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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y 02. 2020

예그리나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128.2 MHz



 시린 바람이 언제 불었냐는 듯, 베란다 창문 사이로 따뜻하다 못해 조금은 더운 바람이 불었다. 엊그제 바람이 많이 불던 날씨만 생각하며 얇은 긴소매 티를 입었던 성호는 어느새 흰 반소매 티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성호의 옆에서 그릇 정리를 하던 은주도 색이 약간 바랜 회색 반팔티를 펄럭이며 굳은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하필 대청소하는 날에 날씨가 덥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호는 지쳐 보이는 은주를 위해 미리 얼음물을 담아 둔 텀블러를 건넸다. 은주가 물을 마시며 시원한데 이도 시리다는 얘기하자 성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전했다.


 성호는 봄맞이 대청소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거실을 크게 둘러보았다. 온 집안을 뒤집기 시작한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대청소가 끝날 기미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저 멀리에 있는 은성은 제 방에 있는 짐을 정리하기에도 벅차 아직도 방 한구석에서 끙끙대며 온갖 먼지와 잡동사니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조그마한 녀석이 크면서 뭘 이렇게 많은 물건을 쟁여뒀는지, 거실과 안방에서 나오는 물건보다 은성의 방에서 나오는 물건이 훨씬 다채로워 보였다.


 성호가 기웃거리며 은성에게 다가가 아직 다 쓰지도 않은 펜을 왜 버리느냐 묻자, 필기감이 생각보다 엄청 구리다는 잔인한 평가가 쏟아졌다. 성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이면지에 펜을 몇 번 끄적여 보고는 다시 제 책상 펜꽂이에 꽂아 두었다. 은주가 자꾸 아나바다 하지 말라며 타박했지만, 성호는 못 들은 척 은성의 방에서 가득 채워져 나온 10L 종량제 봉투를 꼭꼭 묶기만 했다.




“엄마. 아나바다가 뭐야?”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말의 줄임말이야.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는 운동이 한참 이어질 때가 있었어. 아마 IMF 때였지. 은성 아빠?”


“IMF? 그거 나 태어났을 때 아니에요? 그때 아빠 사업 망했고.”


“으응…. 우리 막둥이. 짚어줘서 고맙다.”


“뭐 어때. 다시 건물 짓잖아요. 사업하다 보면 그러기도 한데요.”




 성호는 아직도 IMF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치를 떨었다. 1980년대, 갓 성인이 된 성호가 서울에 상경했을 때에는 건설업이 매우 성행했었다. 논밭이나 공터, 옹기종기 모여있던 단독주택을 싹 밀어버리고 드높은 아파트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건설업계는 항상 일손이 부족했고, 그 일손 중 하나로 성호가 건실한 대기업에 막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성호의 막내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눈칫밥으로 업계에 눌러앉아 이것저것 어깨너머 배우면서 버텼던 단 하나의 이유, 제 이름을 단 건설사 하나를 차리겠다는 꿈으로 이를 악물었던 나날이 셀 수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마침내 성호는 1995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은 건설사를 차렸다. 80년대에 비해 조금씩 휘청이는 건설사가 몇몇 보이긴 했지만, 성호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잘 해낼 자신감으로 그득한 상태였다.


