶은 과거처럼 평탄치는 않았다. 그의 마지막 영화 <로건>에서 그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죽거나 날 떠나’
거의 불사의 몸이었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로건은 노망이 들어버린 찰스를 멕시코 국경지대에 숨겨놓고, 자신은 운전기사로 근근이 살아낸다. 연신 기침을 해대며, 강도를 만나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클로로 간신히 물리치는 로건. 그와 찰스가 이렇게 병든 것은 결국 인간이 소수자를 혐오한 탓이다. 뮤턴트들이 이제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러한 유전자 변형 물질을 자신들도 모르게 섭취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뮤턴트들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했고, 결국 말살되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 극에 달한 혐오는 매우 다양하다.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다면, 한국의 혐오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자본의 차이로 인한 혐오는 기본으로, 남성과 여성 서로에 대한 혐오, 장애인,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 각기 각 층에서 혐오가 넘쳐난다. 특히 LGBT에 대한 혐오는 매우 크다. 엑스맨 시리즈를 보면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엑스맨을 처음 영화화한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역시 동성애자였기에 소수자로서의 의미가 영화에 충분히 녹아들 수 있다. 그렇기에 LGBT로 인한 혐오 또한 영화 내에서 뮤턴트들에 대한 핍박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전달하는 의미 또한 크다. LGBT의 혐오로 인해 현재 한국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난항을 겪고 있다. 반대의 입장에서는 남자 사위·여자 며느리 또는 당신의 자녀가 동성 간 결혼을 한다면 등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이와 같은 원색적인 비난에 소수자들의 인권은 무너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떠한 모습과 형태든 사람이라면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 동성애는 병이라는 잘못된 인식도 넘쳐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LGBT의 옳고 그름을 떠나 ‘최소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라는 것에 선을 긋고 싶다. 그 옛날 발달장애가 병이라서 치료해야 한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인권은 분명히 말한다.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인권이 이야기하는 기본 가치다. 물론 LGBT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급격히 변하는 것은 불가해 충분한 시간과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과 혐오는 폭력이 되어 그들에게 당도하는 순간 김기홍 활동가, 변희수 하사처럼 하늘의 별로써 그들을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혐오로 인한 수많은 소수자들의 끝은 생명의 소실이다. 마치 영화 <로건>에서 사회로부터 말살된 뮤턴트들처럼 말이다.
로건은 자신을 찾아온 멕시코 여성에게 그녀의 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숨어 살고 있던 로건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딸을 캐나다 국경까지 데려다주면 5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에 고민한다. 그는 현재 찰스와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한 보트를 구입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상황. 결국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고 모텔로 찾아가지만 이미 그녀는 죽어있었고 그녀의 딸 로라는 사라지고 말았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그는 황급히 차를 몰아 찰스를 데리고 떠나려고 하지만, 로라를 찾는 용병들이 로건의 은거지를 습격한다. 이때 로건의 차량 트렁크에 숨어있던 로라가 발견되고, 로라를 데리고 가려는 용병들로 인해 로라의 비밀이 드러난다. 로라는 찰스 자비에의 말처럼 뮤턴트였으며, 로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울버린이었음이 드러난다.
용병들을 간신히 따돌리고 함께 도망가는 그들. 도망가는 중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마주친다. 트럭이 달리는 도로에 말들이 뛰쳐나와 위급한 상황. 찰스는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자, 로건은 시간이 없다며 누군가 와서 도와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찰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왔잖아’
당장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누군가 도울 것이라며 눈을 돌리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유색인종, 장애인, LGBT 등의 소수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이다.
그 요청을 소수자인 그들이 먼저 실천함으로써 우리에게 화해와 연대를 권유한다.
로건 일행은 도움을 준 계기로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는다. 아마 영화 흐름 중 가장 평화로운 시퀀스가 아니었나 싶다. 식사 전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고 차려진 음식을 하나씩 맛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일상에 휴식 같은 혹은 삶의 휴가와 같은 시간을 보낸 뒤 침대에 누운 찰스는 이렇게 말을 한다.
‘저기 로건, 이런 게 바로 삶이라네. 집, 사랑하는 사람들. 안전한 곳. 잠시 여유를 갖고 느껴보게. 자넨 아직 시간이 있어.’
그들은 늘 쫓겨 왔고, 싸워왔다. 그들의 삶에 휴식과 휴가는 없었다. 로건의 삶은 더욱 비루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와 한가로이 음악을 듣는 아이들의 모습, 가정에서의 일상은 그들의 삶에 없었다. 찰스는 이미 자신은 늙고 병들었지만, 유전적으로 로건과 이어지는, 마치 딸과 같은 존재와 남은 삶을 사람답게 보낼 것을 부탁한다. 이제 로건은 이제 고독한 존재를 벗어나, 찰스가 뮤턴트들에게 유대를 보낸 것처럼 로건도 자신에게 맡겨진 후세대들에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의 삶을 지지해주어야 하는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 즉 찰스에게 로건은 배턴을 이어받았다.
