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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r 14. 2020

특별하고도 달콤한 화이트데이

화이트데이에 마카롱 가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모두가 잠들었을 새벽, 아기자기한 마카롱 가게 블라인드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유유히 흘러나왔다. 밤공기마저 잠이 든 듯 한산한 도로와 달리 단내가 진동하는 마카롱 가게 안에서는 민아가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 그 옆에서는 한수와 진범이가 열심히 머랭 쿠키를 포장하고 있었다.


 민아가 필링 주머니를 잠시 내려놓고 아르바이트생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꼼꼼하게 가린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둘의 눈가는 노랗게 뜨다 못해 검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픈 저 또한 비슷할 게 뻔했지만 앓는 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사장인 저는 매년 드문드문 겪는 물량 폭탄을 3년째 버티고 있는 사람이었고, 아르바이트생 둘은 일한 지 한 달도 안 된 초짜에 처음 맞는 화이트데이였으니 넋이 나갈 법도 했다. 민아는 필링을 얹은 마카롱 위에 꼬끄를 덮어주며 넌지시 힘을 보탰다.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 주라. 머랭 쿠키 포장하고 이제 마카롱 예약주문만 박스에 담으면 거의 다 끝나.”


“네에….”


“…….”




 진범은 말할 기운도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영혼 없는 눈으로 포장기계처럼 손을 움직였다. 큼지막한 손 네 개가 앙증맞고 알록달록한 머랭 쿠키를 포장 봉투 속에 쏙쏙 집어넣었다. 이틀 전, 어마어마한 물량을 확인한 둘은 밤샘 작업에도 끄떡없다며 에너지음료와 고칼로리 저녁을 잔뜩 먹고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패기가 넘쳤던 둘은 하루 반나절 만에 이미 연료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 갓 이십 대 중반을 넘긴 진범과 한수는 왜 딱 한 번 있는 대목 때문에 유독 이번 달 월급을 많이 주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디저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민아 밑으로 들어온 진범과 한수는 다른 가게보다 간식이나 월급을 더 챙겨주는 민아가 참으로 고마웠지만, 지금은 더 얹어주는 월급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둘에게 필요한 건 화이트데이 없는 날 혹은 제 방 침대였다. 


 얼그레이 마카롱에 꼬끄를 모두 얹은 민아는 힘을 낼 겸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직도 필링을 넣고 선인장 꼬끄로 덮어줘야 할 마카롱 종류가 그득했다. 어느새 어두컴컴했던 밖이 서서히 푸른 수채화로 물들기 시작했다. 가게 블라인드 사이로 새벽이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숨을 짧고 굵게 내뱉은 민아가 다크초콜릿 플레이크가 넓게 깔린 판을 가져와 얼그레이 마카롱 옆구리를 장식했다. 까만 점박이들이 쫀득한 필링 사이에 콕콕 박혀 더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수와 진범에게는 미안했지만, 민아는 지금 겪는 피로가 참으로 기쁘게 느껴짐과 동시에 사람 앞날과 장사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카롱 가게로 입소문을 제대로 탄 ‘선인장 마카롱’은 사실 맨 처음엔 평범한 디저트 카페로 오픈을 했던 과거가 있었다. 초창기에는 여러 가지 조각 케이크와 마카롱, 테이크아웃 커피까지 같이 만들어 팔았다. 민아는 마카롱보다는 매장 안에 퍼지는 커피 냄새가 좋아 디저트 카페를 열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게를 오픈하고 난 후 1년 동안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민아의 가게가 위치한 대학가 주변에는 이미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디저트가 넘쳐났으며, 방학 시즌에는 가끔 찾아오는 단골손님 외에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아 생각으로는 초기 자본이 부족해 매장의 크기가 작은 점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더운 여름날 매장에 찾아와 다시 더운 바깥으로 나가는 손님들을 보며 디저트와 음료를 테이크아웃으로만 판매한 게 못내 걸리기도 했다.


  적어도 6개월은 적자를 감행할 생각으로 시작한 디저트 카페는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제 성과를 보이지 못하니 불안감이 증폭했다. 눈물을 머금고 매장을 접을까 하는 시점에 솟아난 구멍은 바로 마카롱이었다. 평소에도 크루아상과 마카롱을 좋아하던 민아는 유독 두 디저트에 공을 들였다.


 평소에 선인장을 좋아하는 성격을 반영해 마카롱 꼬끄도 선인장 모양으로 장식해 팔았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단골손님들이 자주 사가는 디저트는 단연 마카롱일 정도로 선인장 마카롱은 민아네 가게의 대표 디저트였다. 민아는 단지 귀엽다고 좋아해 주는 손님들이 고마워 매일 재료가 되는 대로 이것저것 다양한 마카롱을 만들어 팔았었다. 


