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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Mar 21. 2020

잠 못 이루는 밤에

사소한 습관 하나를 자장가 삼아




꼭 오늘 같은 날이 있다. 평소와 같은 이부자리인데도 온몸이 갑갑해서 못 견디는 느낌이 불쑥 찾아오는 날. 잊고 살다가도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드문드문 우리 집을 방문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제 맘대로 내 머릿속을 휘젓는 것도 모자라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불안감까지 불러들였다. 

아까 보냈던 제안서를 또다시 수정 요청하면 어떻게 하지? 



아, 더는 하기 싫은데.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수정이야. 

지금쯤 거긴 한낮일 텐데. 

수정 메일이 벌써 도착한 건 아니겠지? 

불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복작거리는 속을 이기지 못해 눈을 스륵 떴다. 안방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암막 커튼이 달빛 한 움큼도 집안으로 쉬이 들이지 않았다. 시계가 걸린 오른쪽 벽을 바라보았다. 더 어두운 벽 어딘가에 시계가 붙어있을 텐데 아무리 눈을 굴려봐도 시계 그림자 하나 찾지 못했다. 



가끔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를 위해 찬이가 사 온 무소음 시계는 제 몫을 아주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림자는커녕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는 초침 덕분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새벽 어딘가를 떠도는 중일 거라며 시간에 대한 궁금증을 놓아주었다.



새까만 시야 사이에서도 더 거뭇한 이불이 부스럭대며 제소리를 냈다. 목 끝까지 덮고 잔 이불은 어느새 가슴께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딱 두 뼘만큼 시렸다. 두툼한 이불 끄트머리를 잡아다가 주욱 끌어올렸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찬이가 올라오는 이불이 간지러웠는지 한 번 뒤척였다. 뒤척임 위로 이불을 더 단단히 덮어주고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게 조용히 새벽을 달리고 있는데 나만 홀로 멈춘 기분이었다.



다시 눈을 감아 봐도 한 번 달아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 시계 분침을 찾을 때부터 달아난 듯했다. 이럴 바에야 메일을 한 번 더 확인하거나,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다시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 다리 위에 엉킨 찬이 다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연이어 몸을 일으켜 포근한 이불에서도 완전히 벗어났다. 얇은 잠옷 사이로 서늘함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서슴없이 다가온 찬 기운 덕분에 완전히 잠에서 깼다. 잠기운에 칭얼대며 안겨 온 밤공기를 다독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곧장 서재로 들어가 잠든 데스크톱을 억지로 깨웠다. 모니터는 단잠을 깨워 짜증이 났나 보다. 평소보다 꽤 눈부신 화면을 쏘아댔다. 조용한 안방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서재에 불을 켜고 문을 닫았다. 



푹신한 의자에 앉자마자 메일함을 확인했다. 뉴욕에 있는 협력사에서 보내온 메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메일 하나에 전전긍긍하며 못 자느니 아까 퇴근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올걸. 한숨과 함께 뒤늦은 후회를 내뱉었다.



몇 시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메일을 클릭했다.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내일 회사에 가서 몇 부분만 더 손을 봐야 했지만, 그래도 프로젝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해 다행이었다. 드디어 일을 마무리 짓고 며칠이라도 쉴 수 있을 거란 안도감에 긴장이 탁 풀렸다.



뿌드득 소리를 내는 가죽 의자에 한껏 기댔다. 잠이 오지 않던 침대보다 더 편하게 느껴졌다. 아마 협력사가 보낸 메일이 준 안도감이 더해졌을 터였다. 해가 중천일 상대방에게 이 시간에 메일 답장을 하면, 다음에는 더 늦은 새벽에 불쑥불쑥 메일이 올까 봐 답장은 내일 아침으로 미뤄뒀다. 



데스크톱을 끄고 서재에 불을 껐다. 서재에 들어올 때보다 낯빛이 더 밝아진 달이 발치를 졸졸 따라왔다. 어두운 주방에 제일 작은 조명등 하나를 켰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전기 포트에 물을 받아 올려 두었다. 