 실제로 1997년 그날이 오기 전까지 자그마한 건설사는 점차 몸집을 키웠고, 원래 일해오던 대기업의 하청 문의까지 받기 시작한 이후에는 바람에 올라탄 듯 회사가 날개를 달고 더 높이 날아올랐다. 성호가 실내 인테리어를 하던 은주와 결혼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흰 웨딩카에 팔랑팔랑 흔들리는 분홍색 풍선과 같이, 둘은 앞으로 제 가정의 미래는 한없이 밝고 고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997년 11월 21일. 현실감 하나 없이 대한민국의 IMF 외환위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건설사 사무실 전등이 무더기로 꺼지기 시작했다. 뉴스를 켤 때마다 TV에서 나오는 소식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기업이 부도가 났다. 그뿐만 아니라 소규모 사업장이나 자영업자는 물론이요, 뒤이어 촉망받던 중소기업까지 뉴스에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한 채로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성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건설사 부도 후 파산 신청을 낸 날. 첫째 주호는 이제 한창 크는 여덟 살이었고, 둘째 은성은 이제 막 백일을 넘긴 상태였다. 저 핏덩이들을 살리려면 성호와 은주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굳어가는 경제만큼 둘의 손에도 굳은살이 늘어갔다. 밤일이고 새벽일이고 가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네 가족이 부둥켜안고 한 치 앞이 낭떠러지인지 아닌지 구별도 되지 않는 어둠을 지나왔다. 그리고 막내 은성이가 주호만큼 컸을 2004년 말 즈음에서야 성호는 다시 제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성호는 은성의 방에서 나온 빵빵한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옛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추억에서 빠져나와 부리나케 발걸음을 놀렸다. 현관 한구석에 놓인 쓰레기봉투들 사이에 묵직한 쓰레기봉투 하나를 하나 더 얹었다. 손을 가뿐하게 비운 성호는 종종걸음으로 안방 옷장 위에 놓인 박스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은주와 은성은 옷장 위 묵은 박스들도 버리려나 보다 싶어 다시 고개를 숙여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십여 분쯤 뒤, 정리하는 줄 알았던 성호가 갑자기 소리를 치며 안방에서 튀어나왔다.




“여보! 찾았다. 이거 기억나?”


“다시 조용하길래 정리하는 줄 알았더니 뭐 찾느라 조용했던 거야? 뭔데?”


“이거. 우리 다시 사업 시작하고 나서 예그리나 20주년으로 옛날 DJ 특집 했을 때 녹음한 테이프.”


“어머. 그게 아직 남아있었어? 이게 언제 적이야. 참…. 감회가 새롭네.”




 성호가 들고나온 작은 카세트테이프에는 ‘예그리나 20주년 특집’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때가 살짝 묻어난 테이프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상자 속에서 묵묵히 오늘을 기다린 듯했다. 은주는 테이프를 앞, 뒤로 한 번씩 뒤집어 보더니, 말없이 옆에 있던 물티슈를 뽑아 겉면의 먼지를 깨끗이 닦아주기 시작했다. 먼지가 겉 힐 수록 ‘예그리나 20주년 특집’이라는 글자가 선명해짐과 동시에, 은주와 성호의 추억도 더욱 선명해졌다.


 은주가 어렸을 때부터 즐겨 듣던 ‘예그리나’는 1984년부터 시작해 2008년에 막을 내린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이미 인터넷이 많이 보급된 밀레니엄 시대에 굳이 카세트테이프를 이용해 라디오 녹음을 하게 된 건, 2004년 12월에 20주년을 맞은 예그리나가 특별한 진행을 시도했던 게 발단이었다. 20주년 기념으로 이때까지 예그리나를 진행했던 추억의 DJ들과 함께 진행하는 특집을 가졌었는데, 그때 은주가 제일 좋아하던 DJ도 같이 특별진행을 맡은 기념으로 옛 감성을 담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더랬다. 




“엄마. 이 카세트테이프가 뭔데요?”


“엄마가 좋아했던 DJ가 예그리나 20주년을 맞아 다시 특별방송을 맡아서 녹음했었거든. 2004년 말에 엄마, 아빠 다시 사업 시작하면서 힘든 점이 많았었는데, 이 방송에서 마침 엄마, 아빠한테 위로가 되는 말을 정확하게 해줘서 많이 울었었어.”


“예나 지금이나 라디오는 복작복작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 게다가 들으면 들을수록 온정이 느껴져서 더 좋은 거 같아. 그렇지 여보?”


“그럼. 아무리 시대가 발전해도 라디오 특유의 감성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걸. 어렸을 때부터 줄곧 라디오를 들어온 내가 장담해.”




 어느새 묵직한 옛 카세트까지 가져온 성호가 두 모녀의 말에 대답하며 은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성호는 조심스레 여러 버튼을 눌러보며 카세트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지 확인했다. 테이프 재생에 필요한 기능들이 모두 잘 돌아감을 확인한 성호는 오픈 버튼을 눌러 카세트의 입을 벌렸다. 조금은 버겁게 입을 쩍 벌린 카세트 사이에 딱 들어맞는 테이프를 넣어주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나며 입을 닫은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녹음했을 당시보다는 조금 음질이 흐려진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잡음이 조금 섞여 들리긴 했지만, 녹음했던 당시의 말은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15년 전 라디오가 조용했던 집안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성호는 원하는 부분을 듣기 위해 다시 테이프 재생을 멈추고 앞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거 너희 오빠도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걸.”


