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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Jul 07. 2021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2)

저 말고 손 예쁘다고 한 사람은 누구예요?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since128/104





"괜찮으세요? 안 다치셨어요?"

"네.... 전 괜찮아요.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저희는 괜찮습니다. 깨진 유리잔 치우는 동안 잠시 이쪽으로 앉아주시겠어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 다치셨으면 됐죠."


사장은 정말 괜찮다며 연신 우정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허나 사람 마음이 어찌 그렇게 가벼이 사라질까. 우정은 어쩔 줄 모른 채 구석에 서 있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지자 바 제일 구석 스탠드 의자에 살짝 엉덩일 걸쳤다. 잔해물을 치우는 게 생각보다 길어지고 어색한 시간이 덧대어졌다. 길어지는 시간에 우정이 아예 엉덩이를 걸치려고 오른쪽 발을 살짝 의자에 걸쳤는데 뭔가 이상했다. 구두 뒤꿈치에 껌이 붙은 듯한 찐득한 느낌이 났다. 설마 하고 돌아보니 오른쪽 구두 굽이 나가 있었다. 아까 넘어질 때 생각보다 대차게 넘어진 대가로 오른쪽 구두 굽이 희생되었다. 아아. 우정은 정말 울고 싶었다. 조용히 오른쪽 구두 굽을 꾹꾹 눌러보았지만, 두 걸음 이상 걸으면 구두 굽이 조금씩 덜렁거렸다. 집에 가는 길에 맥주를 살 게 아니라 굿을 해야 하나. 정신이 아득해진 우정이 신당과 편의점 사이를 고민할 때, 사장이 우정의 정신을 불러들였다.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혹시 유리 잔해가 남아있을까 봐 신경 써서 치우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네요."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일인데요. 정말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네. 없어요."


어색한 겉치레 인사와 웃음을 주고받으니 더 미적지근해진 분위기에 우정이 결단을 내렸다. 우정은 가방을 챙겨 들고 멋쩍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우정의 오른쪽 구두 굽은 절뚝거리길 반복했다.


"갑자기 비도 오더니,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유리잔값까지 같이 계산해주세요."

"아니에요. 바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서요. 모히또 값만 받겠습니다."

"값을 받지 않으시면 제가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오신다는 약속 지켜주시는 거로 대신 받겠습니다."


대화하는 도중 자연스럽게 결제를 마친 사장이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에는 모히또 한 잔 값만 결제된 내역이 찍혀있었다. 잔이 꽤 비싸 보였는데. 하지만 더는 말을 길게 해봤자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사장의 단호함에 우정이 한발 물러섰다. 게다가 우정은 오늘 이미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한 지 오래였다. 이번 주 내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재즈바를 찾는 것으로 대가를 치루기로 했다. 우정은 카드와 영수증을 가방에 넣으면서 다음에 동기 너뎃 명을 더 데려와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놀러 올게요."

"네. 우산 챙겨 가시고요. 안녕히.... 손님, 잠시만요."

"네?"

"구두 굽이 나간 것 같은데요. 걸으실 수 있겠어요?"

"네. 걸을 만 해요. 오늘 여러모로 일이 많네요."

"하하. 그러네요. 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니에요. 저는 정말 괜, 괜찮은데!"


우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장은 재빨리 바 너머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정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얼마나 더 폐를 끼쳐야 하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역대급으로 마가 낀 날이라는 것만 확실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휑하니 가버리면 다음에 사장 얼굴을 보기 무안할까 봐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정은 애꿎은 구두 굽을 탕탕 내리치며 집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구두와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 사장이 밝은 표정으로 쇼핑백 하나를 들고나왔다. 쇼핑백은 상단이 조금 구겨져 있을 뿐 여전히 제구실을 착실히 해내고 있었다.


