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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r 28. 2020

사람은 변한다.
아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역설 속에도 답은 없다.


"자기야, 왔어?"


"응. 미안. 중요한 일이라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괜찮아."


 찬우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약속 시각을 훌쩍 넘긴 뒤에야 모습을 보였다. 희진의 맞은편에 앉은 찬우는 희진이 미리 시켜놓은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급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컵에 알알이 담겨있던 얼음이 입속으로 한 움큼 옮겨졌다. 이윽고 그가 귀찮다는 듯이 팔목에 걸린 서류 가방과 코트를 옆자리에 내려놓고는 버릇처럼 앞머리를 넘겼다. 아침에 애써 왁스로 넘긴 머리가 어느새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그가 다시 앞머리를 띄우려 머리를 매만졌다. 이로는 신경질적으로 아작아작 얼음을 씹었다. 희진은 평온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저번에도 그러다가 이 시려서 한참 고생해놓고는…. 얼음이 그렇게 좋아?”


“좋다기보다는 속이 답답해서 씹는 경우가 많지.”


“왜. 오늘도 일이 잘 안 풀리거나 힘들었어?”


“하아…. 늘 그렇지 뭐.”




 희진이 말없이 웃으며 앞에 놓인 따뜻한 카페라떼를 한 모금 넘겼다. 그가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도 찬우는 여전히 앞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머리에서 손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자, 희진은 익숙하다는 듯이 가방 속을 뒤져 제 손거울을 건네주었다. 손거울을 건네받은 찬우가 다시 머리를 여기저기 만졌다. 찬우는 얼음이 녹으며 유리잔과 달그락 소음을 낼 즈음이 돼서야 만족한 듯 씩 웃어 보이곤 손거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라떼 한 모금을 더 마신 희진이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찬우야. 머리 다 만졌어?”


“응. 이제 괜찮은 거 같아.”


“다행이네. 나…. 오늘 할 말 있어.”


“뭔데?”


“……. 우리 헤어지자.”


“뭐?”


“헤어지자고.”




찬우는 단숨에 헛것을 들은 듯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가 아는 희진은 이런 말을 쉬이 내뱉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믿기 힘든 말이었다. 희진의 삶 중심에 떡하니 앉아 있던 찬우가 휘청했다. 그리고 찬우의 삶 중심에 앉아 있던 찬우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두 찬우 모두 어벙한 얼굴로 반대편에서 쏟아지는 말뜻을 헤아리기 바빴다. 요즘 내가 바빠서 신경을 못 써줬더니 삐졌구나. 그래도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 건 아니지. 두 찬우가 제멋대로 희진의 말을 해석했다.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못 챙겨줬지. 미안해.”


“일 바쁠 수 있지.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기인데, 나 진심으로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


“갑자기 왜 그래?”


“….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이러는 거 같아?”


 찬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잘 자라는 안부 인사도 주고받았고, 오늘 만나기 전에 늦을 것 같다는 문자에도 희진은 다른 속내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찬우는 갑자기 다른 태도를 보이는 희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입장에서는 희진의 이별 통보는 매우 갑작스러움이 분명했다.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면. 평소에도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니. 그냥 포기하고 있었어.”


“뭘 포기하고 있었는데.”


“네가 변하는 걸.”


“변해? 내 마음이 식기를 기다렸다는 거야 지금?”




 희진은 살풋 웃어 보였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 아닌데도 농담처럼 웃겼다. 그는 짧은 사이에 지금까지의 심정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조용히 따뜻한 라떼 한 모금을 더 넘긴 그는 차라리 예시를 들어주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거로 생각했다.




“아니. 좀 여러 가지인데, 음. 예를 들자면 언제쯤 너는 약속 시각에 늦지 않고 나타날까 같은 거?”


“……. 희진아 그건,”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당장 달려와 달라는 게 아니야. 데리러 가고 싶은데 바빠서 못 가겠다. 얼른 병원 가.라는 말보다 괜찮아? 많이 아파? 걱정하는 한 마디면 됐어. 난.”


“…….”


“네 생일 한 달 전부터 아닌 척하면서 갖고 싶은 물건 줄줄이 얘기하는 거. 나는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옷이나 머리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그거 신경 쓰느라 우리 데이트 시간 그냥 훅 보내는 거. 내 물건은 아무렇지 않게 가져다 쓰면서, 내가 네 물건 한 번 쓰면 어디 흠집 나거나 망가지지 않았나 요리조리 살펴보는 거?”




 희진이 줄줄 뱉어내는 말에 찬우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씩 혹은 여러 번 내비쳤던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재생되었다.


 그게 갖고 싶어? 어떻게 알았냐니. 너 저번부터 계속 이거 얘기했잖아. 알았어. 이번 생일에는 그거 사줄게. 쇼핑 사이트 그만 보고 이제 나랑 놀자. 우리 오랜만에 만났잖아.


