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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5)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라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제 자리에 서서 그린티 라떼를 한 모금 더 넘겼다. 넘길수록 입은 달고 마음은 썼다.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이런 친절 부려서 뭐 하게. 지난날의 서러움이 술과 함께 섞이기 시작했다. 울컥 눈물이 나오려다가도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린티 라떼를 매몰차게 놓아 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마신 몇 모금 라떼를 새 커피 사이에 내려놓을 순 없었다. 달콤한 짐 한 덩이를 하나 가지고 술자리에 돌아왔다. 그린티 라떼를 힐끗 쳐다보곤 팔꿈치로 조금 밀어 두었다. 지금은 라떼보다는 술이 더 고팠다.


"야, 나도 소맥 한 잔 말아줘."

"웬일이야? 너 소맥 마셔도 괜찮아?"

"한두 잔 정도는 괜찮아."


사실 은진은 여러모로 괜찮지 않았다. 처음에 기분이 좋아 넙죽넙죽 받아먹었더니 이미 한계치까지 마신 상태였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겉으로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이성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야. 미안해 간아. 사죄는 내일 할게.


소맥이 가득 채워진 잔이 제 앞에 놓였다. 망설임 없이 속으로 들이부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은진이 원샷을 하자 주변의 환호성이 들렸다. 신이 난 동기 한 명이 또 소맥을 가득 따라 은진에게 내밀었다. 자동화 기계처럼 망설임 없이 입으로 부으려던 순간, 조금 더 큼지막한 손이 잔을 가로챘다.


"환자분. 신경 치료받으신 지 얼마 안 돼서 달리시면 안 돼요."

"환자? 은진아 너 쟤네 치과 갔어?"

"어. 겨우 고쳐 놨다. 그러니까 그만 줘. 의사로서 부탁이야."

"에이, 애가 먹고 싶다는 데 왜 그래. 그럼 한 잔만 더 해!"

"얘 또 이 썩어서 오면 술 준 사람한테 청구서 내민다."

"어떻게 의사들 잔소리는 하나 같이 똑같니. 누가 저 선생님 좀 가시라 그래."


술을 건네준 동기와 상우가 즐거운 티키타카를 이어갔다. 그 가운데서 은진은 점점 화가 났다. 내 술인데 왜 네가 뺏어가. 뭐든 나한테서 그만 뺏어가. 은진은 이미 술에 전 상태였다. 더는 아플까 봐 겁날 일도, 마음이 써서 슬플 일도 없었다. 냉큼 손을 위로 뻗어 소맥이 가득 든 잔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단번에 들이켰다.


"오오! 김은진! 이거 봐! 난 억지로 안 줬다. 얘가 마시겠다고 한 거야."

"그니까! 아, 선생님은 좀 저리 가세요. 야. 한 잔 더 줘 봐아!"

"나도 더 주고 싶은데 넌 진짜 더 마시면 안 되겠다. 너 많이 취해 보여."

"왜에! 더 마시겠다는 데에!"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거 다 마시고 이따가 또 술 마시자."


옆에 앉은 성희가 은진을 말렸다. 은진은 얌전히 성희가 쥐여 준 그린티 라떼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재차 이거만 다 마시면 또 술 줄 거냐고 물었다. 성희는 그때마다 이거 다 마시면 술 줄 거라며 어르고 달랬다.


술잔을 뺏긴 상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은진을 내려다봤다. 그러면서도 제가 사 온 그린티 라떼가 주인에게 온전히 전달된 모습에 안도했다. 혼자 오버하는 게 아닐까, 행여 괜한 친절에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커피를 사면서도 한참을 고민하다 사 온 그린티 라떼였다. 10년 만에 전달된 라떼는 아직도 식지 않고 따뜻했다.








어느덧 술자리가 자정을 넘겼다. 가정을 꾸린 동기 몇 명은 이미 집으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귀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 금요일 밤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남은 사람끼리 가게를 같이 정리하고 나왔다. 2차를 가기 위해 맛집을 검색하는 데 상우가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끼리 가. 나는 내일 또 출근이기도 하고 너희 반도 아니잖아."

"야. 동창은 다 동창이지. 그리고 남은 애 중에 너 모르는 애 거의 없어."

"그래도. 나 내일 출근 때문에 그래. 잘 놀다 들어가."

"내일 출근만 아니면 안 보내는 건데……. 내가 출근 때문에 보낸다. 잘 들어가고."