로건에게 있어 찰스는 마치 아버지와 같았다. 서로에게 의존하며 함께 가치를 지켜가며 때로는 좌절을, 때로는 희망을 맛보며 함께 뮤턴트의 삶을 위한 길을 걸어왔다. 마치 유사 부자와 같은 관계에 이제 로라라는 아이가 들어옴으로 잠시나마 그들은 가족이 된다. 그동안 엑스맨 시리즈의 중심에서 든든히 지켜왔던 프로페서 X, 찰스 자비에 교수는 농가를 습격한 용병들과 로건의 유전자로 만든 클론인 X-24에 의해 영원한 휴가를 떠난다.
그들의 습격을 간신히 피한 로건은 로라와 함께 목적지인 ‘에덴’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에덴은 로라와 함께 실험을 당했던 친구들이자 뮤턴트들이 모여 있었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로건은 떠나기로 한다. 로라는 자신들과 함께 가기를 거절한 로건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다. 이에 로건은 로라에게 숨겨놓은 마음을 말한다.
‘이대로 갈라서는 게 나아. 이런 건 젬병이니까. 내가 아끼는 사람들은 늘 험한 꼴을 당해.’
로건은 로라에게 거침없이 말하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헤어진다.
다음 날, 용병들이 아이들을 습격한 사실을 알게 된 로건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 늙고 병든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유전자로 만든 클론 X-24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에 로건은 능력을 잠깐이나마 증폭시키는 약을 투여하고 로라와 협동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결국 약효는 떨어지고 X-24에게 로건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그렇게 로건이 죽기 직전 로라는 로건이 늘 자살하려고 가지고 다녔던 아다만티움 총알로 X-24를 물리친다.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온 로건. 로건은 로라에게 당부한다.
‘그들의 뜻대로 살지마’ 그런 로건에게 로라는 ‘아빠’라고 말한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의지할 곳 없는 실험체였던 로라가 처음 사람으로 또 가족이라는 유대를 느껴 머물고 싶었던 곳이 바로 로건이었다. 늘 주변의 사람을 떠나보내고 뮤턴트로서의 삶을 원망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로건 또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가족이라는 유대를 선물 받는다. 그의 삶의 마지막은 더없이 찬란하고 따듯하다.
감독은 이번 영화 <로건>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처음 동성애자였던 브라이언 싱어 감동이 엑스맨들 통해 소수자들의 삶에 대한 문을 열었다면,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엑스맨 시리즈 중 가장 인기 있는 울버린 캐릭터와 기존 뮤턴트들의 죽음으로 서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다면 감독이 서사의 문을 닫으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21년 6월에 디즈니에서 극장 개봉한 애니메이션 <루카>를 보면 인간사회에서 소수자들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인간들의 눈에 괴물들인 인어들은 물에서는 인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뭍으로 나오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다. 인간들의 세상이 궁금한 인어 루카는 우연히 자칭 인간 세상 전문가 알베르토를 만나 함께 인간 마을에서 철인 3종 경기 대회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들은 물에 닿으면 인어로 변하고 마는데, 마침 대회 당일 비가 내리고 그들은 정체를 인간들에게 들키고 만다. 하지만 루카와 알베르토와 함께 지냈던 인간들은 그들을 품어주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마을 아주머니 두 명이 스스로 머리에 물을 붓고 인어로서의 정체성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이렇게 소수자들은 표준만을 강요하는 인간사회에 숨어 살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긴 채, 마치 자신들도 보통의 사람인 척 애써 살아간다.
<로건>에서도 마찬가지다. 로건과 로라가 향하는 목적지는 바로 ‘에덴’이다. 에덴은 성경에 나오는 땅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과 동물 등을 만들고 그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땅이다. 누구나 다 아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그들은 처음 어떤 편견도 없이 벗은 몸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뱀의 꼬임에 홀린 나머지 사과를 먹게 되고, 선과 악 등을 판단할 수 있는 자아가 생긴다. 이로 인해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다. 즉 에덴은 어떠한 편견이 없는, 다른 것을 판단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영화는 에덴의 상징성을 차용하여 뮤턴트들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영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로라가 로건을 만나기 전 머물던 모텔 이름을 비춰준다. 모텔의 이름은 liberty motel, 즉 자유다.
소수자들이 가장 원하는 삶은 지금 무엇일까? 영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뮤턴트들에게 아니 소수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영화는 로건이 묻힌 무덤과 무덤을 바라보는 로라를 보여준다. 로라는 무덤의 십자가를 X모양으로 돌려놓으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십수 년간 우리들과 함께한 엑스맨 서사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뮤턴트들의 정체성을 다시 강조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무덤 앞에서 코를 풀어버리는 작품과는 감동의 깊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런 뒤끝을 보여주는 나의 쪼잔함이 부끄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