 그런데 쫀득한 필링의 선인장 모양 마카롱이 어느 순간 SNS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하나둘 예약주문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아는 아직도 첫 대량 예약주문을 받은 날을 잊지 못한다. 마카롱 5개가 담기는 한 세트를 무려 30세트나 시킨 손님의 성함 또한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30세트쯤이야 셋이서 손쉽게 해결하지만, 그때는 카페 홀 담당을 하던 아르바이트생만 있을 때라 민아 혼자 마카롱을 만들어야 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꼬박 밤을 새워가며 마카롱을 만들었음에도 굉장히 즐겁고 기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이후 운 좋게 전국에 마카롱 지도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좋은 물살을 탄 민아 또한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마카롱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항상 마카롱은 오전에 모두 동이 날 정도로 물량이 부족했고, 늘어난 예약 주문 또한 민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한 달 뒤, 민아는 과감하게 ‘선인장 마카롱’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재오픈했다.


 마카롱 전문 과자점을 열기에 앞서 마카롱에 대한 재료 공부를 더하고 다양한 메뉴를 만들어냄은 물론, 일손을 도울 아르바이트생도 몇 명 더 뽑았었다. 재오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단골손님이 차례대로 몰려왔던 첫날은 서로 눈물을 찍어내며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었다.


 민아는 가게를 운영하며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메뉴를 점차 늘려나갔다. 한때 마카롱 열풍이 대한민국을 달콤하게 뒤덮을 때를 지난 지금까지도 선인장 마카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한 마카롱 종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인장 마카롱으로 재오픈할 때 7가지에 불과했던 마카롱 종류가 지금은 30가지 이상 늘어나 있었다. 맛마다 선인장 꼬끄 모양과 색깔도 모두 달라 여러 종류의 마카롱을 같이 모아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손님도 많았다.


 그 많은 종류의 마카롱을 매일 만들면 좋겠지만, 계절을 타거나 간혹 재료가 동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보통 하루에 만드는 마카롱 종류는 열댓 개 정도였다. 게다가 마카롱이라는 디저트 자체가 손이 많이 가는 과자였기 때문에 민아와 직원들의 손목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하루에 만드는 마카롱 숫자에 제한을 둘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도 손님이 웃으며 마카롱을 한가득 사가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질 만큼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매일 아침 선인장 마카롱 SNS 계정에 ‘오늘의 마카롱’ 이라는 메뉴 글을 올리기 무섭게 쏟아지는 하트는 민아가 또 하루를 웃으며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아는 오늘 내놓을 마카롱 메뉴를 써 놓은 포스트잇을 바라보았다. 포스트잇 세 장에 평소보다 더 많은 마카롱 종류가 빼곡히 적힌 걸 보며 씨익 웃었다. 솔티드캬라멜 필링 주머니를 잡고 마카롱 위에 쭈욱 짜내기를 반복했다. 지금 민아에게 제일 필요한 건 얼른 마카롱을 만든 후 올릴 오늘의 마카롱 글에 쏟아지는 하트 샤워였다.








 대망의 화이트데이. 3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오픈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자 세 사람은 부랴부랴 뒷정리했다. 그리고 꼬박 이틀 동안 물든 단내를 빼기 위해 근처 24시간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각자의 자리에 뚝배기가 놓이자 서로 수고했다 말 딱 한 마디만 나눈 후 밥에 집중했다. 크어. 그 이후로는 가끔 정체 모를 시원한 탄성만 울렸다.


 세 사람은 눈과 손으로는 밥을 좇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가게 오픈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할 게 있는지 생각하기 바빴다. 밥을 먹기 위해 가게 뒷문으로 나오면서 본 마카롱 구매 줄이 여느 때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0분 안에 밥을 먹고 다시 오픈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서러우면서도 두근거렸다.


 후루룩 밥을 먹고 온 한수와 민아는 머리를 단정하게 누르는 모자와 앙증맞은 앞치마, 위생 투명 마스크를 쓴 채 포스와 테이크 아웃 매대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좁은 매장에 질서 정리를 맡은 진범은 한 손에는 예약자 명단을, 한 손에는 줄을 선 사람들에게 뜯어서 나눠 줄 번호표와 프린트된 A4용지 두 장을 챙긴 뒤 정문 쪽으로 향했다. 손에 든 짐을 잠시 내려놓은 진범이 정문과 통유리의 블라인드를 올리자 사람들이 한둘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누리 없이 정각 11시에 맞춰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도 선인장 마카롱에 찾아와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매장 안이 협소한 관계로 한 번에 예약자 두 팀, 비 예약자 한 팀씩 입장해야 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약자분들은 저에게 성함과 핸드폰 번호 뒤 4자리를 불러주신 후 두 팀씩 입장할 예정이니 제 왼쪽으로 따로 줄 서주세요!” 




 말을 마친 진범은 프린트된 A4용지를 제 뒤에 높이 붙였다. 큰 글씨로 프린트된 오른쪽 용지는 궁서체로 ‘예약자 X’, 왼쪽 용지에는 ‘예약자 O’라고 쓰여 있었다. 작년에 처음 화이트데이 마카롱 예약을 받기 시작한 민아는 포장 예약 손님과 일반 손님이 한 줄로 같이 기다려서 혼선을 빚은 작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진저리를 쳤다.


