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3)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속도마저 달랐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영원을 약속하던 상우와 은진은 대학을 졸업할 즈음 헤어졌다. 헤어질 당시에도 둘의 애정전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딱 하나, 은진의 집안에서 둘을 마냥 예쁘게만 보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상우는 사귄 지 얼마 안 되어서 은진의 집에서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알게 되었다. 은진을 자취방 앞에 데려다주며 딱 한 번 은진의 아버지를 마주한 게 다였지만, 첫 만남에서 그 분위기를 모두 알 수 있었다. 


“우리 은진이랑 만나는 친구인가?”

“네. 안녕하세요. 박상우라고 합니다.”

“그래요…. 은진이 집 앞에는 무슨 일로?”

“아빠!”

“동아리가 늦게 끝나서 은진이 데려다주는 길이었습니다.”

“고마워요. 학생. 우리 은진이 신경 써줘서.”

“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만나고, 결혼은 집안이 만난다더니 그 고지식한 말을 새삼 실감했다. 그 뒤로 재즈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하는 경환을 통해 은진이 대학생임에도 집안끼리의 결혼 얘기가 오가는 걸 알았다. 경환의 집 또한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경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한 번 오갔다는 것이다. 경환은 어른들의 이야기가 끔찍하다며 웃어넘겼지만, 상우는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아 보이는데, 자꾸 어딘가 많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은진은 집안에서 결혼 얘기가 오간다는 얘기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우도 모른 척 넘겨버렸다. 은진이 부모들끼리 정한 약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게 저를 위한 행동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상우는 그럴수록 더욱 은진에게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은진과 상우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경환이 갑자기 아직 은진과 잘 만나고 있느냐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잘 만나고 있다고 했더니 경환은 머뭇대며 대답했다.


“은진이네랑…. 승철이 형네 가족끼리 만나서 밥 먹었다고 하더라.”

“……. 말 해줘서 고맙다.”


아. 여기 까지구나.

외면해 온 현실이 눈앞에 닥쳐오자 한없이 가라앉았다. 상우는 아직 대학생인 은진과 제가 어른들의 뜻을 더 버텨봤자 모두를 힘들게 할 뿐이라 생각했다. 분명 서로가 좋아 손을 맞잡고 있는데도, 상우의 사랑은 본인의 욕심일 뿐이고 은진을 가로막는 역할밖에 못 하는 듯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상우는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제가 먼저 손을 놓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 단정 지었다.


“은진아.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

“아냐. 너도 막 학기 고생 많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헤어지자.”

“뭐?”

“이제 시험공부 해야 하는데 연애 놀음은 그만해야지.”


막 학기가 끝나자마자 상우는 기다렸다는 듯 은진에게 헤어지자 통보했다. 갑자기 왜 이러냐는 은진에게 이만하면 오래 만나지 않았느냐며 마음에도 없는 독한 말을 쏟아냈다. 그 이후로 집으로 쏟아지는 모든 연락을 피했다. 더불어 동아리 사람들의 연락도 전부 끊었다. 어찌 보면 혼자 사회를 벗어나 도피를 한 셈이었다.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은 은진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왜일까.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위장이 약해 술을 즐기지 않던 은진이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워 다른 정신이라도 깨워보았다. 무의식 속에서도 답은 찾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다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주변의 위로를 모조리 쳐내고 한없이 몸을 혹사 시켰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했을까. 은진이 마지막으로 응급실에 실려 오던 날, 그는 응급실 베드에 누워서 얇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너는 진짜 그냥 내가 지겨웠구나.

나 혼자 괜히 눈치 없이 굴었구나.

그냥 나만 잊으면 되는 거였어.


그 길로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은진은 사법고시에 매진했다. 낮에는 애초에 상우라는 사람은 없었고, 저는 사법고시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공부만 했다. 반대로 밤에는 주변에서 간간이 전해오는 위로의 말을 싹싹 끌어모아 이불 위에 퍼질러 놓았다. 그사이에 파묻히니 따뜻한 글자들이 은진을 감싸 안았다. 원치 않은 따뜻함에 매일 울다 잠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힌다고 했다.

