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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Feb 14. 2020

엿 먹은 발렌타인데이

발렌타인데이에 엿 먹어 본 사람?

 


 찬바람이 그리 세지 않은 겨울, 오피스 타운 사이에 위치한 카페 구석에서는 30분 전부터 노트북 타자 소리가 작게 이어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디카페인 커피 한 잔과 슬림한 노트북, 몇 가지 서류가 차례대로 놓여 있다. 수정은 가끔 모니터를 심각하게 빤히 바라보다가 서류를 살펴보길 반복했다. 한참 집중해서 일 마무리를 하던 중, 찬바람이 조금 묻은 지훈이 수정 앞 푹신한 카페 의자에 앉았다.




"미안 미안. 생각보다 늦었네. 일이 자꾸 안 끝나서."


"괜찮아. 늦는다고 미리 말해줘서 처리 못 한 일 해결하고 있었어."


"팀장님. 좀 쉬엄쉬엄하세요.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안 돼."


"알았어. 이것만 하고."


"커피 마시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벌써 한 잔 다 마신 거야?"


"어.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카페인 없이 플라시보 효과를 누리고 중이야."




 수정은 지훈의 말에 간간이 대답하며 열린 파일을 차근차근 닫았다. 마지막으로 모든 파일을 저장한 후 노트북을 종료하고는 조금 남은 커피를 남김없이 마셨다. 그리고는 익살스럽게 씨익 웃으며 지훈에게 손바닥보다 조금 큰 선물꾸러미를 건넸다.




"오늘 발렌타인데이래! 자. 선물이야."


"바쁘신 팀장님이 언제 이런 걸 다 사 오셨대."


"이 정도 정신은 있거든."


"고마워. 포장까지 한 거야?"


"응. 나름 서프라이즈거든. 풀어 봐."




 지훈은 서프라이즈란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제가 아는 수정은 무던한 성격상 서프라이즈를 하지도 받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서프라이즈를 꺼내니 조금은 불길한 느낌이 몰려왔다. 지훈이 리본을 스륵 풀어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이내 큰소리로 웃으며 포장 속 내용물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오랜만이다. 이거 어디서 났어?"


"찾기 힘들었어.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 나?"


"그럼 기억하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잊어."




 여러 개의 비닐봉지가 손안에서 부스럭거렸다. 지훈은 투박한 비닐 포장을 보며 수정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지훈이 수정을 처음 만난 날은 5년 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추운 겨울날이었다. 수정의 남동생인 수찬과 같이 한창 취업 준비를 할 때였고, 둘 다 발렌타인데이에 최종면접이 잡힌 상태였다. 수찬과 지훈은 각자 다른 분야에 지원했기 때문에 서로의 면접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회사에 들어가 대학 동기가 아닌 회사 동기로 생활하는 모습을 꿈꾸었다.


 면접 스터디를 마치고 거리로 나오니 주변이 온통 초콜릿 판이었다. 형형색색 포장 옷을 입은 초콜릿들이 어서 날 사가라며 아우성을 쳤다. 지훈과 수찬은 애써 초콜릿을 외면한 채 걸었다. 골목길 끝에 대로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앞 행사 초콜릿이 가득한 편의점 옆을 지나가며 수찬이 중얼거렸다.




"애인 없어서 안 그래도 우울한데 면접이 왜 하필 2월 14일일까."


"그러게.... 2월 14일이 토요일인 게 잘못이다.... 발렌타인데이인 게 잘못인가?"


"아니. 둘 다 여자 친구가 없는 게 잘못이지."


"야. 그게 왜 잘못이야. 안 만나는 거거든."


"그래 지훈아. 울지 말고 얘기해 봐."




 수찬은 소위 말하는 인싸 스타일이었다. 항상 재치있는 말투에 어디든 잘 어울렸고 스스럼없이 사람을 만났다. 그에 반해 지훈은 인싸와 아싸 그 어딘가 어중간한 스타일이었다. 지훈은 스스로가 아싸인 게 좋다고 말할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했다. 성격이 다른 둘이지만 대학 4년 내내 붙어 다녔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기해하면서도 퍽 잘 어울렸다.




"오늘도 수고 많았다. 내일 늦지 말고."


"어. 지훈이 너도 잘 들어가고. 늦지 말고."


"응. 아 그리고 이거, "




빵빵! 지훈이 수찬에게 빌렸던 보조배터리를 다시 주려던 찰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차도에서 큰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찬과 지훈의 고개가 퍼뜩 차를 향했다. 차에 탄 여자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둘을 바라보았다.




"이수찬!"


"어. 누나!"


"너네 누나야?"


"어. 누나가 여기 웬일이지?"