"이거 전에 있던 직원이 놓고 간 건데 거의 새것처럼 보여서 언젠가 찾으러 오겠지 하고 뒀었거든요. 근데 반년이 지나도 다시 오질 않네요. 혹시 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발....은 240인데 그럼 제가 신고 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전 직원한테 전화해봤더니 그냥 버려달라고 하더라고요. 이미 멀리 이사 가버려서 다시 오기 힘들다면서요."

"아...."

"다행히 사이즈는 245네요. 조금 크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다가 발목 다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사장은 거절할 수 없는 밝은 미소를 띠며 쇼빙백을 흔들어 보였다. 쇼핑백 속에 있던 신발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검은색 캔버스화였다. 게다가 사장의 말처럼 새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때가 타지 않은 상태였다. 끈까지 고이 매어져 있는 형태가 꼭 우정을 얌전히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차분했다. 그래도 주인이 있는 신발이기에 고민하던 찰나, 사장이 말을 덧붙였다.


"그럼 이렇게 해요. 모두의 *평화(平和)를 위해 이 *평화(平靴)를 신는 거로."

"그래도...."

"아직 밖에 비가 많이 와요. 그러다가 이번엔 진짜 넘어지실지도 몰라요."

"그럼 잠시만 빌려 신겠습니다."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저쪽에 앉아서 신어보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장은 계산대 옆쪽 대기석으로 우정을 안내했다. 그는 우정에게 쇼핑백을 건네준 뒤,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다른 고객을 응대했다. 우정 텅 비어있는 대기석에 홀로 앉았다. 오늘 하루가 유독 길었다. 평화를 위한 평화라. 우정은 웃으며 전했던 작은 위로가 고마웠다. 그래 남은 저녁 시간은 평화롭길 바라야지.


구두를 벗은 우정이 쇼핑백을 열어보니 신발 말고도 부드러운 베이지색 수건이 신발 옆에 놓여 있었다. 종일 사람에 치여 도망치듯 바에 왔는데, 결국 위로해주는 것도 사람뿐이었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수건을 집어 들었다. 에어컨 바람에 거의 마른 발바닥이지만, 냉기가 서린 살갗을 조금 따뜻하게 문질러주었다. 양말 없이 운동화를 신으려니 조금 어색했지만, 임시방편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우정은 신발 바닥조차 때가 거의 묻지 않은 평화를 신고 가지런히 발을 모은 채 쳐다봤다. 심지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아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는데 사장이 매우 바빠 보였다. 우정이 신을 갈아신는 사이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바의 절반 이상을 매운 탓이었다. 수건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던 우정은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우정이 수건을 높이 들어 흔들었지만, 사장은 손을 흔들며 인사할 뿐 수건에 대한 코멘트 없이 다시 앞에 있는 고객과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 더 고민하던 우정은 발 닦은 수건이니 빨아서 돌려주는 게 나을 거라 결론 내렸다. 우정은 북적거리는 바를 조용히 빠져나와 다시 1층 양꼬치 가게로 내려왔다. 아까와는 달리 비가 오는 소리가 꽤 근사했다.



*평화(平和) :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
*평화(平靴) : 굽이 없이 바닥이 평평한 신.








평소와 같은 금요일이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조금 늦은 퇴근을 했지만, 우정은 비가 쏟아지던 이틀 전과 달리 수진과 같이 퇴근을 했다. 그리고는 양꼬치 가게가 아닌 바를 가자며 졸라댔다. 애걸복걸하는 우정의 오른팔에는 작은 쇼핑백이 걸려있었다.


"야. 웬 바야. 너나 나나 소주파인데."

"오늘 하루만 응? 내가 며칠 전에 신세 진 게 있어서 그래."

"뭘 신세 졌길래 선물까지 사? 운동화랑 수건? 근데 포장은 안 했어?"

"그때 빌린 거야. 내가 그날 어떻게 만신창이가 되었는지 말해줄게. 바에 가서."

"네가 사는 거지?"

"그럼 그럼. 내가 사. 갈 거지?"


