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주간보호센터를 기록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아무래도 자폐인이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인지, 우리 사회복지사들도 관심 있게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가 방영된 날이면 센터에 출근해 동료들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우곤 한다. 주로 자폐인의 특성과 행동에 대한 공감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때가 많다. 이렇게 드라마를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이용인들의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오기도 한다. 이용인들과의 추억들을 함께 이야기하며 즐거운 잠깐을 보낸다. 센터의 자폐인들은 같은 자폐라도 우영우와 매우 다른, 대부분 3화에 나오는 자폐인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펭수 노래를 부르며 순수함과 귀여움을 그들에게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자세히 본다면 예쁘고 귀여울 때가 왕왕 있다.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자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콘셉트로 인기를 몰이하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다. 장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 촘촘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에 대한 이슈를 사회 표면으로 끌어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놀라운 드라마다. 하지만 우영우를 통해 자폐인은 천재라고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공격성 기사를 접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기사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니 더욱 아쉬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에서 자폐인은 천재라고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주체들은 누구일까?. 바로 펭수 자폐인과 같은 중증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다. 이 부모들의 오해와 걱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오해는 시청자들에 대한 오해다. 시청자들은 우영우를 보고 모든 자폐인들이 천재라고 오해하지 않는다. 2022년 현재를 살아가는 다수의 시청자 아니 시민들은 예전과 다르게 장애에 대한 지식수준이 높아졌다. 두 번째로 당사자 부모들의 걱정은 우영우를 시청한 사람들이 우영우와 본인의 자녀들의 비교를 통해 다양하고 많은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마음에 생채기를 낼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중증 발달장애인 및 그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낸 사회복지사로 충분히 가족들의 걱정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발달장애 내에서도 능력에 따른 서로 간의 격차와 마치 계급과 비슷한 위치가 존재하기 때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주간보호센터에는 다양한 장애들이 '발달 장애'라는 명칭으로 통합된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용인을 대상으로 크게 두 가지 범주의 장애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다. 사실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는 서로 특징이 다르지만 주간보호에서의 특징의 다름을 크게 느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적 능력이 낮기 때문이다. 즉 주간보호에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낮은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자녀가 성인이 되어 갈 곳이 주간보호라는, 사실은 자본을 중심으로 능력이 요구되는 사회의 맨 끝에 위치하는 존재로 판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다수의 부모들은 상처와 속상함을 느낀다고 한다. 조금의 능력이 있어서 바리스타를 연습하거나 하다못해 작업장에서 포장 등 단순 작업이라도 할 수 있어 월 1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받을 수 있다면, 자녀는 부모들에게 큰 자랑이 되기도 한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것만으로 사회의 편견과 다양한 말들로 이미 상처가 가득한데, 장애인들의 능력 유무로 또 한 번 상처를 받는 부모님들이 정말 많다. 그렇기에 비장애인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드라마지만 당사자들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영우와 비교해 이야기하는 모든 말이 상처다.
그럼에도 주간보호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부모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괜찮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화의 펭수 장애인처럼 아무런 능력도 없고 소통이 쉽지 않아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개성을 가진 장애인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 자본주의, 능력 주의 극단에 가있는 그들. 진정 그들의 존재는 의미가 없을까?.
사람이면 누구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합의한 '인권'은 그들에게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사회적 비용을 창출하는 것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저 행복한 삶을 살아내면 된다. 그렇기에 우리 주간보호는 보호와 케어에서 재활로, 재활에서 낮 시간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변해왔다. 변화된 패러다임에 알맞게 함께 살아가면 된다. 규격화된 세상에서 비록 좌충우돌하겠지만 그저 우리는 당사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옆에서 거들어 주면 된다. 친구처럼, 형 누나 동생처럼, 마치 우영우 옆 최수연처럼 말이다.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넌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김밥이 또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우리는 봄날의 햇살 주간보호센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