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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4)

외로운 설렘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은진은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상우는 혼란스러운 은진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상우는 여전히 등 뒤에 서서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다며 얼싸안는 남자아이들을 차례로 물리쳤다.


"너 여기 웬일이야? 우리 반 동창회를 어떻게 알았어?"

"진수 결혼식 때 축의금 못 보낸 게 걸렸는데 창호가 오늘 너희 동창회 한다잖아. 선물이랑 축의금도 전해줄 겸.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오오. 의리.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축의금 얼마나 넣으셨어?"

"묻지 마. 의사라고 돈 다 잘 버는 거 아니야. 나 죽겠다."


각이 잘 잡힌 쇼핑백이 은진의 머리 위로 오갔다. 반대편에 앉은 진수가 고맙다며 선물을 받아 들었다. 진수 때문에 온 거구나. 은진은 착각 속에서 헤매던 제가 괜히 부끄러웠다. 시끌시끌한 주변과 달리 은진은 묵묵히 제 앞 접시에 놓인 소시지를 푹푹 찔렀다.


"아, 그리고 여기 찬희 가게라며?"

"어. 사장님께서 다 공짜로 주긴 힘들고 반값만 내라고 하십니다."

"좋은 사장님이네. 그 좋은 사장님한테 허락 맡고 커피 사 왔어. 다들 하나씩 마셔."


상우는 제 뒤편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빈 테이블에는 테이크 아웃 컵이 가득했다. 이미 배가 부른 동창 몇 명이 커피를 가지러 일어났다. 은진도 배가 부른 지 오래였지만, 제 등 뒤에 있는 상우 때문에 선뜻 일어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저렇게 대량으로 테이크 아웃을 하는 경우, 열에 아홉으로 모두 아메리카노일 확률이 높았다. 위장이 약해 커피를 잘 못 마시는 은진은 컵 더미에 한 번 눈길을 주고는 다시 제 앞에 소시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상우는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옆옆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에 앉은 동창에게 가려져 상우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한결 나았다. 조금 전까지 즐거웠던 은진의 기분이 상우의 등장과 함께 촥 가라앉았다. 들떴던 동창회였음에도 이젠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기 사장님은 돈 많이 버셨대?”

“겨우 2호점 차렸을 뿐입니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만 하겠어요? 개원한 곳은 잘 돼 가?”

“그럭저럭 버티는 거지 뭐.”

“내 친구 니 병원 근처 사는데 평이 좋다던데? 예전부터 애들 그렇게 좋아하더니.”

“야. 그 덕에 버틴다. 애들 울 땐 힘들어도 나중에 아픈 거 낫게 해주면, 나중에서야 고맙긴 한데 자긴 운 게 있어서 쑥쓰러운 거야.”

“어머. 아가가 고맙다고 인사도 해?”

“들어봐. 인사뿐인 줄 알아? 가끔 애가 아끼는 사탕 하나 나한테 쏙 주고 가잖아? 없던 힘도 솟아.”


상우의 자랑 한 마디에 아이를 가진 동창들은 모두 공감하며 손뼉치며 웃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마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십 년 전, 쉬는 시간에 빵 하나 더, 초코우유 하나 더 먹던 친구들은 어느새 아이를 키우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서른 중반 어른이들이 행복 어딘가를 헤맬 즈음, 은진은 아직도 상우를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었다. 반면 상우는 은진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 같이 잔을 들어 건배할 때도 은진의 눈을 마주 보며 웃기까지 했다. 은진도 분위기에 맞춰 어색하게 웃었지만, 곧 다시 안면근육이 딱딱하게 제자리를 잡았다. 


사연 있는 사람처럼 처량하게 있다가, 친구들과 대화를 주고받기를 반복하길 네댓번. 그렇다고 언제까지 웃고 정색하고를 반복할 순 없었다. 신경 쓰지 말자. 괜한 신경 쓰지 말자. 다시 마음을 다잡은 은진은 상우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 다른 동창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야. 너 둘째 임신했다면서?”

“응. 그래도 이번엔 토덧 아니고 먹덧이어서 다행이지 뭐야?”

“그럼. 당연히 먹덧이 더 편하지.”

“근데 어찌 된 게 애들이 중간이 없어. 이번엔 너무 먹어서 탈인 거 같아.”

“먹어! 괜찮아. 산부인과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으면 괜찮은 거야.”

“괜찮아! 여기 옆에서 먹을 거 사다 바칠 이모들 많다?”


정작 애 가진 사람은 걱정이 앞서는데, 옆에서 이모들이 더 난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은진 이모도 빠짐없이 괜찮아! 를 외치며, 친구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더 시켜주었다.


한참을 얘기하며 웃고 즐기던 은진은 슬금슬금 졸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술을 좀 마셨더니 잠드는 술버릇이 조금 더 빨리 기어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안 돼. 정신 차려. 조금 더 있다가 가야 할 분위기에 은진은 잠도 깨고 바람도 쐴 겸 화장실을 다녀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테이크 아웃 컵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제가 마실 수 있는 음료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컵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커피임을 확인한 뒤, 모두 커피라는 걸 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확률이 매우 큰 걸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졸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인다는 핑계를 하나 덧붙였다. 은진은 이대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간, 정말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다.


“역시. 단체 테이크아웃은 아메리카노가 최고지.”


컵을 일일이 열어보지 않아도 컵 근처에 커피 향이 그득했다. 은진이 몽롱한 몸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한 뚜껑에만 작게 무언가 적힌 테이크아웃 컵을 발견했다. 술에 취한 눈으로 힘들게 글씨에 초점을 맞추던 은진은 이내 술이 확 깨버렸다. 컵 위에는 매직으로 작게 ‘그린티 라떼’라고 적혀 있었다. 또 사소한 추억 하나가 은진의 신경을 긁었다. 졸음이 달아난 대신에 속이 싱숭생숭했다. 


커피를 못 마시는 제가 제일 즐겨 마셨던 따뜻한 그린티 라떼였다. 달달하게 시럽 두 펌프 넣은 그린티 라떼는 지금도 은진이 자주 마시는 음료였다. 다른 컵 뚜껑을 둘러보았지만, 이 컵 외에는 글자가 적힌 컵이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 커피 외에 다른 음료를 같이 사 온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컵 뚜껑을 일일이 열었다 닫아도 보았다. 조금의 수고를 더해 테이크아웃 컵 뚜껑을 모두 열어본 결과, 그린티 라떼 외에는 모조리 뜨거운 아메리카노였다. 은진은 저도 모르게 글씨가 적힌 컵을 집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은진은 들고 있던 컵의 뚜껑을 살짝 열어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중에 파는 그린티 라떼보다 훨씬 단맛이 맴돌았다. 컵을 살짝 돌려보았다. 컵홀더로 가려진 부분에 작게 글자가 쓰여있었다.


tea low

syrup +2


외로운 설렘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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