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2020/ 이종필)
20대의 나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허풍의 꽃을 피웠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20대의 나를 회상하면 절로 얼굴이 빨개지곤 한다.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투기의 일종이라 나는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겠다.’라는 이야기부터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차를 구입하지 않겠다.’, ‘정의롭지 않은 **기업의 핸드폰을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 등 이상한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다. 이 중에 핸드폰 하나만은 끝까지 지켰는데, 이마저도 내가 주로 사용했던 핸드폰을 만들던 기업이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제 어쩔 수 없이 **기업의 핸드폰을 이용해야 하는 처지다. 결국 지금은 20대 때 스스로 했던 다짐들을 잘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허풍 가득한 웃긴 놈이었던 이십 대 시절 진지하게 고민했던 난제가 하나 있었다.
‘만약 한 가정의 가장된 나에게 회사에서 이중장부 등 정의롭지 못한 일을 지시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사표를 낼 수 있을까?’
이십 대라는 어린 나이었지만, 가장이 무게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나 보다. 그때에는 정말 답을 내리기 힘든 고민이었지만, 지금 가장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내게 이러한 상황이 닥친다면 여유 있는 미소와 부드럽고 확신의 찬 목소리로 상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당장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외침을 덧붙였으리라. 그만큼 한 개인에게 직장이 주는 의미는, 삶을 영위하는 하나의 수단을 넘어선 모든 것이다. 가정의 주 수입원이 직장을 잃는 것은 한 개인이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자식들 모두 실패자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인다. 사회복지사로서 사회적 안전망을 두터이 마련하자고 주장하는 나와는 달리, 이런 패자에게 인색한 사회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다수가 정의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공익제보자의 삶이 사회의 시스템으로 인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현실은 회사의 좋지 않은 일을 사회에 알린 내부고발자 혹은 공익신고자를 위한 보호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순응하는지도 모른다. 여태껏 여러 기사로 비슷한 예를 접해보면 양심과 정의에 눈을 돌리지 못해 침묵을 깨뜨린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익명 보호나 비밀 엄수들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해 쉽게 알 수 있다. 단체 또는 회사에서는 마치 친일 변절자를 찾듯이 제보자를 색출하고 응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다. 얼마 전 대한항공 제보자인 '박창진'씨를 예로 보더라도 능히 결과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박창진이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시라. 안타까운 기사가 인터넷 창에 우르르 떠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 국민이 함께 분노한 사건이라 이 정도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내부 고발 이후에 대해서도 기사가 나올 수 있었다. 조그만 기업, 그저 그런 비리 등을 고발한다고 해서 언론사가 기사를 작성하거나, 기사를 국민들이 당신을 지지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그만 기업과 그저 그런 비리가 우리 사회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언론사는 높은 조회수를 위한 기사만을 작성하고, 사람들의 공감과 관심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얻어내기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박창진 씨만 보더라도 사실 내부고발 후 고발자의 삶은 아주 비참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회사 등에서 당한 고발에 대해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서글픈 현실에서 영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은 상고 출신 말단 직원들이 목격한 회사의 진실을 내부 고발자가 되어 폭로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내부고발자의 고충과 어려움을 틈틈이 담아냈으며, 그들이 정의에 다가가는 과정을 감동으로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해냈다. 영화는 관람하는 관객들이 함께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잘 전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기를 낼 것을 권유한다.
1995년. 당시 한국의 기업문화는 남성과 여성, 학력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는 것을 전제로 영화는 시작한다. 대기업인 삼진 그룹은 말단 사원들인 상고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기 위해 토익 600점 이상의 결과를 낼 것을 요구한다. 말단 사원들은 새벽에 개설된 영어 토익반을 함께 다니며 진급의 꿈을 꾼다. 실제로 1990년대 모기업에서 상고 출신의 사원들을 위해 토익반을 개설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한국에 만연해있던 기업문화를 영화는 자조적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상고를 수석 졸업한 나름 수재들이 하는 일은 커피를 빠르게 타는 것과 상사들의 구두를 닦기 위해 배달하는 일 등 주로 잡일에 그들의 노동이 투여된다.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닌 학벌로 차별받던 시대를 영화는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들의 능력 유무와 상관없이 상고를 졸업했기에 일괄적으로 평가받고 배치된다. 실력과 능력을 갖춘 주인공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대졸 직원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때로는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으로 억울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만연한 불평등이 우리 사회에 학벌이라는 경쟁의 불을 지폈는지도 모르겠다. 학벌은 곧 능력이 되었으며, 사회는 능력이라는 학벌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 왔다. 만약 '능력'이라는 단어가 공평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면 또한 능력 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는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능력은 공평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오롯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공정한 경쟁을 통해 학벌이라는 상을 얻는 것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생 삼분의 이는 소득 상위 5 분위 가정 출신이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가운데 하위 5 분위 출신자는 4%도 되지 않는다.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 가정 추신 학생보다 많다.** 기회균등에 대한 담론이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성공은 성공을 낳으며, 부는 부를 낳는다. 이것이 미국만의 이야기일까? 