조금 툴툴대던 수진은 우정이 산다는 말에 금세 태도를 바꿨다. 양꼬치 가게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것 같던 수진의 발걸음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우정은 수진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탄 두 사람은 10층으로 직행했다.


다시 온 바는 여전히 여유가 흘러넘쳤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창가는 오묘한 주황색으로 물들었고, 재즈 음악 사이로 노을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이틀 전 우정과 달리 제일 안쪽 창가 자리를 선택한 수진은 꼭 본인이 사는 것 마냥 술과 안주를 착착 시켰다. 여기에 혼자 오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는 나았기에, 우정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시키는 수진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틀 전 비가 왕창 쏟아지던 날의 고생을 수진에게 늘어놓는 동안, 시켰던 술과 안주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우정은 수진과 적당히 대화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미니바에 고정한 채 사장이 모습을 드러내는지 주시했다. 오늘은 조금 늦네? 아예 안 나오는 거 아니야? 점점 초조해지던 우정은 참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나온 안주를 가져다준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여기 사장님은 언제 나오시나요?"

"사장님 나오실 때가 되긴 했는데.... 아직 안 나오셨네요. 곧 오실 거예요. 무슨 일이실까요?"

"저번에 빌려 간 물건이 있어서 돌려드리려고요."

"제게 주시면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안주를 두고 쇼핑백을 가져갔다. 수진은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가 직원이 멀어지자 우정에게 바싹 붙어 눈을 흘겼다.


"너. 사장 보려고 나한테 여기 오자고 한 거지?"

"아니야. 빌린 거 전해주려고 한 거라니까? 그때 신세를 많이 져서 미안한 것도 있고."

"진짜지? 다른 건 없었어?"

"진짜라니까. 없어. 이제 물건 돌려줬으니까 됐어."


우정이 정말 관심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칵테일을 들이켰다. 그리곤 잔을 내려놓으며 수진과 애인이 이번 휴가 때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물어봤다. 수진은 대답하다가도 김이 샌 듯 소파에 푹 기댔다.


"흠. 아쉽다. 여기 칵테일이 꽤 맛있어서 1:1 클래스 좀 들어보려고 했더니."

"듣고 싶으면 듣는 거지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네가 사장이랑 친하거나 안다고 하면 올 때도 편하잖아."

"그런가?"

"아니면 네가 같이 듣던가."

"나 이런 거 관심 없는 거 알면서 괜히 그런다. 애인이랑 같이 들어. 난 집이 좋아."

"어휴. 저 집순이."


수진은 감바스를 쿡 집어다 입에 쏙 넣었다. 둘의 이야깃거리는 다시 휴가 때 놀러 갈 휴양지로 돌아왔다. 휴가철에는 편하게 쉴 수 있는 발리가 좋다는 우정과 이왕 즐기는 거 신나게 스페인에서 보내겠다는 수진은 여러모로 관심사가 판이했다. 그래서인지 서로가 신기해서 수많은 동기 중 유독 둘이 잘 붙어 다녔는지도 모른다. 속 터지는 회사생활에 서로가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 주어서 다행이었다.








어느새 둘은 1:1 클래스는 잊은 채 회사 얘기, 휴가 얘기 등 공통적인 주제를 안주 삼아 추가 칵테일을 계속 주문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는 사이 보름달이 환하게 재즈바를 비췄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한 수진은 소파에 늘어진 채 발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달큰한 술은 술이 아니라더니. 수진은 이미 거하게 취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정은 취한 수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볼을 만져보았다. 볼이 뜨끈한 걸 보니 자신도 조금 취한 게 분명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네. 우정은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 일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여전히 미니바에는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안 나오나 보네. 수진이 1:1 클래스에 관심을 보이기에 어떻게 진행하는지나 신청할 수 있는 날짜 등을 물어보려고 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정은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클래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조금 이상했다.


"클래스요..? 저희 바에서 칵테일 클래스를 듣고 싶으시다고요?"

"저는 아니고 제 친구가 듣고 싶어 하긴 하는데.... 혹시 클래스 안 여시나요?"