전기 포트 속 물이 보글보글 끓는 걸 듣다가 조심히 찬장을 열어 티백 박스를 꺼냈다. 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캐모마일 티백이 똑 떨어졌다. 종종 불면증에 시달리는 날이면 따뜻한 캐모마일 티 한 잔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 포트가 물이 다 끓었다는 의사를 전했다. 괜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요즘 일이 바빠서 챙기지 못한 사소한 부분이 이렇게 한둘씩 드러났다. 찬이와 만난 뒤에는 사소한 실수에도 크게 자책하는 성격을 거의 다 고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사람은 쉽게 변하면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란 게 여실히 드러났다.



짧은 사이에 따뜻해진 물을 싱크대에 살살 부었다. 증기가 싱크대 전체에 퍼지며 스멀스멀 뜨뜻한 물 내음을 풍겼다. 조용히 전기 포트를 제자리에 놓아두고 뒤를 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를 살짝 두드려 우유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구석에 저지방 우유가 하나 남아있었다. 냉장고 도어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그마저도 간신히 한 컵 분량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옆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찬 우유를 집어넣었다. 기척이 없는 안방을 다시 한번 바라본 뒤 소심하게 전자레인지 버튼을 눌러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징징거리는 작은 전자음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니 몸은 노곤한데 오히려 눈망울은 더 또렷해졌다. 거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4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기도, 그렇다고 계속 밤을 새우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우유를 다 비워낸 따뜻한 머그잔을 쥐고 잠시 고민하다 이내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밤을 지새우든 다시 잠이 들든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는 게 나았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한 번 휘이 둘러본 뒤 조명등을 껐다. 다시 혼자 암흑 속을 헤맸다.



더듬더듬 물건을 짚어 침대로 발을 놀렸다. 다시 두꺼운 이불속에 몸을 누였다. 혹여나 찬이가 깰까 봐 침대 끄트머리부터 꾸물꾸물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일정하게 고요한 숨소리를 내는 찬이를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조금은 덜 복작거리는 속을 재우려 스스로 다독였다. 잡다한 생각은 이리저리 통통 튀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 잠을 재우려 한참을 말려봐도 소용없었다. 그냥 따뜻한 이불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자체로 만족하기로 하자 또 다른 꾸물거림이 덮쳐왔다. 내 어깨너머 곤히 자는 줄 알았던 찬이의 왼쪽 팔이 허리를 조심히 감싸 안았다.




“……. 안 잤어?”



“…….”



“……. 찬아.”



“…….”




조금 더 목소리를 줄여 이름을 불러보아도 요지부동이었다. 등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숨소리도 여전히 똑같은 속도였다. 잠결에도 평소 습관처럼 허리께를 놓지 않으려는 손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잠든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반듯한 눈썹과 예쁘게 감긴 두 눈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말간 눈두덩이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다 아예 찬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불보다 따뜻한 품이 잠기운을 조금 불러냈다. 새벽을 혼자 걷고 싶지 않은 기분에 다시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끼워 넣었다. 다른 온도가 종아리 위에 덧대어졌다.



그가 다시 깨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어 품에 머리를 조금 구겨 넣었다. 머리카락이 부스스 흩어지는 느낌이 볼에 비벼졌다. 아까보다는 조금 무거워진 눈꺼풀을 닫았다. 



그와 똑같이 나보다 조금 더 넓은 허리를 꼬옥 안았다. 곧이어 다른 습관이 머리 위에 내려왔다. 묵직한 손길이 뒷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어 말간 두 눈두덩이를 다시 확인했다. 아직도 눈은 평온히 감겨있지만, 손과 목소리는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왜 못 자. 꿈꿨어?”



“응.”



“그랬어…. 이제 같이 자자.”




그는 내가 꿈에서조차 홀로 걷는 걸 반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불면증으로 잠을 설쳤어. 잠이 안 와서 삼십 분 정도 메일 확인하고 왔어.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캐모마일 티를 우려낼 그를 알기에, 속으로만 칭얼대며 한 번 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내일 아침에 주방에서 발견될 빈 우유갑을 보곤 잠 못 잤으면 깨우지 그랬냐며 잔소리를 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항상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는 밤이면 지금처럼 한 손은 허리를 안고, 한 손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의 습관이 잠결에도 이어졌다는 걸 본인은 기억 못 할 터였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다 거짓말을 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의 품속에서 같이 새벽을 걸었다. 새삼스레 그를 다시 사랑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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