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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6)

나는 너만 있으면 됐어.




주차장에 도착한 상우는 은진을 뒷좌석에 고이 누였다. 성희와 창호에게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 대리기사 호출을 눌렀다. 대리기사가 십 분 안에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상우는 차에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조수석에 앉아 기다리자니 뒷좌석에 있는 은진이 신경 쓰였고, 밖에서 기다리자니 날이 너무 추웠다. 조금 더 망설이던 상우는 10분이면 그냥 밖에서 대리기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대리기사가 말한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시린 손을 비비며 뒷좌석에 누운 은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은진이 멀쩡히 앉아있었다. 놀란 상우가 조수석 문을 열고 은진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술은 좀 깼어?"

"어……. 깼어. 여기 어디야?"

"우리 술 먹었던 먹자골목 근처 공영주차장이야. 금방 대리기사님 오실 거야."

"으응."

"주민등록증 뒤져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됐네. 집 주소 말해. 거기 들렀다가 가게."

"됐어. 나 택시 타고 갈 거야."

"여기 택시도 잘 안 잡혀. 너 성수동 산다며. 가는 길이니까 중간에 내려."

"됐다니까? 술 다 깼어. 업느라 수고했다. 간다."


상우는 은진이 저를 불편해하는 모습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졸린 눈을 달고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제게서 떨어지려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남자 동창이 데려다주는 모습이 은진의 가족에게 좋지 않은 모습일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편견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더 컸다. 게다가 이 밤중에 저 추위 속에서 택시가 언제 잡힐 줄 안단 말인가. 은진을 밖에서 떨게 만드는 일보단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게 나을 듯했다.


"왜, 남편이 오해할까 봐 그래?"

"뭐?"

"그냥 동창이 집에 데려다주는 거야. 그것도 대리기사님이 운전한 차로."

"무슨 소리야?"

"뭐가 무슨 소리야. 집 데려다준다고 집. 그냥 집만 데려다주는 게 뭐가 문제라고."


은진은 제가 술이 덜 깬 건 맞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상우는 정말 이상한 말을 던졌다. 결혼하다니? 누가? 남편? 그럼 내가?


"아니. 그거 말고. 남편이라니?"

"너 결혼했잖아. 남편이랑 같이 안 살아?"

"나? 누가 결혼했대?"

"너 그거 결혼반지 아니야?"

"아. 이건,"

"그때 경환이한테 들었어. 승철이 형네 집이랑 얘기 중이라고."

"……."

"뭘 그렇게 진지해. 다 지나간 일 가지고. 야야. 기사님 오셨다. 집에나 가자."


매우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은진의 얼굴이 굳었다. 덕분에 술기운이 모조리 도망갔다. 서승철. 상우와 헤어질 즈음에 집안끼리 약혼을 하느니 마느니 하며 지겹게 들었던 이름이었다. 하도 결혼을 부르짖는 부모님이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멋대로 가족끼리 모여 식사를 하더니, 진짜로 약혼을 진행한다고 하기에 은진이 온 집안을 뒤집었었다. 딸이 불같이 화를 내니 약혼 얘기는 자연스레 사라졌었고. 그때 이후로 이미 기억 저 너머로 밀린 약혼자 이름이 상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대리기사님이 도착하고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자꾸 주소를 묻는 상우에 아파트 단지 이름을 알려주었다. 핸드폰을 몇 번 만지던 기사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차 안은 내비게이션이 친절히 안내하는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기사님은 물론 뒷좌석에 있는 두 명까지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상우는 길 한가운데 서서 은진을 잊으려 애쓰고 있었고, 은진은 길을 잃은 채로 사방을 서성였다.


상우가 약혼 얘기를 알고 있었어? 경환이 걔는 알았으면 알았지. 왜 애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한 거야? 그리고는 제집에 도착할 즈음, 은진은 십 년 만에 상우와 헤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를 알고 나니 이때까지 상우에게 퍼부었던 증오가 그대로 은진에게 돌아왔다. 차라리 그 속에 파묻혀 죽고 싶었다.


"기사님. 여기 한 명 내려주고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대리비는 두 배로 드릴게요."

"아유, 그러면 저야 좋죠."

"김은진. 자? 너희 집 다 왔어. 내려."


은진은 제가 만든 증오 속에서 간신히 올라왔다. 겨우 숨만 쉬고 있는 틈새로 고개를 빠끔 내밀자 울음이 터질 뻔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리기사님에게 오만 원권 한 장을 내밀었다.