모두 시간이 약이라 하였다.

그 시간이 얼만큼인데?

그건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속도마저 달랐다.

그렇게 서로 다른 속도로 우리 연애 소설은 끝이 났다.


그렇게 속을 태우고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가며 잊은 상우였다. 그런데 이제 와 태연하게 얼굴을 들이는 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상우는 옛사랑 놀음 따위 잊은 지 오래인데 아직도 저만 그 감정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내내 색이 바랜 사랑이 휘몰아쳤다. 태풍 밖으로 벗어나고 싶은 몸과 태풍의 눈을 잡은 마음이 치열하게 싸웠다. 치료를 받고 나올 때 즈음엔 마음이 승기를 높이 치들었다. 옛사랑에 온몸이 긁혔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해서 싫었다.









"변호사님."

"......."

"김 변호사님!"

"네!.... 무슨 일이에요."

"저 말고 변호사님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있다마다. 은진은 저를 자꾸 시험에 들게 만드는 상황에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나머지 세 번의 치료를 받으러 상우가 있는 치과에 가면서 혹시 마주칠까 매일 마음 졸였다. 다행히 치료가 모두 끝날 때까지 상우를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서러운 마음이 몰려와 비참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데 김은진? 미쳤나 봐 진짜. 치과 치료가 2주 전에 끝났음에도 은진은 아직 상우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나면 잊혀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네?"

"사람마다 잊히는 시간이 다르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뭘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을 전 믿어요. 그럼. 이과생이 발표한 결과인걸요. 그렇죠?"

".... 갑자기 이과생이요?"

"아! 이과생도 싫어. 다 싫어!"


슬기는 혼자 널뛰는 은진을 보며 사탕 금단현상이 이렇게 사람을 망가뜨린다고 오해했다. 치과 치료가 다 끝났으니 이제 무설탕 사탕이나 부드러운 젤리 종류를 좀 사다 드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번 기회에 간식을 끊어보겠다는 은진의 결심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치과에 갈 때마다 죽상이었던 얼굴을 떠올렸다. 신경치료가 엄청나게 힘들었으리라 으레 짐작했다.


"하....... 일하자. 일. 슬기 씨. 이 사건 자료 넘어왔어요?"

"어.... 네. 여기요."

"네. 고마워요. 그럼 우리 남은 시간 열심히 일해볼까요! 오늘 이 사건 말고 다른 일 더 없죠?"

"네. 그리고.... 오늘 개인 일정 있으시네요. 동창회? 라고 알려주셨어요."


힘차게 일을 시작하려던 은진은 또다시 암울해졌다. 지금 이 시점에 동창회? 동창회에에? 은진이 기억하는 동창회는 고등학교 동창회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고등학생 당시 절친한 친구였던 성희가 말하길, 일 핑계로 계속 안 나오는데 이번에도 불참하면 사무실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했던 무시무시한 동창회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약속이 은진을 새하얗게 재로 만들었다.


"그게 오늘이에요?"

"네. 오늘 저녁 8시라고 알려주셨는데 취소되셨어요?"

"아니요."

"아! 여기 그 동창회 아니에요? 매번 안 나가다가 친구분이 이번에 안 나오면 사무실 폭파해버릴 거라고 했던 동창회요."

"역시 우리 슬기 실장 기억력이 짱짱해서 내가 아주 듬직해요. 고마워요. 상기시켜줘서."

"뭘요. 그리고 그 친구분 지금 전화 오는 거 같은데요."


은진은 슬쩍 고개를 내려 책상 위에서 힘차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최성희라는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분명 오늘 동창회 모임을 다시 상기시키는 전화일 터였다. 은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오늘 빠지면 안 돼! 내가 동창회 잡히자마자 말했다. 분명."

"네네. 안 빠지겠습니다."

