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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진단 그 후

심경 변화: 장애 그게 뭐?

by 팬지

진단을 받은 그날은 각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크게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내 감정이 요동을 쳤다. 시간 나는 대로 생각이 나면 자꾸 여러 사례를 찾아봤고 챗GPT와도 계속 대화를 나눴다. 어디 물어볼 데가 딱히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뭔가 평소와 다른 '사건'이랄 게 생기면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라 주변에 알린다. 다른 누군가의 조언이나 공감으로 안정을 찾는 것 같다.

가족에게는 알리지 말자던 남편과는 달리 나는 주변에 알리면서 점점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내 친한 한국인 친구들에게 알렸고, 그 다음엔 에르고 테라피 선생님, 그리고 유치원 선생님들에게도 알렸다. 사람들에게 알리기 전, 나는, 아니 지금까지도 나는 의심소견이 아니라 확정 진단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단을 100% 신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부모라서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거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헷갈린다.

첫째로 범수는 상동행동이나 감각추구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 첨벙청범하거나 모래 만지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걸 내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혼자의 세계에 빠져서 즐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둘째는 범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원하는 사인이 있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나 자기가 익숙한 사람들과는 나름의 교류가 있다. 요즘은 가르쳐주니 모르는 사람이지만 접촉하고픈 사람에게 가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셋째는 ADI 검사 때 내가 잘못 답한 게 꽤 있는 듯하다. 표정이 별로 없다거나 제스처를 안 한다거나 그런 질문들이었는데 내가 주의 깊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몰랐던 것 같다. 표정이 풍부하지는 않아도 표정이 없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며, 제스쳐도 평소 모습을 살펴보니 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따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빠 행동 하나하나 다 관찰하고 따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근거에도 불구하고 진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고 말하는 억양이 어색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던 자폐스펙트럼 아이의 말투 정도까진 아니지만 범수 연령대의 아이들이 하는 억양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대명사를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아직도 Yes or No 질문에 Yes라고 답하기보다 질문자의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즉, 반향어를 하는 경향이 짙다. 이렇다 보니 의사소통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에서도 이렇다 할 친구가 없다. 놀아주는 형아 두 명뿐이다. 놀이에 참여하는 걸 어려워하고 혼자 있고 싶다고, 혼자 놀고 싶다고 얘기할 때가 많다.

이렇게 헷갈리는 상황에서, 진단을 받으면 좀 편해질 줄 알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고 모국어로 한 검사가 아니다보니 자폐스펙트럼 경향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어떤 부분은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검사가 진행이 어려웠음이 틀림은 없는 듯 싶다.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마음이 요동쳤고 괜찮다가 안 괜찮다 하면서 일주일을 보낸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걱정이 되었던 건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조금은 부담이 됐지만 치료 센터의 선생님들과 유치원 선생님들에게는 알려야 범수를 교육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진단받은 바로 다음 날 에르고테라피가 먼저 있어서 에르고테라피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자폐스펙트럼이 있지만 아주 경미해서 커서 직장을 얻고 그럴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의사가 말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아는 게 "나"한테 중요하냐고 되물었다... 그 말에 선뜻 대답을 못했고 뒤돌아 생각해보니 나는 남의 시선에 벗어나지 못한 한낱 중생에 불과한 느낌이 들었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나에 스트레스를 받아 독일로 온 것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멀었구나. 오히려 범수 덕분에 더 많이 배우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르고 테라피가 끝나고 유치원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유치원 선생님이 어떻게 볼지가 가장 무섭고 불안했다. 어쨌든 유치원은 범수가 매일매일 가서 생활하는 곳이니까. 내 이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영어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그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그 선생님은 이미 퇴근을 하셨단다. 자기한테 말하라고 괜찮다고 그러시길래... 결국 자폐 진단을 받았다고 그랬다니 선생님께서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서투른 영어로 범수는 괜찮다고, 범수는 잘 배우고 있다고, 범수는 다 배울 수 있다고 그러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안도의 눈물인지, 그냥 감동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범수반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참지 못하고 내 눈물샘은 터져버렸다. 선생님한테, 죄송하다고, 너무 걱정이 되었다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이제 진단이 있으니 도움을 받으면 되고 자기들도 확실한 방향을 갖고 교육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잘된 거라고 다시 말씀해 주었다. 안 그래도 지난 진료 보고서를 보고 선생님들도 자폐 스펙트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고 계셨다고 그러면서 훌쩍이는 나를 다독이며 별거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주셨다.

그 이후로도 친구들한테도 알리고 여기저기 내 상황을 업데이트하면서 동시에 나도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진단을 100%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저 범수를 제대로 교육하는 데 전문가의 도움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나는 오늘도 범수를, 또 범진이를 열심히 가르쳤다. 이런 날들이 쌓이고 쌓여서 범수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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