"기사님. 죄송해요. 그냥 저희 여기서 같이 내릴게요. 대리비는 더 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대리비는 핸드폰으로 결제가 됐습니다."

"말한 게 있는데 번복하기 죄송해서 그래요. 그냥 받아주세요. 운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올라가세요!"


오만 원권을 받은 대리기사가 혹시나 말을 바꿀까 봐 얼른 돈을 받고 차에서 내렸다. 흥이 난 발걸음 뒤로 싸한 차 한 대와 두 사람이 남아 있었다. 상우는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여기서 차로 이십 분은 더 가야 해. 나도 술 마셨어."

"나랑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잘 자다가 집 다 와서 왜 그래?"

"너 그걸 알고 있었어?"

"뭘."

"승철 씨랑 결혼 얘기 나왔던 거."

"어. 알았어. 근데 이제 와서 그게 뭐가 대수라고 기사님도 보내?"


한 번 더 사실을 확인한 은진은 코트 자락을 꽈악 쥐었다. 아아. 정말 나 때문이었구나. 갈 곳 없는 원망이 다시 은진에게 되돌아왔다. 조수석에서 뒤돌아 은진과 말을 나누던 상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은진을 바라봤다. 술주정이려니 넘긴 상우는 다시 대리기사를 부르기 위해 앱을 켰다.


"연초라 기사님 다시 부르려면 또 한참 기다려야 하잖, "

"나 승철 씨랑 결혼 안 했어."

"그래? 그때 승철이 형이랑 결혼 안 했어도 우선 지금은 결혼했잖니. 네 남편 기다리겠다. 술주정 그만 부리고 얼른 올라가."

"나 안 취했어. 그리고 결혼도 안 했어."

“어...? 그럼 너 반지는.”

“의뢰인들이나 엄마가 자꾸 선보자고 해서 끼고 다니는 거야.”

"나는 꼭…. 결혼반지 같이 생겨서 결혼한 줄 알았지. 오해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얼른 각자 집에 가자. 난 내일 또 출근해야 하거든?"


상우는 이미 색이 바랜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감을 느꼈지만, 이내 익숙하게 감정을 지웠다. 어떠한 감정이든 서로 다시 감정이 생겨 좋을 게 없는 사이라 생각했다.


"나....... 때문이었어?"

"뭐가?"

"우리가 헤어진 게. 나 때문이었냐고."

"김은진. 일단, 오늘 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자고 내일 술 깨면,"

"뭘 물어봤으면 대답 좀 해줘!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아직 술인 덜 깬 은진이 괜히 술에 취해 옛 기억에 잠시 흔들리는 것뿐이라 여겼다. 상우는 단순한 은진의 술주정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나마 은진보다 술을 덜 마신 상우는 괜한 말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이성을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은진의 발밑에서 흘러나온 기억이 상우의 발치에 닿아 같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맞…. 아니. 꼭 네 약혼 얘기 때문은 아냐. 그냥, "

"그냥 뭐."

"그냥 그때 모든 상황이 싫었어. 너희 부모님이 나 싫어하시는 거 뻔히 알았고, 선보게 하러 다니는 것도 알았어.”

“왜 말 안 했어?”

“근데 난 거기서 아무 말도 못 해. 왜? 난 그 사이에서 철저하게 제3 자였고, 내가 부모였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희 부모님 입장 충분히 이해하니까."

"미쳤어? 그걸 어떻게 이해해?"

"왜 이해를 못 해. 제3자 관점에서 바라봐도 답이 나오는데. 승철이 형네 집안도 판검사 많잖아. 그럼 너도 일하기 훨씬 수월할 거고, 그에 따른 부나 명예 자체가 달라지는데 그걸 왜 몰라."


은진은 상우가 하는 말이 이해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 이해를 버리고 널 선택했는데, 넌 왜 이해를 선택했어. 


“그때 당시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


은진은 상우가 생각보다 많이 상처받았다는 걸 알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갓 성인이 된 대학생이 세상을 얼마나 겪어봤다고 상처에 무뎠을까. 무딘 척 하느라 굉장히 애를 썼을 테다. 그 무딘 척 했던 날들을 은진은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너 집안끼리 결혼 얘기 오간다고 했을 때. 그래. 기분 진짜 엿 같았어.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겨우 치대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는 평범한 집 대학생이 판검사 집안 앞에서 뭘 할 수 있겠어."


