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2016/테아 샤록)
창 밖에 비가 내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늘 먹거리가 생각난다. 그리고 한없는 근심에 휩싸인다. 비가 내리면 생각나는 다양하고 맛깔라는 음식들. 치킨, 김치찌개, 파전, 떡볶이와 튀김 등 온갖 음식들이 생각이 나지만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도 먹고 싶은 마음에 쉬이 선택을 하지 못한다. 이 모든 걸 함께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대식가가 아닌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이 선택을 잘하지 못한다는 표현으로 선택 장애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무엇하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과도하게 선택지가 많은 사회적 환경 또한 그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정장애는 장애의 범주 혹은 질병에 속해 있지 않다. ‘장애’라는 단어 속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결함’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결정장애는 혐오표현이다. 또한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과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도서출판 창비, 2019.9.17., 6p
살아가면서 나는 세상 모든 걸 가진 사람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여기서 ‘거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타인의 삶이 부러웠던 적은 종종 있었으나, 꼬여 있는 장처럼 타인의 완벽한 삶의 흠집을 찾으려는 질투심 때문이다. 그래서 늘 배가 아픈가 보다. 영화 <미 비포 유>에서 윌이 마치 그런 사람이다. 아니 장이 꼬여 있는 사람 말고, 세상 모든 걸 가진 그런 사람이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대단한 재력, 거의 모든 스포츠를 섭렵하는 운동 능력, 뛰어난 지식,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 젊은 사업가이자 예쁜 여자 친구까지 있는 완벽한 삶. 친구들은 이 모든 걸 가진 윌에게 ‘재수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가 아픈 것은 진리다. 그런 그에게 사지 마비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그렇게 사고를 당하고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된 윌은 자신이 가진 것이 많았던 만큼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한편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인 루이자는 오랫동안 근무하던 카페의 폐업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고 만다. 루는 여러 일을 전전하다 시급이 높은 일을 추천받아 윌의 간병인으로 채용된다. 이미 윌의 못된 성격 탓에 수차례 간병인이 바뀐 상황을 모르는 루는, 윌의 뇌성마비 장애인 흉내에 당황한다. 이를 시작으로 윌은 루에게 비관적인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며 그녀를 무시하고 밀어낸다. 이미 세상과 사람들과의 문을 닫아버린 윌은 간병인으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며,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아낸다. 물론 깊은 상실감을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장애인을 어떻게 생각할까?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이 끝났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계와 같이, 고장 났다는 의미를 윌은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뇌성마비 장애인의 흉내를 내며 비장애인들의 시선을 조롱했다. 이렇듯 영화는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루를 비롯하여 윌의 친구들도 장애가 마치 병처럼 완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루의 남자 친구의 대사는 이를 확정한다. 장애인은 동정심을 받는 존재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시선을 윌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루가 윌은 비참한 자신을 동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밥맛으로 굴 필요는 없잖아요. 친구들한테는 그래도 싸지만, 난 내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굳이 내 인생까지 비참하게 만들려고 애쓰진 말아 줘요’
루는 윌에게 자신이 고용된 이유와 간병인으로서의 최선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윌에게 툴툴거리며 한 명의 사람으로 루는 윌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간다.