지훈과 수찬은 보조배터리를 주고받으며 쫄래쫄래 차 쪽으로 향했다.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취업 준비생임에도, 친구의 누나 앞에서는 둘 다 영락없는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지훈이 남매 사이에 껴 얘기를 들어보니 수정은 내일 최종면접이라는 수찬을 위해 퇴근 후 친히 픽업하러 온 멋진 누나였다. 하지만 지훈이 수정을 더 멋있게 본 이유는 내일 면접을 볼 회사에 이미 재직하고 있는 회사원이라는 사실이 더 컸다.




"야. 누나가 여길 다니고 있으면 말을 해야지. 왜 얘기 안 했어."


"우리 지원 분야랑 완전 달라서 도움이 안 될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럼 지금 물어봐."


"이제 집에 가야 하고 내일 면접인데 이제야?"




 수찬과 지훈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옥신각신 얘기를 주고받았다. 둘을 빤히 보던 수정은 유치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시계를 흘끔 보니 어느덧 오후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수정은 이왕 온 김에 친구도 집에 데려다주는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수찬이랑 같이 스터디하는 친구니?"


"네.... 안녕하세요. 한지훈이라고 합니다."


"그래. 안녕. 너는 집이 어디야? 가는 길이면 데려다줄게."




 낯을 조금 가리는 지훈은 맨 처음 한사코 괜찮다고 거부했다. 하지만 이내 넉살 좋은 남매에 말재간에 휘둘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어느새 차 뒷좌석에 타서 따뜻한 히터 바람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수정은 신호대기 중에 백미러로 뒷좌석을 쳐다봤다. 큰 마시멜로 하나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한국인 특유의 끼니 걱정이 들었다.




"저녁 시간 지났는데 둘 다 밥은 먹었니?"


"아니. 안 먹었어. 누나. 집에 뭐 먹을 거 있나?"


"없어. 그러니까 가는 길에 밥 좀 먹자. 수찬이 친구는 밥 먹고 들어갈 시간 돼?"




 남매의 말은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예상할 수 없는 방향성에 어버버 거리던 지훈은 20분 뒤 둘과 같이 고깃집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양념 돼지갈비가 세팅되어 나오자 수정은 자연스럽게 수찬에게 집게를 넘겼다. 그리고 수찬은 익숙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수찬이 친구. 어.... 미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한지훈입니다."


"응. 지훈아. 회사 면접에서 궁금한 게 있어? 밥 먹으면서 편하게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지훈의 말끝에 낯가림과 부끄러움이 조금 묻었다. 수정은 수찬은 그 와중에도 옥신각신하며 친남매 인증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이가 좀 더 먹은 수정은 지훈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한두 마디씩 더 던질 뿐이었다.




"누나. 웬일로 고기를 사줘?"


"이번에는 붙으라고. 맨날 면접 떨어진 다음 날 술 퍼마시지 말고."


"나만 퍼마셨나. 쟤도 같이 퍼마셨어."


"자랑이다. 탄다. 얼른 뒤집어."


"넵."




 지훈은 오늘 처음 보는 수정보다 수찬의 모습이 더 낯설었다. 평소에는 어느 무리에서건 앞장서서 일을 진행하는 모습에 막내라는 느낌을 전혀 못 느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영락없는 집안 막내였다. 수찬은 돼지보다는 소가 먹고 싶다는 괜한 투정을 부리면서도 수정의 말이라면 칼같이 반응했다. 외동으로 자라온 지훈은 장난기 많은 남매의 티키타카가 재미있기 그지없었다.




"사회초년생에게는 돼지 먹이기도 벅차다. 다음에 너 취직하면 소 사줄게."


"진짜? 진짜지? 누나 약속했다."


"알았어. 거의 다 익었다. 얼른 먹어. 친구도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셋은 사이좋게 고기를 나눠 먹으면서 드문드문 면접 팁을 주고받았다. 수정은 자신의 회사 면접 팁뿐만 아니라 이전에 면접을 본 후 붙었던 기업에 대한 팁도 같이 얘기해 주었다. 두 취업준비생은 고기와 꿈을 같이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회색 재 사이사이에 발갛게 남은 숯이 빛을 발했다. 한참 분주하던 불판 위는 어느새 차게 식어있었다. 한참 잘 먹는 장정 둘은 고기를 먹은 후 된장찌개와 냉면을 사이좋게 비워냈다. 식사가 나올 즈음 수정이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된 지훈은 야무지게 냉면과 고기를 싸 먹는 수찬에게 물었다.




"야. 너네 누나 너무 안 오시는데?"


"그래? 몰라. 변비인가."


"....... 응. 많이 먹어라."