서로가 아쉬운 듯이 인사를 나눴다. 몇몇은 바뀐 번호를 주고받기도 했다. 상우는 주차장으로, 다른 사람들은 2차 술집으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술에 전 은진을 업고 있던 창호가 상우를 붙잡았다.


"야. 너 차 가져왔다고 했지."

"어. 왜?"

"그럼 얘 좀 데려가. 성희야. 얘 집이 성수동이라고 했지?"


상우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성수동이면 제집으로 가는 길이니 상관없었지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데려다주는 사람이 은진이면 얘기가 달랐다. 저렇게 술에 절어있는 애가 제 발로 집에 올라갈 일은 없으니, 분명 상우가 업어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집에 있을 남편이나 가족이 좋게 볼 수 없는 광경일 게 뻔했다. 행여나 이후에 제가 전 남자 친구였던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막장으로 치달을 터였다.


"싫어. 나도 술 마셔서 취한 사람 데려다주기 힘들어."

"그럼 정신도 못 차리는 애 혼자 택시를 태워 보내? 가는 길인데 그냥 좀 데려가."

"아…. 진짜."


상우는 창호 등에 업힌 은진을 슬쩍 들여다봤다. 상우의 속과 다르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 은진이 한 번 잠들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타입임을 익히 잘 알기 때문에 상우 혼자 소리 없는 절규를 외쳤다. 망설이는 사이 창호가 축 처진 은진을 상우에게 넘겼다. 엉겁결에 은진을 넘겨받은 상우는 마지못해 은진을 등에 업었다. 등 너머에서 술 냄새가 훅 올라왔다.


"그럼 주차장까지만 같이 가서 애 눕히는 거만 도와줘."

"그래.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가자."


성희와 창호는 다른 동창들에게 먼저 가 있으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상우보다 앞장서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상우는 은진을 고쳐 업으며 둘을 뒤따라갔다. 먹자골목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공영주차장까지 걸어야 했다. 5분 남짓한 짧은 거리이지만 상우는 괜스레 옛 기분이 났다가도, 결혼한 상대에게는 굉장히 실례되는 일임을 알기에 얼른 제정신을 붙잡았다.


먹자골목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로변으로 나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바로 공영주차장이었다.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며 걷는 성희와 창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수다가 끊기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바닥만 보며 따라 걷던 상우의 등 뒤에서 별안간 큰소리가 났다.


"야아아! 저리 가!"

"깜짝이야. 얘가 뭐라는 거야? 왜?"


놀란 성희가 은진을 다독였다. 걷던 걸음을 멈춰 서니 은진은 졸린 눈만 끔벅거린 채 정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잠꼬대인 듯싶어 계속 걸으려던 찰나 은진이 더 크게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잠든 줄 알았던 은진은 횡단보도 근처에 있는 꽃 가판대를 가리키며 질색했다.


"꼬까루 알르르기 이써! 쩌기 안 가!"

"너 꽃가루 알레르기 생겼어? 원래 없었잖아. 별일이네. 그래. 저기 다른 횡단보도로 돌아갈게."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른 횡단보도가 있어 돌아가는 길이 멀지 않았다. 성희와 창호는 기꺼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동네 친구 둘이 먼저 발길을 돌려 다른 횡단보도로 방향으로 걸어갔다. 창호가 우뚝 서서 따라오지 않는 상우를 불렀다.


"상우야! 뭐 해? 얘 알레르기 있다잖아. 저기 말고 다른 데로 돌아가자."

"어어. 가."


상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부랴부랴 창호 쪽으로 걸어갔다. 안 그래도 시끄럽던 상우의 속이 더 큰 소란을 피웠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은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말에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은진이 아닌 상우였다. 상우가 등에 업힌 은진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 꽃 가판대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었다. 은진이 버럭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은진을 업은 채 계속 콧물을 줄줄 흘릴 뻔했다. 상우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릴까 노심초사했다. 은진을 다시 고쳐 업으며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김은진. 안 자?"

“…….”

“…. 잘도 잔다. 남의 속도 모르고.”


은진은 졸린 와중에도 조용히 상우의 말을 들으려 애썼다. 상우의 등에 업힌 다음부터는 잠들고 싶지 않아서 혼자 잠을 쫓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십 년 전, 꿈에서나 그리던 품이 제 발로 걸어오니 잠들기 너무 아까웠다. 은진은 이대로 영원히 술에 절어있고 싶었다. 그럼 계속 모른 척 업어줄까? 한 마디라도 더 내뱉으면 꿈이 깨질까 봐 눈은 닫고 귀는 열었다. 상우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라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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