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고 40대즈음 다시 생각해 보는 죽음의 의미
오늘은 육아와는 다소 관련이 없는 얘기를 써 보려고 한다. 어머님의 죽음과, 곧 다가올 아버님의 죽음으로 마음이 다소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엄마라 이런 감정에 취해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써내려가는 이 글과 함께하는 동안만이라도 이 무거운 나의 감정과 기분을 정리해 나가보려고 한다. 이래서 아이를 키우면 글 쓸 일이 더 많은가 보다. 빠르게 내 감정을 정리하고 다시 빠르게 일상 무드로 돌아가야 하니까.
지난주에는 캠핑을 다녀왔다. 여름휴가로 우리는 캠니츠 근처 호수와 호숫가 모래가 아름다운 캠핑장에서 5박 6일을 머무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근처에 있는 집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가격의 집들은 상태가 그닥 좋지 않지만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집 두 개를 골라 부동산에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우리 가족은 지금 여러 가지 이슈들이 겹쳐 있다. 영주권,
집 구매, 범수 자폐진단, 범수 푸르포더룽(조기개입) 치료까지... 그와중에 시부모님의 건강 악화, 요양원 입소, 어머님의 죽음, 그리고 아버님도 곧 멀리 떠나실 듯하다. 우리 형편에 맞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예매했다. 어머님은 그렇게 보냈지만 아버님이라도 뵙고 오기 위해,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안부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그게 9월 24일 비행기인데,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아버님은 이제 말씀도 재대로 못하고 병원에서는 임종 면회 허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오늘 내일 하고 계신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으셔서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통으로 아버님의 모습을 보니 더 버티라고 말씀드리기도 너무 죄송하고 고단해 보이셔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라도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서 뵈면 좋겠지만 고민이 많은가 보다. 첫째로 아버님이 아들이 보고싶다 뭐 그런 얘기보다는 9월에 비행기 예약을 했다니까 '뭐하러 오냐'고 하신다. 그게 우릴 위한 배려인지, 진심인지, 멀리 사는 우리에게 서운하셔서 한 말씀인지, 아들인 남편도 잘 모르겠어서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4시간 붙어 있는 나도 그의 마음을 잘 모르겠고 그 자신도 모르는 듯 싶다. 그저 나는 나중에 후회 안 하겠냐는 물음과, 혼자라도 먼저 가려면 가도 된다는 말을 전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누구보다 내 책임 하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우선이라 이것이 최선이다.
한국에 계시는 남편의 누나들은 마음이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 되고 야위어 가는 아버님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얼마나 측은하고 마음이 아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도 설사 그게 비난이라 할지라도 모두 이해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유치원생일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꽤 어린 나이었는데도 그 충격적으로 야위어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 후에 죽을 듯이 울던 아빠의 모습도... 어릴 때 내가 처음 겪고 배운 '사람의 죽음'이었다. 그 뒤로 나는 죽음 그 근처에도 있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게 나에겐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다. 절대 무덤덤하거나 가볍지 않은 무겁디 무거워 지하동굴 맨 아래까지 떨어진 듯하게 춥고 축축하고 비통한 그런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남자애의 아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그의 입이 아닌, 그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우리반 친구의 가볍디 가벼운 입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 상당히 무덤덤하게 그저 가십거리일 뿐이라는 듯하게 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던 그 친구의 모습에 나는 실망감과 더불어 일종의 환멸감을 느꼈다. 장난 같은 그 말투에 진짜 짓궃은 장난이길 바라면서 그에게 연락해 정말 조심스럽게 확인했는데 그는 이제 너무 많이 울어서 괜찮아졌다고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지 예전 아빠의 모습에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저 모르길 바랐을 수도 있고, 아무 신경도 쓰고 싶지 않고, 그럴 수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내가 확인차 연락을 한 듯 싶었다. 아무 힘도 되어 줄 수 없어 무력감도 느꼈다. 이런 내 절망감은 말을 전한 그 친구에 대해 증오감과 혐오감으로 변했다. 내가 그 친구에 대한 태도를 바꾼 이후로 평소에 그 친구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반 친구들도 불편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급기야 그 친구는 반에서 왕따가 되었다. 반 아이들이 폭행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그 친구의 말과 행동을 비웃고 나중에는 35명인 반에서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그 친구를 짝없이 덩그러니 혼자 두기에 이르렀다. 지나고 생각하니 그 친구가 많이 괴로웠을 것 같다. 민망하고 학교에 오기 싫었을 것 같다. 다음 학년에 올라갔을 때 그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주동자가 된 것 같아 조금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싫어진 친구와 잘 지내는 방법도, 대화로 푸는 방법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한 사람을 혐오하기까지 했다. 죽음이라는 건 그토록 나에게 무겁고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30대 중반이었던 4년 전 나는 원가족과 절연을 하게 됐고, 엄마에게 자식 하나 죽었다 생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는 비수가 되어 내 마음에 꽂혔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남아 있을 것 같다. 왜냐면 나에게 죽음이란 세상의 끝을 넘어 존재하는 깊고 깊은 블랙홀 같은 거였으니까. 나를 안 보겠다는 것 이상으로 내 존재를 그 깊고 깊은 블랙홀에 보내버리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실제로 나는 한동안 블랙홀에 빠져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다.
이제 근 40살이 된 나는 멀리 살아 가깝게 지내진 못했지만 소소한 추억을 공유하던, 내게는 지금 가장 소중한 사람인 내 남편을 세상에 내어준 시부모님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무거운 것이었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내 일상보다 가벼워진 것에 그 누구보다 내가 놀랐다.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며 나는 더 많고 높은 차원의 과제를 떠안고 있는 것 같다. 그 과제가 죽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것이 진짜 삶의 무게인가 보다. 아이들에 대한 내 책임감이 곧 삶의 무게인가 보다. 그래, '사람은 다 병들고 죽어.'라고 별거 아니라고 그냥 삶에 충실한 게 더 중요하다고 나를 다독이게 된다. 삶의 무게를 깨달아가는 중년의 초입이라 그런지, 나에게도 언젠간 죽음이 올 거라는 체감이 더 들어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죽음의 무게로부터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저 한국에 당장 가지 않는 핑계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맞이하는 시부모님보다 그들이 세상에 남겨놓은 아들과 손주들의 삶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앞으로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해 안타깝고 송구스런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저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이 그들도 바라는 일이라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