영화는 부자인 윌의 부모가 간병인을 직접 고용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복지 시스템으로 장애인 활동 보조를 장애 정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여하튼 장애 정도가 심할수록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활동 보조사는 사업을 진행하는 센터에 고용되어 근무한 시간만큼 급여를 받는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실행된 지 약 15년 정도가 흐른 지금, 급여도 많이 올랐고 장애인들의 시간 활용도 그 상황에 맞게 사용되도록 많은 보완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쉽다. 활동 보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며칠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현장 실습을 하면 누구나 쉽게 취득할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전문성은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 사회복지사의 월급 또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직업으로써의 활동 보조사는 그 삶을 영위하기에는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활동 보조사의 다수는 주부들로 구성된 여성들이 압도적이며, 장애 당사자 가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써 장애인의 활동을 거드는 것이 아닌, 마치 아르바이트라는 인식이 아쉽게도 강하기 때문에 몇 가지 문제점을 양산한다. 장애 당사자의 기능 혹은 장애 정도에 따라 활동 보조사는 장애인을 거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도가 심한 장애인은 하루 24시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받아도 활동 보조사들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같은 비용이면 좀 더 편한, 쉬운 장애인을 찾는다. 그렇기에 정작 활동 보조가 필요한 장애인들은 이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또한 장애 당사자 가족이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서비스를 진행하지 않으면서 친분이 있는 장애 당사자 가족끼리 서로를 활동 보조인으로 등록*하는 방법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지만 완벽하기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의 자립 혹은 탈시설에 있어 활동 보조는 중점이 되는 서비스다. 서비스의 질은 사실 활동보조인들의 자질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활동보조인이라는 직업을 전문화시키고 이에 마땅한 급여를 제공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영화에서는 루를 통해 활동보조인들이 갖춰야 할 몇 가지들이 눈에 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루는 윌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윌의 여자 친구가 그를 ‘도움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과 대비된다. 루는 윌의 과거와 과거로 인해 생긴 감정들을 공감하며 이해한다. 특히 윌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윌을 대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루의 특성과 장점을 잘 묘사한다. 그녀는 카페에서 근무할 때 매우 성실했으며, 고객의 원하는 바와 필요한 것들을 세심히 살피고 거들었다. 그녀의 이러한 장점이 윌의 남은 인생에 빛을 다시 찾아준다. 또한 그녀는 윌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정원을 함께 산책하기도 하고, 경마장과 음악회를 가기도 한다. 루가 계획한 모든 일이 좋은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특히 경마장에서는 윌의 자존감 등을 세심히 살피지 못하고 열정만으로 고집을 부려 나들이가 실패하지만 그런 루가 밉지 않다. 결국 루의 마음이 윌에게 전달되고 윌은 조금씩 루에게 아니 세상에게 다시 마음을 열어간다.
장애의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장애는 매우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신체와 발달의 장애로 나눌 수 있다. 윌은 사지마비인 장애인이라 루가 보다 쉽게 사람으로서 다가갈 수 있었지만, 발달의 영역은 다르다. 발달장애는 지적 수준이 낮다는 부분에서 같아 보이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거의 모든 개인이 다 고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영화 <허브>와 <웰컴 투 동막골>의 강혜정 배우와 같이 아이와 같은 순수한 장애인부터 <말아톤>의 조승우 배우처럼 호피 무늬에 집착하는 장애인도 있다. 자신의 뺨과 머리를 때리는 장애인부터 타인을 때리는 장애인도 있다. 이러한 개성들은 발달장애인이 표출하는 감정 또는 소통의 방식이기도 하는데, 각 장애인의 환경과 루틴, 좋고 싫음 등 각자 다르기 때문에 루처럼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케어하기 어렵다. 발달장애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이해를 하려면 공부도 해야 한다. 그저 틀에 맞춰진 사회와 규칙에 이들을 끼어 넣으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훈계와 지적밖에 없다. 그렇기에 활동 보조 서비스는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앞서 제기한 것처럼 활동 보조인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너무 박봉이다. 이렇게 박봉인만큼 누구나 쉽게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데, 우리의 이웃 누구나 쉽게 장애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서비스의 질은 떨어진다. 이에 대한 보완점으로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을 케어하는 보조인에게는 인센티브를 더 주는 방법도 있다. 이렇듯 앞으로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는, 필수 불가결한 서비스임은 틀림이 없다. 여하튼 루의 장점이 결국 윌과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영화의 뻔한 결과물이 살짝 아쉽기도 하다.
* 2021년 현재 코로나로 인해 한시적으로 활동보조 서비스를 부모가 할 수 있도록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비스를 진행하려면 절차나 서류가 매우 복잡해 실제로 이용하기 쉽지 않다.
윌은 사고 후 무엇하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는 집 안에 숨어버리고, 장애 안에 숨어 모든 관계를 단절시킨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의 과거와 장애인이 된 현재는 간극이 매우 크다. 그 간극의 크기만큼이나 그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해왔던 당연한 것들은 이제 매우 힘든 일이 되었다. 장애라는 것이 윌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먹어치운 것일까? 그는 장애인이 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자 안락사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러한 선택에 윌의 부모와 루는 윌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쓰지만, 그는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향한 그의 선택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유라는 고유의 속성을 발현한 온전한 선택일까. 이와 같은 선택의 옳고 그름에 대해 이 글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자신의 존엄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사회에서 장애인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등록 장애인은 약 262만 명이다.* 통계청 2020년 인구 추계치를 봤을 때 약 5,100만 명이니, 약 우리나라 인구의 5%가 장애인임에도 우리는 거리에서 장애인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다. 왜 그들을 마주칠 수 없을까? 그만큼 집과 시설에서 지내는 것이 좋은 집순이 증후군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삶에 자유라는 선택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마주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휠체어 경사로라든지 베리어프리와 같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에 좀 더 집중해서 살피고자 한다.
