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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Feb 29. 2020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시간

2월 29일. 4년마다 외쳤던 고운 소리는



해가 늑장 부릴 1월 초 어느 주택가. 평상시와 다르게 골목 안쪽에 빨간 대문집에 북적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곧이어 이삿짐 몇 대가 골목을  가득 매우고 짐을 정신없이 옮겼다. 이삿짐센터 덕분에 다영이네 가족은 아침 일찍부터 이삿짐이 옮겨지는 과정을 확인한 뒤, 24시간 해장국집으로 삼삼오오 몰려갔다.



이삿짐 확인과 집 매매과정을 마쳐야 하는 다영의 부모가 재빨리 밥을 먹은 뒤 자리를 떴다. 다영은 할머니와 어린 소영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야무지게 밥값 계산을 하고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에 천천히 밥을 먹었음에도, 시간은 아직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엄마가 이삿짐 정리 12시쯤부터 할 거라고 그때 오랬는데."



"아직 10시도 안 됐어. 언니. 그럼 어떻게 해?"



"할머니. 우리 카페가요."



"그러자꾸나. 그 저어번에 할미한테 시켜준 게 뭐냐?"



"카푸치노요. 거품 몽글몽글 난 그거 맞죠?"



"으응. 몽글몽글. 맞을 게다. 아유, 커피 이름이 그렇게 어려워서야 원."




다영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해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훈훈한 온기가 세 명을 맞아주었다. 솟아오른 광대부터 노곤해지는 기분을 만끽한 채, 다영이 주문을 마치고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몇 분 후, 진동벨이 울리자 소영이 잽싸게 일어나 음료 석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트레이 위에는 따뜻한 카푸치노 한 잔, 아이스초코 한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너희 또 찬 거 시켰어? 찬 거 많이 마시면 못 쓴다니까."



"할머니. 저희는 찬 거 아니면 못 먹겠어요."



"할머니! 얼죽아 알아요? 얼죽아?"



"얼죽아? 그게 뭐냐?"




소영의 발랄한 해석에 더 크게 혀를 차던 할머니는 둘을 다시 나무랐다. 익숙한 잔소리를 디저트 삼아 자매가 나란히 찬 음료를 들이켰다. 잔소리를 마저 끝마친 할머니도 따뜻한 카푸치노를 호로록 마셨다. 



한 모금씩 음료를 넘기자 소영이 먼저 조금 있으면 중학교 올라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다영은 맞장구를 쳤고, 할머니는 다시 혀를 찼다. 신나게 옥신각신하면서도 각자 중간중간 음료를 넘기는 걸 잊지 않았다. 서로 다른 온도로 행복한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다.








다영은 아까 카페에서 보냈던 시간이 오늘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노곤했다. 박스에 든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넣고 옮기기를 몇 시간 째, 으드득 아우성을 치는 허리를 펴니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집 안을 살펴보았다.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모습에 끝이 보인다는 희망이 부풀었다.



점심은 바닥에 대충 신문지를 깔고 중국집 배달음식으로 때웠지만, 저녁은 제대로 식탁에 앉아 먹자는 할머니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이어 요리할 기운 없으니 아이들에게 중국집 말고 다른 음식을 시키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신이 난 자매는 그 말에 재빨리 매콤한 치킨과 피자, 떡볶이를 주문했다.




“배달왔습니다.”



“언니! 배달왔대. 뭐가 먼저 왔어? 치킨? 피자?”



“아니. 떡볶이.”



“너희는 떡볶이를 이렇게 많이 시켰어?”



“엄마. 요즘 이렇게 떡볶이 파는 집 많아.”




배달음식이 줄줄이 집으로 쏟아졌다. 하나하나 포장을 풀러 상에 펼쳐지자 어른들은 다시 누가 저녁에 떡볶이를 시켰냐며 자매를 나무랐다. 하지만 이내 모두 느끼한 속을 달래느라 떡볶이부터 없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다영은 역시 한국인은 어느 상황이든 식탁에는 매운맛이 필수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이제야 집을 좀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식탁 뒷정리를 마친 다영의 가족이 집 바깥으로 나와 넓은 마당을 구경했다. 든든하게 배가 부른 다영은 제 능력을 발휘해 여기저기 힘이 없는 식물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쑥쑥 자라나는 덩굴과 가지에 모두가 손뼉을 쳤다. 다영의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자 소영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언니. 나는 언제 능력이 생겨?"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어. 그건 아무도 몰라."



"치사해. 우리 가족 다 없는데 언니만 있어."