 나는 너 추리닝 입고 나와도 좋아. 어떤 모습이든 다 이쁘고 귀엽고 멋있어. 나한테 좋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는데, 머리랑 옷 조금 구겨졌다고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았으면 해.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 내가 너무 속상할 거 같아. 그 시간에 우리 편하고 재미있게 데이트하자. 응?


 찬우야. 나 평소에는 보조배터리 잘 가지고 다니는 데 오늘만 깜박해서 그래. 진짜 흠집 안 내고 잘 빌려 썼어. 배터리 그만 보고 우리 공원 걷던 거 마저 걸으면 안 돼?


 아직도 일 안 끝났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음에는 약속 못 나올 정도로 바쁘면 괜히 무리하지 말고 미리 말해 줘. 무리하지 말고. 그리고…. 네 시간이 소중하듯 내 시간도 소중히 여겨주면 좋겠어.


 머릿속 여기저기서 웅웅대며 울려 퍼지는 희진의 말에 찬우는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의 말대로 희진은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었다. 이미 여러 번 시그널을 보냈지만, 정작 수신하지 못한 건 찬우였다. 찬우는 타들어 가는 속을 진정시키려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넘겼다. 이어 오른쪽 볼에 얼음을 한 움큼 물고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희진은 여느 때처럼 찬우가 얼음을 마저 다 씹기를 기다렸다. 얼음을 다 넘긴 찬우가 절절한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이제부터라도 정말 잘할게. 응? 제발 이러지 마....”


“이제 애써 좋은 꿈을 꾸지 않으려고 해. 3년 동안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아버려서. 오늘로 그만하고 싶어.”




찬우는 다시 한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이번에는 왼쪽 볼에 얼음을 한가득 물고 내리 씹어 재꼈다. 둘 사이에는 얼음을 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희진은 라떼를 마저 비우고 잔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고민하던 찬우가 앞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처음에…. 내 모든 게 좋다고 했잖아. 다 괜찮아서 그런 거 아니었어? 어떻게 마음이 변할 수 있어?”


“……. 네가 변할 줄 알았어. 내가 먼저 애정을 주고 따뜻함을 퍼부어서 항아리가 가득 차면, 나에게도 애정을 주고 따뜻함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변할 거라고. 내가 잘못 판단한 거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옛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닌데. 넌 다를 줄 알았나 봐. 그렇게 믿고 싶었고.”


“나도 변할 수 있어. 너는 변했잖아.”


“그래. 언젠가 변할 수 있겠지. 그런데 찬우야. 이제 내가 더 퍼줄 사랑이 없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너와 더는 힘들 것 같아.”




찬우는 맞은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절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유리잔을 들고 남아있던 아메리카노를 모두 입속에 쏟아부었다. 내려놓은 유리잔에는 커피도 얼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음 씹는 소리가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이미 모든 라떼를 다 마신 희진은 태연한 얼굴로 찬우에게 물었다.




“찬우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 오늘이 며칠이지? 3월 28일이네. 28일이....... 우리 3주년인.... 가?


“....... 오늘은 음력으로 3월 5일이고, 음력 3월 5일은 내 생일이야.”


“....... 희진아. 진짜 내가 잘못했어. 내가 더 잘할게. 뭐, 뭐가 갖고 싶어? 지금 당장 생일 선물 사러 가자. 여기…. 여기서 나가서 우리….”


“네 성격에 음력 생일 챙기기 힘든 거 아는데. 잘 아는데.... 3년째 헷갈리기엔 내가 너무 비참하다.”


“…….”


“나 오늘 내내 네 연락 기다렸어. 이번에는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라도 보내줄 거라 믿고. 여기저기 기프티콘이나 축하 문자가 많이 오는데도 정작 기다리던 네 연락은 없더라고.”


“…….”


“나 올해 생일은 5시간 만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어.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날게....... 잘 있어. 잘살고.”




 희진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손거울을 챙겨 가방에 쏙 넣었다. 가방 지퍼를 꼭꼭 닫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조용히 혼자 카페를 벗어났다. 희진이 나간 미닫이문 사이로 후련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희진이 비워진 자리에서 찬우는 습관처럼 유리잔을 잡았다. 이내  잔임을 발견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속이 타들어 갔다. 씹을 얼음이 없자 찬우는 직원에게 얼음을 조금    있냐고 물었다. 얼음만 한가득 채워  찬우는 잔에 담긴 얼음이 절반 정도 비워졌을 때에야 희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얼음이 그렇게 좋아? 유리잔에서 손이 주욱 미끄러졌다.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았다.   자리에는 후련한 바람이 앉아 있었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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