 크고 작은 컴플레인을 받은 결과, 올해는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줄을 나눠 동시에 입장하기로 했다. 오전에 포장 예약 팀이 대거 빠지면 오후부터는 좀 괜찮지 않을까요 라며 툭 던진 한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였다.


 예상대로 작년 화이트데이만큼 혼선을 빚진 않았지만, 예약 손님이 쇼케이스에 층층이 쌓아 올린 선인장 모양 마카롱을 보고 추가 구매를 하기 위해 매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각보다 줄이 빨리 줄어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사람은 더 몰려드는데 손은 모자라니 한수와 민아는 지나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진범은 비 예약 손님들에게 먼저 번호표를 주욱 나눠주고 예약자 명단에 있는 사람을 한 명씩 체크했다. 그리고 예약자 확인이 되면 예약했던 마카롱 세트 넘버와 개수를 번호표 뒤에 적어주고 안으로 들여보내길 반복하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틀 전부터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마카롱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 즈음에 모든 마카롱이 소진되었다. 미처 마카롱을 구매하지 못한 손님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한 후에야 가게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릴 수 있었다.


 작은 홀과 커다란 쇼케이스는 깨끗하게 비워졌지만, 밖에서 보이지 않는 주방 안쪽은 전쟁터처럼 난리였다. 주방 바닥에는 주문에 맞춰 포장 용기에 일일이 마카롱을 담고 나오는 자잘한 종이박스 손잡이 끄트머리부터, 마카롱을 아이스팩에 담을 때마다 접착 부분에서 떼어내는 비닐 조각까지 다양했다.


 민아는 한수와 진범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오늘 정말 수고 많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평소에 필링으로 단련된 두 어깨가 오늘따라 피로에 지쳐 흐물흐물해 보였다. 처음 맞이한 대목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넋이 나간 둘을 보며 민아는 다음 추석, 수능 백일과 디데이, 그리고 빼빼로 데이와 연말에도 비슷할 거란 말은 아껴두는 게 좋을 성싶었다. 고됐던 오늘 장사는 끝이 났고, 내일은 가게가 쉬는 요일이었다. 그러니 푹 쉬고 잘 먹어야 함은 당연지사였다.




“얘들아. 얼른 치우고 소고기 먹으러 가자.”


“네에…. 네? 소고기요?”


“진짜 소고기 먹으러 가요?”


“응. 고생했으니 잘 먹어야지. 오늘 사장님 돈 많이 벌었다. 얼른 소고기 먹게 치우자.”




 몰려드는 손님에 놀라 도망갔던 두 사람의 넋이 소고기란 말에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벌떡 일어난 한수와 진범은 싱글벙글한 낯으로 주방 테이블과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민아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해사한 아르바이트생 둘을 보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근처 고깃집에 예약 전화를 걸었다.


 고깃집에 한 시간 뒤에 3명을 예약한 후 텅 빈 쇼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작년보다 1.5배 정도 많은 물량을 만들었는데 모두 동이 난 게 신기하면서도 아쉬웠다. 나름 생일인데 제가 좋아하는 마카롱 두어 개쯤은 남겨 놓을 걸 그랬나 생각하던 민아는 이내 말을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매일 지겹게 보는 마카롱 대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작은 조각 케이크를 사가는 게 낫겠다 결론지었다. 민아가 주방 구석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나왔다. 정문 바닥부터 빗자루질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피로와 행복이 빗자루에 함께 쓸려나갔다.








 가게를 정리하고 나와도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오후 4시라는 식사하기 애매한 시간대임에도 고깃집에는 드문드문 손님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갈비탕을 먹는 손님들만 있을 뿐, 민아네 테이블처럼 본격적으로 고기판을 벌이려는 테이블은 없었다.


 고기를 그득히 주문한 뒤 민아는 온종일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에 답장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양한 기프티콘이 쏟아졌다. 또 다른 에너지를 차곡차곡 채우고 답장하며 고기를 기다리고 있는 민아 앞에 큰 상자 하나와 작은 상자 하나가 놓였다.




“한수야. 이건 뭐야?”


“오늘 사장님 생일이잖아요! 생일 축하해요. 사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사장님.”


“……. 언제 또 이런 걸 다 샀어. 고마워. 얘들아.”




 큰 상자에서는 코코아 파우더가 솔솔 내린 티라미수가 나왔고, 작은 상자에서는 심플한 텀블러가 툭 튀어나왔다. 평소에도 텀블러를 즐겨 쓰는 민아를 눈여겨본 아르바이트생 둘이 기특한 선물과 고마운 선물을 함께 가지고 왔다. 고깃집 주인분께 양해를 구하고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킬킬대며 서로 작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 후 초를 껐다. 작은 노래와 다르게 커다란 박수 소리가 고깃집에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마카롱을 만드느라 힘들었던 새벽을 잊을 만큼, 민아는 그 누구보다 달콤한 생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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