다영은 투정 부리는 소영을 등을 몇 번 툭툭 쳐주며 위로 아닌 위로를 전했다. 대부분의 아이가 열다섯 살 남짓에 발현하기 때문에,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는 소영은 아직 몇 년 더 기다려야 했다.



두 세대를 건너뛰고 집안에 오랜만에 능력자가 나타났다. 다영은 증조부의 능력을 똑같이 이어받았는지, 제 마음대로 식물을 성장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다영의 능력이 발현한 후 모두가 신기해했지만, 할머니는 혼자 눈물을 훔치셨다. 증조부가 다영처럼 능력을 발휘했을 시절에는 능력자를 괴물이라 칭하며 회피했던 게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되려 뭇매를 맞고 죽는 능력자도 허다했다. 



그 일례로 다영의 증조부 능력이 알려지자 동네 사람들의 질타가 이어졌었다. 언젠가 사람을 해칠 거라며 가족을 마을에서 내쫓아 버렸다. 어린 시절 서러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할머니는 다영의 능력을 알게 된 날, 남아있던 서글픔을 조금 뱉어냈었다.




"할머니. 저 나무에요?"



"으응. 맞단다. 저 동백나무야.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구나."



"진짜 안 자라네요. 신기하다."




다영은 이 집으로 이사를 오기 전, 영주의 동백나무에 대한 사연을 들었었다. 동백나무가 있는 자리 옆이 예전에 할머니가 증조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살던 집터였다고 했다. 지금은 마당으로 변해 작은 집터는 없어졌지만, 동백나무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말에 삼대가 다시 이 집으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태어난 날, 증조부께서 심으셨다는 동백나무는 조금 기이했다. 집을 소개해 준 공인중개사도 이 집에 동백나무가 하나 있는데 몇 년이 지나도 꽃이 안 핀다는 말을 전했다. 할머니 또한 자라면서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피우지 않는 동백나무였다.




"할머니 이름이 꽃부리 영에 붉을 주 라면서요. 그럼 할머니가 꽃 대신인 거 아니에요?"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단다. 할미가 어렸을 적에 너희 증조할머니한테 물어본 것 같은데 왜 안 피는 지 기억이 안 나."



"할머니! 할머니가 꽃이면 좋은 거 아니에요? 난 좋은데!"



"야. 피고 지는 꽃이 왜 좋아. 할머니는 동백꽃이 아니라 동백나무거든?"




자매가 투닥투닥 싸우는 모습을 홀홀 거리며 지켜보던 영주는 다시 애잔한 눈으로 동백나무를 매만졌다. 이 집에서 나올 적에 아주 작았던 나무는 어느새 제 나이만큼 주름졌지만, 긴 세월을 이겨내고 늠름하게 커 있었다. 돌봐주지 못한 세월이 야속해 나무를 몇 번 쓱쓱 훑어주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잘 지내시죠?'




영주는 나무를 쓰다듬고 탁탁 두들겨 보기를 반복하며 가지들을 우러러보았다. 찬 바람이 불어와 다영이 그만 들어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모양새였다. 영주는 미안함과 반가움을 담아 한 번 더 나무를 쓰다듬어 준 뒤 다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영주가 다시 동백나무 품으로 돌아온 첫날밤이었다.








두 달 뒤, 이삿날처럼 다시 영주네 집이 들썩였다. 내일이면 새집에 이사온 뒤 처음 맞이한 영주의 생일날이었다. 게다가 오랜 만에 돌아온 윤년에 다들 제날짜에 생일을 챙길 수 있음을 기뻐했다.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월 29일. 생일의 주인공은 영주는 가족들의 환한 웃음에 괜스레 들뜬 마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온 옛 집터에서 맞이한 생일이라 더욱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자매는 다른 기대에 부푼 상태였다.




"할머니. 진짜라니까요. 내가 책에서 봤어요."



"그랬어?"



"네! 능력이 정말 출중해야 사용할 수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대요!"



"할머니! 우리 한 번 확인해봐요. 네? 네?"




능력에 따라 그에 맞는 특수학교에 다니는 다영이 책에서 동백나무와 비슷한 사례를 본 게 화근이었다. 다영이 본 내용인즉슨 능력자의 요구에 따라 특정 시간대에 꽃이 피는 나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내용이고, 실제로는 능력을 조절하는 능력자의 기술이 굉장히 좋아야 하므로 실현하긴 어렵다고 했다.



구립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내용을 본 다영은 선생님께도 실제로 가능한 일이냐 물어봤었다. 그러나 역시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아직 실제 사례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다영은 혹시 모를 기대감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집으로 온 뒤에도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았다.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여전히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답변이 쏟아졌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다영은 직감을 믿고 소영과 같이 할머니에게 떼를 썼다.




