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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1)

여기서 네가 왜 나와?



"지긋지긋한 두통, 치통, 생리통."

"....... 맞다 게, "

"시끄러워요. 김 실장."

"넵."


은진은 지금 매우 예민했다. 몇 주 전부터 시큰거리던 어금니가 두통을 떼거리로 몰고 왔다. 치과쯤이야 하면서 변호사 사무실 근처 치과를 검색해 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대부분의 일에 점차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치과는 어른이 되어서도 무서운 곳이었다.


"변호사님. 치과 가보시는 게...."

"나도 알아요. 근데 치과는 왜 치과일까요?"

"그건 모르겠는데 오른쪽 볼이 조금 부은 게 보일 정도로 아파 보인다는 건 알겠어요."

"으으. 도대체 충치균은 왜 있는 거야…."


변호사님 이가 단단히 썩은 모양인데. 슬기는 이때까지 은진이 저에게 시켰던 심부름을 떠올렸다. 사탕, 초콜릿, 젤리, 단 음료 등등 참 많이도 먹었더랬다. 물론 저도 같이 맛나게 먹었고 간식은 제가 나서서 먹자고 한 날이 더 많았다.



심지어 은진은 단 음식을 먹고 나서 양치를 바로 하지만, 슬기는 하루 두 번 이빨 닦는 것도 귀찮아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제 이빨은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빨도 엄청 열심히 닦으시던데?


슬기는 같은 직장 동료이자 상사가 저렇게나 아파하는데! 응당 아픈 부분 하나하나도 잘 살펴야 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변호사 사무실 근처 괜찮은 치과를 찾는 슬기의 손가락이 핸드폰 위에서 탭댄스를 추었다. 치과에서 비명을 지를 은진을 떠올리니 괜스레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치과에 오다니. 치과…. 진짜 치과네."


슬기가 강력히 추천해 준 사무실 근처 치과에 도착하니 어린 환자들 보호자의 손을 잡고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내부 인테리어나 대기실에 놓인 책도 아이를 위한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뭐야. 어린이 치과야? 슬기가 알려준 치과는 동네에서 유명한 어린이 치과였다. 데스크에 붙은 휘황찬란한 캐릭터 스티커들이 웃으며 은진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상우 어린이 치과입니다."

"그....... 죄송해요. 일반 치과인 줄 알고 들어왔어요."

"괜찮습니다. 성인 진료도 가능하거든요. 치과 처음 오셨나요?"

"네. 처음입니다."

"그러면 여기 빈칸 모두 작성해주시고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오셨을까요?"

"오른쪽 어금니가 쿡쿡 찌르듯 아파서 왔어요. 점점 붓기도 하고요."

"네. 접수되셨고요. 추가로 간단한 진료 설문지 작성 후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친절한 안내를 받은 은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대기실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소파 맞은편에는 1인용 아이 전용 소파도 여럿 놓여 있었고, 뒤편에는 작은 놀이방도 있었다.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다가도 진료실 안쪽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뛰던 다리에 제동을 걸곤 했다.


동네에서 유명한 치과라더니 대기시간이 꽤 길었다. 진료에 앞서 간단한 엑스레이 사진을 먼저 촬영했다. 그리고 다시 지겨운 대기시간이 시작되었다. 옆에 앉아있던 아이가 놓고 간 동화책을 슬쩍 들춰보았다. 요즘 동화책은 이렇게 나오는구나. 은진은 저도 모르게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김은진 님. 제1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동심에 빠져 동화책 몇 개를 훑어보던 은진이 부름을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긴장을 가다듬고 진료실에 노크한 후 문을 열었다. 진료실 안에는 마스크를 쓴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성함 한 번만 더 확인할게요."

"네. 안녕하세요. 김은진입니다."

"네. 김은진…. 님이시군요.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87년 12월 25일생이요."

"네. 오른쪽 이가 불편하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어디 한 번 볼까요?"


은진은 베드에 누우며 몇 주 동안 겪었던 시큰거림과 통증, 붓기 등의 증상을 말했다. 초록색 천이 눈 앞을 가리자 의사가 입안 양쪽을 살펴보았다.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나는 천이 덮였음에도 조금 무서웠던 은진은 살며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오른쪽 어금니 하나가 많이 썩으셨고, 그 옆에 이도 조금 썩었네요."

