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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2)

결혼까지 한 사람을 이제 와 뭘 어쩔 건데.



누구나 한 번 즈음은 해보는 생각. 전 애인을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은진도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지만, 단언컨대 그중에 치과는 없었다. 게다가 제 주치의로 앉아있는 상상은 더더욱. 은진은 잠시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우선 앉으라는 상우의 말을 듣고 나서도 멍하니 진료실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상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은진의 왼쪽 소매 끝을 살짝 잡아끌었다. 아직도 멍하니 상우의 얼굴만 바라보던 은진은 일단 베드에 앉았다. 상우는 사실 환자가 아는 지인이라며, 간호사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 주길 부탁했다. 일말의 과정이 끝나고 진료실에 둘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은진은 아직도 아무 말 없이 베드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놀랐을 거 알아. 나도 그랬었어. 근데 일단은…. 우리가 만나려고 해서 만난 것도 아니었고, 아파서 치료받으러 온 거잖아. 그리고 너 이빨 상태가 바로 치료 들어가야 했어."

"……."

"일단 나한테 치료받는 게 불편하다면 다른 선생님으로 바꿔줄게. 지금 밑 작업만 해 놓은 상태니까 오늘 바로,"

"안녕이라고."

"어?"

"안녕이라는 말이 나오나 봐. 넌."

"…….”

"나는 절대로 못 할 것 같은데."


은진은 속에서 온갖 감정이 들끓는 중이었다. 반가움, 서러움, 그리고 증오까지. 과연 이걸 애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풋풋하던 대학생 시절, 사귀다가 갑자기 돌연 제가 지겨워졌다며 이별 통보를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였다. 그때는 잡으려 해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10년이 지난 지금 태연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 은진아."

"그렇게 부르지 마. 아니, 부르지 마세요. 선생님."

"……. 그래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그리고 저 진료하시는 선생님 바꿔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아니요. 오신 김에 다른 선생님께 진료받고 가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요."

"기분이 그런 건 이해하는데 치료는 기분 따라 받는 게 아니에요. 환자분."


환자분. 은진은 제가 요구했던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이게 맞는 거였는데. 분명 맞는데. 칼 같은 호칭에 서운해하는 저를 애써 모른 척했다. 뒤이어 상우는 철저히 담당 의사로서 은진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지금 환자분 이빨 상태가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구멍을 뚫어놓은 상태여서 신경치료 빨리 받으셔야 해요. 신경치료는 자칫 시기를 놓치면 이빨 전체를 뽑을 수도 있어요."

"……."

"오늘 치료받기 위해서 시간 비워두신 거면 다른 선생님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시간 내신 김에 치료는 받고 가셔야죠."

"…. 네. 그럼 다른 선생님께 치료받고 가겠습니다."

"대기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바로 담당 선생님 바꿔드릴게요."

"네."

"그리고…. 약 드시고 속은 안 쓰리셨어요?"


은진은 이제야 첫 진료 때에 상우가 했던 말들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제 환자가 사탕을 씹어먹는 버릇이 있다는 걸 익히 잘 알면서 태연히 물어보다니. 항상 사탕을 씹어먹고 끔찍하게 달달한 음료를 물고 살던 은진에게 잔소리하던 상우였다. 그러다 이빨 상한다는 잔소리를 하면, 은진은 치대생 티 내느냐며 상우의 잔소리를 뒷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왜 진통제에 위장약을 추가 처방했는지 알게 되자 헛웃음이 나올뻔했다. 사귀었을 당시에도 종종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속이 쓰려 고생을 하면 항상 같이 있어 주었던 이가 그였으니까. 은진이 위가 약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상우였다. 이러한 사소한 부분까지 알고 있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여야 했다.


"그런 거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제 처방이라 의사로선 신경을 안 쓸 수 없는 부분이라서요."

"…. 안 쓰렸어요. 약은 모두 정해주신 대로 먹었고요."

"알겠습니다. 대기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른 진료실에서 치료받으실 수 있게 담당 선생님 바꿔드릴게요."


진료실 문이 닫히자 상우는 제 책상 위에 풀썩 엎드렸다. 마지막에는 제가 봐도 좀 비겁했다. 의사 처방이라는 단어로 변명을 하다니. 대학교 시험 때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위장약을 달고 살던 은진을 생각하면 걱정을 안 할려야 안 할 수 없었다. 상우는 모든 치료가 끝날 때까지 안 들킨 채 치료를 마치고 싶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은진은 아팠고, 저는 아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의사였을 뿐이니까. 이렇게 자기합리화하며 혼자 외줄 타기를 견뎌내고 싶었다. 모두 헛된 희망이었지만.