"진짜지? 나 이따가 퇴근하고 네 사무실 들러서 같이 갈 거야."

"그래. 그 혹시,"


은진은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회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상우는 은진의 반 아이들과 꽤 많이 친한 편이었다. 창호와 친구라는 핑계로 매일 눌러앉아 있더니, 어느새 반 남자아이들 대부분과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매우 사소한 부분이지만, 지금은 상우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근처에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 뭐. 안 돼."

"뭔지 알고 안 된대. 너 박상우 기억하니?"

"박상우? 아…. 그 누구지. 창호 친구?"

"어어! 걔! 네 동네 친구의 친구. 걔가 오진 않겠지?"

"상우라는 애가 우리 반 애들이랑 친하긴 했지만, 설마 여길 오진 않겠지."

"그렇지?"

"그럼. 반 동창회인데. 근데 걔는 왜? 아, 그러고 보니 너 걔랑 같은 대학 가지 않았어?"

"어? 그랬어? 난 잘 모르겠는데."

"그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일단 나 이따가 7시에 퇴근하고 네 사무실 갈 거야! 기다려!"


전화를 끊은 은진은 제가 너무 상우 일에 과민반응하는 것 같았다. 하하하. 설마 오겠어. 은진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자신을 다독이며 슬기가 넘겨준 자료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흘끗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7시 이전까지 잡아놓은 일정을 모두 끝내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은진은 금세 사건에 집중하며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김은진! 네가 동창회에 다 나오고. 별일이다."

"미안. 바빴어."

"야. 여기 안 바쁜 직장인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한 잔 받아."

"오냐. 맥주로 따라봐라."


은진은 오랜만에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십여 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만난 동창들이 매우 반가웠다. 천방지축 고등학생은 어디 가고 때가 많이 탄 사회인의 모습으로 마주한 게 신기하기도 했다. 여기저기 술이 오가며 서로의 근황을 가감 없이 주고받았다.  


"야! 김은진. 너 그새 결혼했어?"

"응? 아니. 나 결혼 안 했는데. 씁. 누구야? 누가 나 결혼했다고 했어!"

"너 그거 결혼반지 아니야?"

"반지? 아. 이거?"


은진은 제 왼손을 바라보고 멋쩍게 웃었다. 일을 시작할 즈음부터 꼈던 반지는 세월의 흔적이 조금씩 묻어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성희가 큰 소리로 한탄했다.


"말도 말아라. 얘 집안이나 의뢰인들한테서 선 자리 들어오는 거 귀찮아서 일부러 결혼반지 스타일 찾아 끼신 반지란다."

"야. 네가 겪어봐. 부모님이 그러는 건 그러려니 넘기겠는데 아…. 의뢰인들이 자기 자식이 그렇게 잘나고 멋있다며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하면 얼마나 난처한 줄 알아?"

"왜. 진짜 괜찮을 수 있잖아."

"진짜 괜찮든 안 괜찮든. 일로 만난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끼면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데."

"역시 우리 김변. 얘나 지금이나 철벽은 여전하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은진 옆으로 물을 넘겨주던 동창 하나가 바싹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시절 장난이 발동한 듯이 은진의 팔에 팔짱을 끼고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넌 왜 연애를 안 해? 아직 모쏠이야?"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야. 물이나 이리 넘겨."

"너 진짜 모쏠이야? 이야아. 변호사 다 소용없다."

"그게 직업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연애를 일부러 안 할 수도 있는 거지."

"꼭 연애 못 하는 애들이 저렇게 말하더라."


은진은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제 주변에 앉은 동창들이 킬킬거리며 웃자 그냥 저도 킬킬 웃으며 좋게 넘기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애를 놀려. 얘가 왜 모쏠이야. 연애 잘만 했는데."

"오오! 이게 누구야! 박상우! 언제 왔어?"

"지금 방금 왔어. 왜. 내 욕하고 있었어?"


은진은 파드득 떨며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평상복 차림의 상우가 제 뒤에 서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