"두 개나요…."

"네. 많이 썩은 어금니 하나가 조금 깨져있는데 그 사이로 충치가 생긴 것 같아요."

"이빨이 깨졌어요?!"

"네. 이빨이 깨지고 앞니도 조금 상해있네요. 혹시 딱딱한 사탕 같은 거 자주 씹어 드셨어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감이죠. 감…. 아이들도 비슷한 이유로 많이 오거든요."

"아이들…. 네에……."


아이들과 비슷한 이유로 치과에 오게 된 은진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어린이 치과임에도 불구하고 제 작은 키 때문에 어린이 치과 베드가 전혀 작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진료실을 지나오면서 성인 베드도 보이길래 안심했는데, 제1 진료실은 어린이 베드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은진은 매일 달고 살던 사탕도 모자라, 어린이 치과 베드에까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조금 썩은 이는 긁어내고 간단히 씌우면 되는데, 많이 썩은 하나는 신경치료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신경치료는 4번 정도 나눠서 할 예정입니다."

"신경치료요? 그거 엄청 아프다고 하던데."

"음. 경우마다 달라요. 안 아픈 경우도 있긴 한데 환자분은 좀 아프실 수도 있겠네요."

"네에……."

"최대한 안 아프게 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간단한 밑 작업만 할게요. 혹시 무서우시면 든든한 친구로 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은진은 문득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치과에서 ‘아프다.’고 하면 ‘너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라던데. 은진은 실시간으로 헬게이트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도 엄살이 심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은진은 울기 직전이었다. 얼마나 심각한지만 알아보려고 잠깐 업무 중에 들른 거라서 다음에 온다고 할까? 은진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변명을 해보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그러면 당장 치과를 벗어날 수 있어도 충치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의사는 마스크 너머로도 환하게 웃는 게 보일 정도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악마의 웃음이 따로 없었다. 의사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뽀로로와 친구들이 걱정하지 말라는 눈웃음과 든든한 손짓을 보냈다. 몇 분 뒤 은진은 크롱이를 꼭 붙들고 진료를 받았다.


"마취는 조금 있으면 풀릴 거고요. 다음 진료 예약 잡고 가세요."

".... 느에."

"그리고 혹시 밤에 좀 아프실 수도 있으니 진통제도 같이 처방해 드릴게요."

"느에. 금스흐니드."

"빈속에 먹으면 속 쓰릴 수 있으니 꼭 조금이라도 식사 챙기신 후에 드세요."

"그…. 느에."

"……. 아니면 위장 보호하는 약도 같이 넣어드릴까요?"

"느에!"


은진은 어린이 치과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은진은 위장이 약해 약을 지을 때마다 위장이 약하다는 말을 덧붙여 추가 위장약을 받았는데, 오늘은 마취 때문에 어눌한 발음으로 그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다행히 세심히 챙겨준 의사 덕분에 위장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엄살이 많은 저를 잘 달래며 진료한 의사에게 굉장한 믿음이 생겼다.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치료를 받았지만, 나긋나긋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긴장도 조금 풀렸었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에 오랜만에 보살핌을 받는 기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치과를 추천한 슬기에게 줄 마카롱과 커피를 사고, 한 끼 정도는 부드러운 식사를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죽도 하나 샀다. 양손 가득 묵직하게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치과로 향할 때 무거운 발걸음과는 달리,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이대로라면 신경치료도 아무 탈 없이 잘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그리 쉽던가. 은진은 두 번째 신경치료를 받으러 간 날, 첫날의 예감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치료가 너무 아팠던 걸까? 아니, 치료 자체가 문제였던 건 아니었다. 문제는 진료실에 들어서면서 본 의사의 얼굴이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은진은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제1 진료실 문을 열었다. 의사에게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려던 찰나, 은진은 제가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안녕하세요. 선,"

"……."

"어?"

"그…. 네가 나인 줄 모르는 거 같길래, 미리 마스크 쓰고 있으려고 했는데……. 예약 시간보다 일찍 왔네."

"......!"

".... 안녕? 우선 앉, 앉을래?"


왜 간과했을까.

상우 어린이 치과.

은진을 담당하고 있던 치과의사는 한때 제가 열렬히 사랑했지만,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진 전 남자 친구 박상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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