"네에.... 저희는 아직 진행하고 있는 게 없어서요."

"아.... 그렇군요. 저번에 여기 사장님이 명함 주시면서 1:1 클래스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다른 곳이랑 착각했나 봐요."

"사장님이요?"


직원은 일관되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결같은 대답에 우정은 제가 그날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분명 들었었는데? 정말 내가 잘못 들었나? 우정은 어색한 인사를 한 채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직원이 혹시 모르니 사장에게 물어보고 오겠다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요. 저기. 그럴 필요는 없는데. 우정은 아직 사장을 혼자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엊그제의 추태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모른 채 도망치기엔 술에 취한 상태라 행동이 빠르지 못했다. 술에 취한 발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번에는 직원 대신 사장이 조금 급하게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우정을 발견한 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정은 자기도 모르게 똑같이 웃어 보였다. 카운터보다는 미니바 앞에서 클래스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사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구두 안 신으셨네요? 그날 잘 들어가셨어요?"

"네. 덕분에 잘 들어갔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천만에요. 근데 저희 직원한테 1:1 클래스 얘기하셨다고 해서...."

"네. 친구가 애인이 칵테일을 좋아하는데 같이 클래스를 듣고 싶다고 해서요."

"아.... 친구분이요."

"네. 혹시 두 명이 같이 듣는 건 안 되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음."


사장은 조금 망설이는 듯 말을 길게 끌었다. 옆에 있던 직원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장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다. 머리를 조금 긁적이던 사장은 옆에서 서성대던 직원을 손짓으로 물렸다. 그리고는 우정에게 조금 더 다가와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사실 클래스를 한시적으로 잠깐 해보려고 했거든요. 나중에 진짜 열게 될 때를 대비해서 테스트도 해 볼 겸.... 반응도 들어 볼 겸."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주 토요일에 칵테일 클래스 들어보실래요?"

"네? 저요?"

"네. 아, 그때는 친구분 빼고. 혼자요."


우정은 당황스러웠다. 이전에 이런 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겪는 상황이라 확신이 서질 않았다. 과하게 친절한듯한 수요일의 일들도 다 선의의 친절이 맞았을까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우정은 이제 연애가 귀찮다며 손을 놓은 지 좀 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게...."

"네. 맞아요."

"맞다고요."
"네."

"진짜?"

"네. 맞아요. 수작 부리는 거."


사장은 생각보다 직설적이었다. 본인의 행실을 수작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우정은 사장 쪽으로 기대었던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눈을 깜박이며 잠시 고민하던 우정은 입 모양으로 다시 진짜? 묻자 사장도 웃으며 진짜. 라고 대답했다. 진짜라는 거네.


우정은 본인에게 저 사람이 싫은가 자문했다. 딱히 싫진 않지만 좋지도 않지라는 자답이 튀어나왔다. 아직은 손님한테 친절한 사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계선에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우정은 이 상황 하나하나가 어색한데 저 남자는 물 흐르듯 익숙해 보이는 게 괜히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저도 이런 게 오랜만이라 두서가 없었네요."

"아하하...."

"제일 중요한 걸 안 여쭤봤네요. 반지가 없어서 넘겨짚었거든요. 혹시 애인은 있으실까요?"

"네.... 아뇨. 없긴 한데 당황스럽긴 하네요."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사장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에 반해 우정은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사람을 많이 만나봐서 저렇게 계속 웃을 수 있는 건가? 입가마저 뻣뻣하게 굳은 우정은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 온 힘을 다해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서려는 순간, 설마 하는 마음에 우정은 사장에게 한 가지 더 물어봤다.


"근데 저번에 빌려주셨던 운동화는 진짜 전 직원이 신던 운동화가 맞는 거죠?"

"네. 그것도 진짜예요."

"그렇죠?"

"그럼요. 저도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네."

"저 말고 손 예쁘다고 한 사람은 누구예요?"


아. 지는 듯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미 잘못 걸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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