은진은 저만 아픈 줄 알았다. 하지만 서로가 다른 이유로 아팠었다. 덮어두고 살아온 세월 동안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이제는 둘의 손끝에서 나온 진물도 무릎을 적시기 시작했다. 


상우는 지난 상처를 더 들추고 싶지 않았다. 덮은 채로 십 년을 잘살았으면, 남은 삶도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서로 건드리지 않으면 상처도 아물 테고, 딱지도 나고, 새살도 돋을 터였다. 상우가 다시 은진을 집에 보내기 위해 움직였다.


"한밤중에 왜 청승맞게 과거 얘기야. 김은진. 너 이제 얼른 들어가. 찬 데 오래 나와 있으면 금방 목감기 걸리잖아. 집 가자마자 보일러 켜고,"

"나는,"

"김은진."

"나는 너만 있으면 됐어. 상우야. 있잖아. 나는 너만 있으면……."

"은진아. 아…. 너 진짜 왜 이러냐. 다 끝난 얘기를 왜 다시 꺼내."

"누가 끝났어? 나는 난 아직 안 끝났어."

“야. 김은,”

"왜. 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고 휴학한 다음에 제일 비참했던 게 뭔지 알아? 네가 자취방 하나 홀랑 옮기고 번호 바꾸니까 아예 연락할 길이 없더라."


은진이 무딘 척하기 전에 있었던 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은진이 10년 넘게 참았던 말을 토해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잘 지냈는데 그사이에 뭐가 그렇게 지겨웠냐고.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고작 한 사람이 먼저 손을 놨다고 홀랑 남이 되어버리더라."

"남이 되긴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랬을까. 한참을 생각해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혼자 결론 내린 게 진짜, 진짜 그냥 내가 지겨웠구나. 그냥 끝난 거였어. 그렇게 몇 번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한 달쯤 지나니까 악밖에 안 남더라."


그때 상우도 오히려 더 악착같이 할 일을 찾아 헤맸었다. 상우는 제 감정만 추스르면 될 줄 알았다. 은진에게 상우는 20대 초반의 풋풋한 연애. 딱 그 정도로 금방 스쳐 갈 인연으로 기억될 줄 알았다. 되려 은진이 이렇게 힘들어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남은 약혼자가 있으니 서로 기대면 금방 상처가 나을 거라 여겼다. 오만한 판단이 서로를 갉아먹었다.


"그리고 악쓰면서 다시 일어났어. 보란 듯이 잘나게 성공해서 우연히 너 만나게 되면 당당하려고. 나 이렇게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고. 근데. 그게 나 때문이었어?"

"상황이 그랬던 거지 너 때문이 아니야."

"그 상황이 나 때문에 벌어진 거잖아.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했던 게. 우리가 헤어졌던 게. 모두 다 내 탓, 아니 내 상황 탓이었네."

"은진아.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거 잘 알잖아. 자꾸 왜 그래."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너 미워하는 힘으로 살았고, 그 힘으로 일어났어. 근데 그게 모두 잘못된 방향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나 잊고 살면 되지. 이제 그냥 나 미워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살면 되잖아."


상우는 더 말을 이었다가는 남아있는 제 감정을 들킬 것 같았다. 아까 일어났던 꽃가루 알레르기 해프닝도 술에 취한 은진이 무의식에 내뱉은 말이라며 웃어넘기고 싶었다. 다른 직장인들은 대부분 토요일에 출근하지 않지만, 저는 내일도 병원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얼른 이 자리에서 벗어나 오늘 있었던 기억을 씻어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은진은 무력하게 헤어졌던 그 날처럼 놓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상황을 맞이했지만, 두 번째는 어림도 없었다. 두 사람이 사귀었을 당시 싸웠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 반복되었다. 지금 당장 해결하고자 하는 은진과 잠시 가라앉히고 말하고자 하는 상우의 성격이 판이하게 드러났다. 은진은 어떻게든 버텨보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상우를 바닥으로 확 끌어 내렸다.


"너도 못 하면서 왜 나한테만 하라고 해."

"그럴 리가. 내가 왜 못해? 이때까지 네 생각 없이 잘만 살았어."

"그런 사람이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어?"


은진은 차에 탔을 때부터 보았던 펜던트를 가리켰다. 백미러에 걸린 펜던트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언뜻 보기에 목걸이로 보이는 펜던트는 오백 원짜리 동전 2개 정도를 겹쳐놓은 크기였다. 둘이 사귀었을 당시 커플 아이템으로 처음 맞춘 회중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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