2017년 서울 강서구에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를 두고,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장애 당사자 가족들은 무릎을 꿇었다.** 설립될 특수학교는 귀족학교처럼 무슨 장애인들에게 이점을 주는 대단한 학교가 아닌 그저 의무교육을 이행하는 일반적인 학교다. 나라에서 정한 의무 교육을 집 근처에서 받기 위해 그들의 부모는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저 그들이 장애인의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결국 강서구의 특수학교는 서울시 교육청이 반대하는 시민들과 협상을 하며 이해를 구했고,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장애인들은 그들이 사는 집 근처에서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다.
반대하는 자들은 왜 특수학교 설립에 반대했을까. 먼저는 혐오 시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다니는 학교가 혐오시설이라는 이야기는 장애인을 혐오한다는 뜻이나 진배없다. 비슷한 예로 2018년 대구지역 어느 한 빌라에서는 장애인 자립생활주택이 입소한다는 이야기에 빌라 주민들이 결사반대한 사건도 있다.*** 그들 또한 장애인을 혐오했는데 특히 자녀 안전 위협, 거주환경 악화, 집값 하락 등의 이유를 들었다. 있다. 그들이 자녀 안전 위협, 거주 환경 악화 등의 이유를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즉 장애인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환경을 악화시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집값 하락이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집값이 하락해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다. 진짜로 그럴까? 이것 또한 장애인에 대한 편견 중 하나다. 교육부에서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장애인 특수학교 인접 1km 이내 집값을 조사한 결과 평균 4.34% 집값이 상승했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특수학교와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비인접 지역은 4.29%로 하락했다. 또한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는 특수학교 설립 부지 인근의 집값은 특수학교 설립이 최초로 발표되었던 2013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오히려 꾸준히 상승했다.**** 즉 특수학교가 집값 상승률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인식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애인은 자신이 다닐 수 있는 학교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학교뿐만이 아니다. 중증 발달장애인은 학교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을 케어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사실상 부족하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얼마 전 바우처를 활용해 발달장애인이 낮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주간 활동 서비스’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나, 전문가 부재 및 부족한 인건비 등의 이유로 사실상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인은 케어의 대상이기 때문의 그들의 기호나 취미, 개성 등은 철저히 무시되고, 센터에 자리라도 나서 다만 몇 년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면 감사한 상황이다. 이러한 센터는 발달장애인 주간보호 시설이라고 명칭 하는데, 센터마다 대기자가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몰려있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발달장애인들은 그들의 낮시간을 윌처럼 특별하게 꾸며줄 센터를 전혀 선택할 수 없다. 그저 낮시간에 그들을 케어할 곳만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또한 그들은 케어의 대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스스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늘 정해진 대로, 주는 대로 받아야 한다. 애초에 내가 들어갈 센터가 무엇을 중점으로 하는 곳인지, 무엇을 잘하는 곳인지 살피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것을 우리는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다. 즉 그들의 삶은 늘 선택권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윌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 된 스스로의 절망감으로 안락사라는 선택을 한다. 자신이 말한 존엄한 삶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장애인은 존엄하지 않은 존재란 말인가. 영화는 안락사라는 선택의 자유 위에 로맨스로 포장해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몄지만, 안락사를 선택한 이유를 사실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영화가 말하는 존엄한 삶을 위한 선택의 자유라는 명제를 사회에 꺼내놓아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사람들의 인식이 점차 전환되는 기회를 선사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장애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존엄사를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 장애인이라는 명칭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가진 절망의 깊이가 그의 선택을 이해하게 만들긴 하지만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보건복지부,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
**가장 큰 문제점은 정치인들의 잘못된 공약 등이 있었으나 정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그 부분은 차치하자.
***박주원 기자, ““장애인 이웃 안돼” 車로 막고 연판장 돌리고”, 한국일보, 2018.05.31.
****김정웅 기자,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논란, 특수학교 인근 집값은 정말 떨어질까?”, 이투데이, 2017.09.14.
내 안에 연예 세포는 이제 없어진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어둡게 읽어낸 나에게,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하튼... 에밀리아 클라크는 너무 사랑스럽다.
‘인생은 한 번이에요. 최대한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의무예요.’
그 인생의 의무를 장애인들도 열심히 살아볼 수 있는 사회가 도래했으면 좋겠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정상인?... 정답은 비장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