상우는 다시 비척비척 상체를 세워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환자가 담당 의사 교체를 요청했기에 저는 응당 그에 맞는 대처를 해야 했다. 담당 의사를 바꾸기 위해 옆 진료실에 있는 선생님께 부탁하러 가면서도, 상우의 머릿속은 온통 은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상우는 지금이라도 당장 은진이 있을 대기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첫 진료 날부터 은진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상우를 매섭게 째려보고 있었다.


'승철이 형이랑 약혼 얘기가 오가더니 결국 결혼을 했구나....... 잘됐네. 그 형이 지금 검사로 있던가.'


상우는 그때의 이별이 서로에게 최선이라 생각하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지웠다. 대기실로 가서 뭘 어쩌려고? 지금은 결혼까지 한 사람을 이제 와 뭘 어쩔 건데. 여전히 자신은 그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옛 애인으로 남는 게 최선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던 은진은 갑자기 불어닥친 상황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매몰차게 떠났던 사람을 그렇게 증오했으면서 다시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움과 서러움이 앞섰다. 왜. 도대체 왜 갑자기 날 버렸느냐고 고래고래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는 길거리나 시끄러운 카페가 아닌 상우의 직장이었다. 그것도 어린이 치과. 은진은 성인이 가진 직장의 의미를 잘 알기에 주먹을 꼭 쥐고 감정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서로 멋들어진 '사'자 직업을 가진 은진과 상우였다. 익숙하게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임에도 서로의 앞에서는 꼭 초짜처럼 허둥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로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은 풋풋하던 대학생이었으니까.








은진과 상우가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은진은 문과, 상우는 이과였기에 반도 달랐고 서로 가고자 하는 길도 달랐다. 의외의 접점은 서로의 친구에게 있었다. 은진의 친구와 상우의 친구가 서로 어렸을 때부터 알던 동네 친구였다. 그러다 보니 은진과 상우는 친구들을 통해 지나가다 아는 애 정도에 그쳤었다. 가끔 지나가다 어색하게 안녕 정도를 나누는 게 최선인 사이. 고로 고등학교 졸업 후 은진과 상우는 서로 전혀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연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싶던 은진은 재즈 동아리에 입부신청서를 제출했다. 은진은 클래식과 재즈를 즐겨 들으시는 부모님 덕에 자연스레 재즈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재즈의 종류나 이론 또는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한 편이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아가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에 들어갔던 동아리였다.


은진과 다르게 상우는 어렸을 때부터 재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친구가 대중가요와 아이돌에 미쳐갈 때, 상우는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연주나 공연을 즐겼다. 알면 알수록 재즈가 주는 그 오묘한 매력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상우는 더 많은 사람과 재즈를 즐기고자 재즈 동아리에 들어오게 되었고,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 안녕. 너 걔…. 맞지? 나 기억나?”

“어어. 안녕……. 너도 이 대학 왔어?”

“응. 혹시 너도 재즈 동아리 들었니?”

“응.”

“……. 그렇구나.”


처음에는 서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의 친구라서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주변에서는 고등학교 동창이니 서로 잘 알지? 라며 짝을 붙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으레 연애사가 그러하듯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는 서로 감정을 나누는 사이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동창들은 둘이 사귄다는 사실을 몰랐다. 전공 건물마저 학교 끝과 끝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서로 같이 아는 동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학 동기들은 둘을 볼 때면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었냐며 하나같이 신기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우와 은진의 공통점은 거의 재즈 하나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서로 극명히 다른 성격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법대생과 치대생.

야행성 인간과 아침형 인간.

쾌활하게 방방 뜨는 성격과 차분한 성격.

약간의 결정장애가 있는 타입과 한번 결정하면 불도저처럼 밀어버리는 타입.

과제를 한꺼번에 집중해서 끝내는 타입과 과제를 작게 나누어 천천히 하는 타입.

화가 나면 바로 얘기를 해야 하는 타입과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타입.


이처럼 서로의 성향도 달랐지만, 집안 분위기나 생활방식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은진의 집안은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집안의 명예와 부에 관해서는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은진은 본가가 학교에서 차로 20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을 따로 잡아 자취했다. 먼저 대학을 나온 친척 대부분이 본가가 가깝더라도 학업에 열중하고 싶다며, 학교 근처 오피스텔에서 자취했었다. 그걸 보고 자라온 은진에게 독립된 생활은 당연한 처사였다.


반면 상우의 집은 화목한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명예나 부에 관심이 크게 관심이 없었다. 상우는 그저 집안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걸맞게 4년제 장학금을 받아 치대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대중교통으로 40분 정도 걸리는 본가에서 통학했고, 부모님에게 월마다 용돈을 받아 쓰는 그야말로 정말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둘은 남 부럽지 않은 연애를 했다. 상우와 은진은 서로 미래를 그리며 평생을 함께하고자 약속했다. 누군가가 보면 어린 날의 치기로 여길 터였지만, 모든 커플이 그러하듯 그때의 상우와 은진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서로를 향한 진심만 있다면 방해물 따위 없을 거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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