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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25. 2020

김 선 : 매력이 넘치는 사람

그 매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볼수록 매력이 샘솟는 사람이 있다. 인이 보기에 선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덤덤한 성격에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말도 잘 붙이지 않는 성격이지만, 짧은 몇 문장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넘어 마음마저 사로잡는 사람. 인이 생각하기에 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이 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이 사람과 오래 연을 쌓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들었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선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걸 그때는 몰랐었다.



 첫 만남은 대부분의 인연이 그러하듯 우연을 관장하는 어떤 존재가 그들을 같은 장소로 인도했다. 해외 학점 교류 신청을 위해 학사팀에 방문했던 인과 선은 각자 제출서류를 들고 데스크 앞에 섰다. 먼저 도착한 인이 서류를 제출하자 학사팀 직원이 간단히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김인…. 학생? 외자예요?”



“네.”



 인은 이십 년 넘게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외자예요?’ 일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가끔은 흔한 질문이 지겨워질 때마다 개명할까도 몇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실천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개명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었다고는 해도 이후에 펼쳐질 인터넷 개인정보 수정 파티에 앞이 까마득한 것도 한몫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개명이 스쳤다 지나가는 몇 초 사이, 선이 제출서류를 직원에게 건넸다.




“저도 외자입니다. 김 선입니다.”




 그 한 마디에 인과 선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서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없이 사소한 지겨움을 나눴다. 서류 접수가 되는 동안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던 둘은 학사팀을 나오면서부터 말문이 터졌다.




“이름이 비슷한 사람은 처음 보는 거 같아요. 그것도 외자로.”



“저도요. 어느 과에요?”



“영문과예요.”



“그것도 비슷하네요. 저는 중문과예요.”




 선과 인은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처럼 계속 얘기를 주고받았다. 다음 수업이 있을 건물로 캠퍼스를 같이 걸으며 사소한 자기소개가 오갔다. 그리고 둘 다 같은 교양을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혼자 듣는 교양수업도 참으로 지루했던 둘은 이제 서로 다른 지겨움을 나누기로 했다.



 햇볕이 따뜻한 5월 둘째 주부터 인과 선은 나란히 앉아 교양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 둘 다 혼자 어물쩍 강의실에 들어와 어디에 앉아야 하느냐는 눈치싸움도 사라졌다. 누가 먼저 자리를 잡든 상관없이 교양 수업을 같이 들을 짝꿍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외 학점 교류 신청은 인과 선 모두 보기 좋게 똑 떨어졌다. 하지만 인사치레처럼 지나갈 수 있는 인연이 사소한 계기로 얽히고설켜 사람이 남았다. 시작점은 분명한데 끝은 보이지 않는 실타래가 끊길 듯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실타래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서로의 여러 시작을 같이 맞이했다.








 선의 매력은 둘이 같이 살면서도 계속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의 직장 중간 즈음에 자리한 보금자리 근처에는 큼지막한 재래시장이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인은 일주일에 2~3번 정도 재래시장에 들러 기분에 따라 재료를 사 왔다.



 시끌벅적한 재래시장은 언제와도 인의 기분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여기저기서 사람 복작거리는 소리가 살아있음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되려 그 시끄러움이 반가운 날도 많았다. 그 활기에 기분이 방방 떠서인지 인이 재래시장에 들르기 전, 미리 생각했던 음식 재료와 전혀 다른 재료를 사 올 때가 종종 있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요리를 할 때만큼은 기분파인 인은 맨 처음 선과 동거에 대해 의논할 때 이 점이 제일 걱정됐었다. 인은 아침에 항정살 2인분을 가뿐하게 구워 먹고도, 저녁에 고기가 더 먹고 싶으면 스테이크 재료를 사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인에게는 삼시 세끼가 중요할 뿐, 어느 시간에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은 그렇지 않을 수 있기에 동거를 시작하기 전, 인은 선과 집을 보러 다닐 때 조용히 물어봤었다.




“그…. 선아. 너 아침에 고기 구워 먹기도 해?”



“아침에 구워 먹어 본 적은 없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을 거 같아.”



“진짜? 괜찮아?”



“응. 뭐 어때. 먹고 싶으면 먹자. 원래 요리사님 먹고 싶은 거 먹는 거야. 그래야 요리도 맛있게 잘 된대.”



“누가?”



“몰라. 어디선가 들었는데. 근데 그 말에 굉장히 공감해서 아직도 기억이 나.”