“왜요?”


“그냥. 엄마, 아빠는 이거 듣고 힘냈으니까 우리 아들, 딸도 이거 듣고 힘 났으면 싶어서. 엄마, 아빠 다시 사업 시작하고 힘들 때마다 이 테이프를 얼마나 많이 들었나 몰라.”




 제 아빠를 따라 건설업에 뛰어든 주호는 안타깝게도 현재 해외 출장 중이었다. 주호는 요즘 한창 바쁠 시기여서인지 베트남에서도 가끔 하던 영상통화가 요즘 들어 뜸해진 상태이기도 했다. 집중해서 테이프를 돌리던 성호도 애 바쁜데 괜히 전화하지 말라며 손짓을 했다. 뒤이어 나중에 주호가 돌아오는 날 모두 같이 다시 들어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몇 번을 테이프와 눈치 싸움하던 성호가 원하는 시작점을 찾았다. 성호가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르며 씨익 웃었다.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끝에는 힘들었던 저와 아내에게 보내는 슬픔도 묻어있었다.




 오랜만에 라디오 진행을 다시 맡으려니 떨리는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다시 돌아왔는데요. 이렇게 많은 분이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보내주시는 문자 하나하나 다 받아 적어가고 싶을 정도로 감사한 말이 너무 많아요. 정말 문자만 보고도 배불리 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기쁩니다. 20주년을 맞은 예그리나!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이렇게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신 청취자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에서 오늘 주시는 문자 중에 제일 많은 문자가 ‘임디!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요?”랑 “임디의 달달한 목소리 라디오나 음반으로 다시 듣고 싶어요!”라고 하네요. 저 잘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현재 방송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드문드문 음악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사실, 그 사이에 혼자 심적으로 힘든 일이 꽤 있었어요. 많은 분께서 기사로 접하셨던 것처럼 소속사 계약에 관한 문제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같이 얽혀서 본의 아니게 방송을 오래 쉬게 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사람이 좀…. 무섭더라고요.  나는 점점 힘든데 사회는 아무런 없이 멀쩡히 돌아가니 저만 뒤처지는 느낌에 스스로 자괴감도 들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 보니 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좋은 사람들과 만나 얘기도 하고, 밥도 먹고, 작사도 하면서 지내고…. 돌아보니 결국 또 처음 시작했던 음악으로 되돌아오게 되더라고요.


 요즘 다시 작사, 작곡을 하면서 제일 많이 느끼는 생각은 ‘다행히 나에게는 돌아올 곳이 있구나.’였어요. 음악 작업에 몰두하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예요. 아직도 제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더라고요. 게다가 한동안 쭉 쉬다가 오랜만에 작업하다 보니 초창기 신인 시절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다시 여러분을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 두근대는 거예요.


 물론 예전만큼 많은 분과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냥 저를 찾아주는 한 두 분만 계셔도 전 계속 음악을 할 것 같아요. 한 명이라도 누군가가 저를 혹은 제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굉장히 설레는 일이더라고요. 오늘 생각보다 많은 분이 기다렸다고 말씀해주셔서 엉덩이가 방방 뜰 지경입니다. 하하하.


 저는 오늘 특별 DJ 이후로 조금 더! 준비한 다음에 내년 초 즈음에 다시 다른 모습으로 인사를 드릴 것 같아요. 그때는 DJ가 아닌 게스트로 다시 예그리나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곡 띄워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추천해 드리는 이 곡은 제가 최근 힘들 때마다 많이 듣는 노래인데요. 혹시 저처럼 또다시 재출발, 새 시작을 하시는 분들! 우리 다 같이 힘내자는 의미에서 이 곡을 들려 드립니다. 


전인권 선배님의 걱정 말아요, 그대.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힘든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예그리나 : '사랑하는 우리 사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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