"할머니. 밤에 한 번만 확인해 보면 돼요. 네?"



"아유. 그래라. 한밤중에 괜히 실망하지 말고."



"네! 할머니 진짜 정확히 태어난 시간은 몰라요?"



"몰라. 옛날에는 대충 십이시나 이십사시로 따지기만 했단다."



"축시는 확실하죠?"



"그래. 새벽 1시에 괜히 난리 피우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영주는 웃으며 밤에 아이들이 춥지 않도록 두꺼운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저 동백꽃을 확인할 생각에 신이 난 아이들은 추위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가족은 각자 다른 모양새로 2월 29일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2월 29일 오전 12시 55분. 약 한 시간 전에 재깍 생일 축하를 받은 영주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누인지 오래였다. 자매의 부모도 아이들이 괜한 이론에 신이 났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컴컴한 거실 한구석 창가 끝. 동백나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자매는 영주가 준비해 준 옷을 입고 졸린 눈을 비비며 나무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언니. 진짜 꽃이 시간에 맞춰서 펴?"



"이젠 나도 모르겠다. 너무 졸려."



"아, 괜히 우리만 들뜬 거면 엄마 아빠한테 쪽팔리잖아."



"그럼 너도 어른들처럼 미리 자고 있지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혹시 모르잖아. 지금 몇 시야?"



"이제 2시 다 됐어. 근데 우리 동백꽃이 안 펴도 실망 하지 말자."



"핀다며! 왜 갑자기 말을 바꿔?"



"축시 절반이 지났는데 꽃망울은 코빼기도 안 보이니까 그래."




저녁에 들뜬 목소리와 다르게 다영의 자신감은 한껏 풀이 죽은 상태였다. 새벽 2시가 지나도 꽃은커녕 어둑어둑한 새벽에 속없이 별빛만 밝게 빛났다. 



어떻게 꽃망울조차 안 보이지. 이론은 이론일 뿐이라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싶은 순간, 소영이 옆에서 연신 다영의 팔을 세게 흔들었다.




"……. 언니. 저기 빨간 거 꽃 아냐?"



"뭐? 어디?"




방금까지만 해도 진하고 푸른 잎만 무성했던 나무에 한 눈에도 매우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붉은 꽃잎 사이엔 수줍은 수술과 암술이 노랗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말도 없이 꽃을 바라보던 자매가 부리나케 집안 식구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목청이 터져라 부모를 부르는 목소리에 큰일이 난 줄 알고 부랴부랴 방에서 나오던 어른들이 멍하니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꽃이 피었어요! 진짜 술시에 피었어요!"



"뭐라고? 뭐가 피었…. 세상에."




영주는 제 두 눈을 의심했다. 붉은 꽃이 어서와라 손짓하는 듯 꽃잎을 활짝 펼친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움켜쥔 채 밖으로 나간 영주는 간신히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발걸음은커녕 제 향도 숨긴 채 찾아온 꽃들이 고요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낮은 가지에 손을 뻗어 꽃잎을 매만지던 영주는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려보냈다. 그 눈물 속에는 어릴 적 서러움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감사함이 녹아 있었다.



자식들의 토닥임을 받으며 한참을 나무 아래 주저앉아 흐느끼던 영주는 다영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연신 고맙다는 소리를 내뱉었다.




"고맙다. 우리 손녀. 할미가 죽기 전에 이 나무의 꽃을 볼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할머니. 저희도 할머니 덕분에 이렇게 예쁜 동백꽃을 볼 수 있었어요."




다영의 부모가 다영과 영주를 안아주며 같이 훌쩍였다. 동백나무에게 온 가족이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때 서로를 보듬으며 눈물을 닦아주는 영주와 다영 사이로 어린 소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언니. 할머니. 저기 한자가 쓰여 있어요."



"한자?"




벌게진 눈가를 훔친 영주는 소영이 말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방향에서 정말 작게 한자가 줄지어 새겨져 있었다. 분명 낮에 나무 주위를 돌아볼 때만 해도 없었던 한자가 솟아난 모습에 영주가 재차 눈물을 닦으며 한자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부모의 사랑 앞에 무너졌다. 나무를 부둥켜안고 우는 영주를 대신해 다영의 부모가 대신 아이들에게 나무에 새겨진 말의 뜻을 전해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화사하게 빛날 나의 아이야

어둠이 몰려오는 긴긴밤도 두려워 말아라

암흑이 몰려올수록 너는 더 흐드러질 테니



윤년마다 자식에게 외쳤던 고운 소리가 비로소 와닿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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