 선의 무던한 성격이 어김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인은 그 대화 이후로 선에게 인간으로서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감을 마음속으로 표했다. 남모를 감사를 껴안고 이사를 끝마친 다음 날, 선과 인이 먹은 첫 번째 아침은 아귀찜이었다. 이사를 무사히 마친 둘은 저녁에 거하게 술을 마셨고,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 이 집 요리사인 인이 아귀찜이 당겼다는 게 이유였다.



 인이 신이 나서 요리를 할 동안 선은 서재 청소를 했다. 어느 정도 청소를 마친 뒤 거실에 나온 선은 맛있는 김을 모락모락 내뿜는 아귀찜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식탁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피식피식 웃음을 감출 줄 모르던 둘은 평소에도 있었던 일이라는 듯 아귀찜을 맛있게 해치웠다. 선이 입에 양념을 가득 묻히며 아침 아귀찜을 비워낼 때마다 매력이 철철 넘친다는 걸 그 아무도 모를 터였다.



 그 이후로도 인이 선의 사소한 매력에 빠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을 하나 더 꼽으라면 선의 안경을 가리킬 수 있었다. 둘 다 안경을 쓰면서도 인은 가벼운 반테를 선호했고, 선은 조금은 두꺼운 뿔테를 선호했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존중하지 못하는 일이 가끔 반복되었다. 하지만 금세 각자 취향을 존중하기로 하고 마무리를 짓는 게 태반이었다.



 그렇게 인은 안경에 대해선 안경테 취향만 다른 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둘이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사소한 차이점 하나가 더 눈에 띄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었고 주말에 늘어지는 햇살이 거실 절반 이상을 차지한 날이었다. 인은 태블릿으로 기사를 읽고 있었고, 선은 전날 읽다 만 소설을 마저 읽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각자 여가를 즐기고 있던 도중, 선이 따뜻한 햇볕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러곤 소파에 길게 누워 기지개를 켠 후 낮잠에 풍덩 빠질 준비를 했다.



 선을 흘끗 보던 인이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중, 소파 앞 작은 원목 테이블에 놓인 선의 안경이 더 빨리 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아직 잠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은 선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선아. 원래 안경을 완전히 뒤집어 놔?”



“응? 아, 응. 안경도 나 쉴 때 쉬어야지.”




 참으로 선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소설 번역가 아니랄까 봐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선에 입에선 고운 활자들이 쏟아졌다. 인은 선이 보는 안경에 대한 관점을 조금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잠에 절기 직전인 선을 더 끄집어내는 불청객이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조용히 끄덕이고 다시 태블릿에 뜬 기사를 읽는데 선의 잔잔한 활자가 조금 더해졌다.




“가끔 이렇게 세상을 보는 시선도 필요한 거 같아.”



“어떻게?”



“이렇게 안경 완전히 뒤집듯 세상을 거꾸로 보는 거? 가끔은 거꾸로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어떤 거?”



“거꾸로 서로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본다든지, 아니면 풀리지 않은 문제점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 본다든지. 그런 거.”



“…….”



“관점을 조금씩 바꿔서 생각해보기만 해도 서로 싸우거나 논쟁을 할 일이 많이 줄지 않을까 싶어. 요즘 네가 종종 보내주는 신문 기사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너어는…. 번역가 하길 정말 잘했다. 알려주는 보람이 있는 친구야. 나랑도 활자랑도 절대 절교하지 마.”



“고마워. 매번 잘 알려줘서.”




 금융 회사에 다니는 인이 자주 신문 기사나 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종종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넌지시 물어보던 선이었다. 그러면 인은 그 문제에 차근차근 설명해주었고, 인은 설명해줘서 고맙다며 꼭 인사를 건넸다. 조금은 낯간지러울 법한 그 인사가 뭐라고 사람 기분을 조금씩 들뜨게 했다. 



그 이후에도 선이 뉴스나 기사에 대한 내용을 물어볼 때마다 인이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려 노력했던 날이 많았다. 그가 건네는 질문조차 따뜻한 색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이 주말 햇살에 늘어질 때, 인은 선이 건넨 고마움에 늘어지고 싶었다. 인은 저도 햇살을 같이 즐기려는 척 선이 눕고 난 소파 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경 하나로 선의 매력을 하나 더 알게 된 날이었고, 다시 생각해봐도 그날은 평소보다 두 배로 따뜻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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