한국 역시 마찬가지라는 답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대학교 입학이 얼마나 복잡하면 매년 이곳저곳에서 입시 설명회가 성행을 할까? 더욱 서글픈 현실은 집의 사정이 어느 정도 되어야 입시 설명회를 갈 자격이 주어진다. 여기서 자격이란 결국 집안의 부의 수준에 대한 자격이다. 맞벌이를 하며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학원에 모두 맞긴 가정은 입시 설명회를 갈 연차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서울 지역 중 교육의 메카로 평가받는 여러 지역에서 수도권 등 외각으로 멀어질수록 좋은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은 거리만큼이나 멀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어느 대학을 들어갔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피부로 매일 느끼는 청소년들. 그들이 결국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찾는 시스템 틀 안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의미 있게 꾸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노하고 있는지 모른다. 출발선이 아무리 같아도 자동차에 타고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과, 노모를 태운 리어카 밧줄을 등에 지고 뛸 준비를 하는 사람의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보장된 사회. 사업에 실패해도 한 번은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 나아가 기본 소득이 보장된다면 사람 간의 무자비한 경쟁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각 사람은 각기 존엄하다. 생명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이미 굳어져 버린 경쟁 시스템 안에서 함께 열매를 나누자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실패가 용인되는 삶을 우리는 꾸준히 이야기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재력으로 생기는 여러 기회들, 사회적 위치로 인해 생기는 여러 운(運) 등 이 모두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모두들 알고 있다. 자! 이제 사회의 시스템은 조금씩 공평하도록 만들어보자고 함께 이야기하자!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66p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51p
잔심부름을 하러 간 공장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한 자영은 상부에 보고 하지만, 검사 된 물의 오염 수치가 낮아, 회사는 주민들에게 약간의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조치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자영은 오염 수치가 적힌 서류를 추적해본 결과 조작된 사실임을 알게 되고, 입사 8년 차 동기인 유나와 보람과 함께 이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결국 그들의 고군분투는 영어 토익반의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합심하여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영화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와 일하는 말단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담았다. 그 목소리의 중심인 자영은 페놀 유출로 인해 아파하는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속이는 것에 대한 양심에 귀를 기울인 인물이다. 사람들의 아픔에 한번 눈을 감으면 그녀의 일상은 무리 없이 평안하게 지낼 수도 있다. 진실이라는 눈을 떠 정의를 주장한다면, 그녀의 삶은 분명 쉽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자영과 같이 고난의 상황에도 정의를 끝내 이루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거창한 이유가 동기가 되어 정의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의 괴로움으로 인해 한 발씩 정의를 이루는 길을 걸어 나간다. 이러한 자영의 발걸음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힘을 모으고 결국 정의를 이루어낸다. 영화는 이러한 발걸음을 가볍고 유쾌하게 담아냄으로써, 정의를 이루기 위한 연대가 그리 무겁고 비장한 것이 아님을 관객들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특히 영화는 자영이 주민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 관객들 자영과 같은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잘 표현되어 좋았다. 한편 관객의 입장에서 살짝 아쉬운 것은 당시 실제 사건에서는 영화보다 규모가 더 심각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자발적으로 회사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벌이는 등 강도 높은 시위를 통해 페놀 유출 회사를 규탄했다. 한 마을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고, 심지어 암에 걸려 생명을 위협받는 주민이 있음에도, 영화는 3명의 히어로들이 회사를 주무대로 첩보 작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실제 사건처럼 정의에 대한 공감이 시민들에게도 확산이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에서 담아냈다면 그 과정에 관객들도 함께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영화가 주 무대를 회사로 줄이는 바람에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3명을 중심으로 토익반이 연대하는 계기도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좀 더 풍부하게 표현되었다면 보다 설득력 있게 관객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토익반 모두가 영어로 배운 문장을 외칠 때, 손발이 살짝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가장 아쉬운 것은, 기업의 비리가 결국은 일본 전자회사가 다국적 금융을 통해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으로 결론을 도출한다. 이는 갑자기 페놀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가 론스타로 마무리해 영화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기업들이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녀들을 요직에 배치하는 것을 영화는 비판했지만, 영화는 그저 이 부분을 반전의 한 도구로 소비해버림으로써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도출해냈다. 정확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진짜 적은 누구인가. 오히려 기업이 이익을 위해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원래의 그림으로 영화를 펼쳐냈다면 좋았을 텐데, 뜬금없는 악당을 상정해 오히려 현실에 눈을 살짝 돌린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영화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은 여러 장단점이 녹아져 있는 영화이지만, 내부고발로 인해 자리마저 없어진 자영과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던 친구들. 한마음으로 손을 잡고 불의에 맞선 그녀들의 용기는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녀들의 우정과 그 연대에 심심한 박수를 보낸다.
영화 <다크 워터스>와 비슷한 주제와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어 여러모로 닮은 영화이기도 하다. 다만 본 영화에 비해 분위기는 무겁다. <다크 워터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보다 더 진중하게 사건을 다루며 불의에 눈을 부릅뜨며 응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마크 러팔로와 앤 해서웨이의 연기도 빛을 발하니, 좀 더 진지한 버전이 보고 싶다면 무료한 주말에 한번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