 지훈은 남동생에게 친누나 걱정을 물은 제 판단을 탓했다. 고개를 들어 식당 전체를 둘러보았다. 식당 외부에 있는 화장실을 간 수정이 언제쯤 들어올까 빤히 식당 정문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이따금 제 걱정은 모른 채 냉면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을 기세인 수찬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수찬이 냉면을 다 먹고 난 후에도 수정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수찬마저 걱정할 즈음, 수정이 팔짱을 끼고 웅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수정이 걸을 때마다 꽉 여민 팔짱 사이로 검은 봉투 두 개가 달랑거렸다.




"누나! 어디 갔다 왔어. 우리 버리고 간 줄 알고 놀랐잖아."


"그럴 걸 그랬나. 야. 이거나 받아."


"이게 뭐야?"


"선물."




 수정은 식당 물컵 넘기듯 자연스레 둘에게 검은 봉투를 하나씩 안겨주었다. 얇은 봉투 사이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도시락 용기에 담긴 기다란 막대기들이 나란히 줄지어 누워 있었다. 수찬과 지훈이 어둑한 봉투 속에서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 뭐야. 이거 엿이야?"


"응. 엿이야. 내일 면접 잘 보라고."


"누나아....... 내일 발렌타인데이인데 초콜릿을 사주지 왜 엿이야?"


"왜 나한테 초콜릿을 바래. 엿이나 잘 먹으세요. 동생아."




 지훈은 그제야 식당 밖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렸다. 투명한 식당 창 너머로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엿장수들이 신명 나게 춤을 추며 엿을 팔고 있었다.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엿이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웃으며 엿을 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응. 그래. 이것 봐. 친구는 착하게 잘 먹겠다는데 너는 왜 그래?"


"누나아.... 이거 말고 초콜릿."


"애잔하다 애잔해. 초콜릿 상업화에 놀아나지 말지어다."




 지훈은 연신 초콜릿을 외치는 수찬과 연신 엿이나 먹으라는 수정을 보며 웃었다. 즐거운 남매 때문에 왠지 면접을 잘 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식당을 나와 주차장을 향해 거리를 걷자, 남매는 코디미가 따로 없다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지훈은 그 뒤를 따라 온통 초콜릿으로 도배된 거리에서 엿 상자를 들고 기분 좋게 걸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 뒤, 지훈은 수정의 회사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진짜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웃겨. 발렌타인데이에 엿이나 먹으라니."


"면접 보니까 생각나서 친히 엿까지 사다 줬는데 무슨 초콜릿 타령을...."


"난 그때 덕분에 잘 먹었어. 고기도 사주는 멋진 누나였지."


"그러엄. 내 말 잘 듣고 엿 먹은 너는 붙고 수찬이는 떨어졌잖아."




 지훈이 옛날 생각에 넌지시 수정을 치켜세웠다. 수정은 거부하지 않고 콧대를 하늘 높이 세웠다.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니 수정의 말투 패턴을 알아챈 지훈이 실실 웃으며 더 높이 비행기를 태워 주었다.




"처남이 자기 말을 잘 안 듣더라고."


"그러니까. 내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엿이 생기는데."


"오랜만이긴 하다. 엿 어디서 샀어? 요즘도 팔아?"


"요즘은 별로 없더라고. 그래서 한참 찾았다니까?




 5년 전에도 거리에서 엿 파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없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희귀할 정도로 엿 파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수정이 구한 엿은 사탕처럼 생긴 호박엿이었다. 옛날 작은 구멍가게에서 팔 법한 모양새였다. 수정은 포장지 사이로 보이는 호박엿을 냉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다행히 세계 과자 파는 곳에 옛날 과자도 팔더라고. 발렌타인데이 다가와서 우리 처음 만난 날 생각이 났는데, 한 번 생각하니까 이게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지."


"그랬어?"


"응. 음.... 원한 건 이 맛이 아니긴 한데 이게 어디야."


"자기가 먹고 싶었던 거야? 사랑이가 먹고 싶었던 거야?"


"음....... 사랑이인 거 같아. 그리고 사랑이가 지금은 떡볶이도 먹고 싶대."


"그래. 내 새끼가 먹고 싶다는데 먹어야지. 가자. 우리 마누라랑 내 새끼 떡볶이 먹으러."




 수정이 빈 머그잔을 들고 일어서자 자연스럽게 지훈이 수정의 짐을 챙기고 앉았던 자리를 정리했다. 이제 배가 조금 나오기 시작한 수정은 한 번 더 옷을 잘 여몄다. 이윽고 나란한 두 쌍의 발걸음이 카페를 나섰다. 오늘도 서로 낀 팔짱 사이에 엿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가 달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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