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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Apr 11. 2021

우리 연애 소설의 끝에는 (7)

따라간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과연 달라지는 게 있을까?



상우는 처음 차를 살 때도, 지금 타고 있는 차를 샀을 때도 습관처럼 백미러에 걸어둔 펜던트였다. 가끔 술에 그득히 취한 날에 괜히 한 번 열어보고, 건전지를 갈아주며 혼자 과거 여행하던 펜던트가 이제 와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그가 당황한 사이 은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백미러에 걸린 회중시계를 낚아챘다. 익숙한 듯 곧바로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여전히 시계 뚜껑 안에는 저와 상우가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거 봐. 그대로네. 이건 나도 버렸어. 이걸 왜 가지고 있어?"

"진짜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았어. 있는지도 몰랐어."

"있는지도 몰랐는데 건전지도 십 년 동안 그대로고, 시간도 잘 맞는 기특한 시계네."


속내를 들켜버린 상우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은진이 회중시계 뚜껑을 닫아 상우에게 넘겼다. 시계를 넘기고도 긴 침묵이 흘렀다. 깊은 한숨을 내 쉰 은진이 말을 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는데…. 미안했어. 그런 얘기 듣게 해서."

"은진아. 나 진짜 괜찮아."

"상우야. 지금은 사회 때 잔뜩 먹은 사회인이라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정말, 정말……. 너만 있으면 됐었어."

"......."

"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늦은 밤에 미안해. 이거 대리비 해."

"야, 이런 걸 왜 줘.... 야!"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이 은진은 재빠르게 차에서 내려 아파트 로비로 들어섰다. 상우는 한 손에 은진이 건네준 대리비와 회중시계를 들고 쫓아가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따라간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과연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아파트 로비를 바라보던 상우가 조수석에 다시 앉았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차례인데 대리기사를 부를 기운도 없었다. 젖은 발치가 무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뜬눈으로 은진을 그렸다.


은진은 저를 부르던 상우를 외면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응어리졌던 감정이 결국 둑을 터트렸다. 가방과 코트를 현관 앞에 내팽개친 채 그대로 침실에 들어갔다. 침대에 코를 박고 누웠다. 다시 라떼 위를 걷고 싶어 손으로 시트를 쓸어보았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시트만이 서럽게 울부짖었다.








은진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집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출근한 지 오래였다. 벌써 해가 중천인가 보네. 은진은 으드득거리는 몸을 뒤집어 누웠다. 천장을 보면서 멍때리는 와중에 어디선가 핸드폰이 힘차게 울었다. 밤새 보일러는커녕, 이불도 덮지 않고 잠이 든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 쪽으로 간신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었다.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는 은진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큼큼. 여보세요."

"아, 미안. 깨웠구나. 아니야. 더 자."

"누구…. 으어!"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은진은 냅다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다 이내 자본주의 본능이 살아났다. 안 깨졌지? 뻣뻣한 몸을 냉큼 일으켜 아직 할부가 많이 남은 핸드폰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다행히 핸드폰은 무사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은 무사한 데 아직 저는 무사하지 못했다. 


발신자가 저장되지 않은 번호이지만,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번호 11자리가 떠 있었다. 얘가 왜 전화했지?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2시였다. 황금 같은 토요일이 절반 가까이 날아갔다. 은진은 어제의 흑역사를 생각하면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또 전화를 걸 상우를 알기에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전화를 이어받았다.


"크흠, 뭐야. 왜, 왜 전화했어?"

"해가 중천이어서 지금쯤이면 깨어 있을 줄 알았지. 잠 많은 건 여전하네. 번호도 여전하고."

"뭔데. 왜 뜬금없이 전화야."

"더 빨리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늘 퇴근이 좀 늦었어."

"너 오늘 출근했어?... 오늘 토요일 아니야?"

"상우 어린이 치과는 토요일에도 엽니다. 토요일에 신경 치료받으신 환자분."


은진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저도 마지막 신경치료를 토요일에 받았었다. 오로지 제 기준으로 판단한 게 미안해서 바로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잔소리에 사과가 쏙 들어갔다.


"근데 너 어제 보일러 안 켜고 그냥 잤지. 왜 기침을 해."

"아니? 아침이라 그런 거야.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그냥. 나도 잘한 건 없더라고."

"뭘."

"그때 널 계속 믿었더라면 어제 네가 그렇게 울 일도 없었을 거 같아서."


아까부터 상우는 은진이 콕콕 찔릴만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예전에 잔소리하던 버릇 어디 안 가지. 어느새 다시 상우의 손바닥 위에 얹힌 은진은 애써 억지를 부렸다.


"나 안 울었는데."

"목이 그런데 들어가서 퍽 안 울었겠다. 오늘 토요일인데 뭐 해."

"남이사."

"난 남 이사가 아니고 박 의사예요. 일없으면 해장이나 하자."


상우와 은진의 유일한 공통점은 재즈였지만, 조금 더 범위를 넓힌다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둘 다 술을 먹었든 안 먹었든 해장국을 즐겨 먹는 편이었다. 물론 서로 메뉴가 극명하게 갈려 둘 다 만족스러울 수 있는 해장국집을 찾아 나서는 게 일이긴 했다.


은진도 어제 엄청난 흑역사를 생성하긴 했지만, 오해가 풀린 뒤로 상우와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밥 먹는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조금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제 술도 먹었으니까 당연히 해장은 해야지.


찰나에 자기 합리화를 마친 은진은 한 손으로 얼른 침실 전등 스위치를 찾아 누르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제 모습은 가관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지우지 않은 화장이 엉기성기 눌려있었다. 사귈 당시에도 화장을 잘 하지 않던 은진은 어느 정도 괜찮으면 대충 세수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 모습은 세수로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와. 절대 안 돼. 


"어, 그, 나 지금 일어나서. 조금만 이따가 만나. 너 어딘데."

"새삼스럽게 세수하고 뭐 찍어 바를 생각 말고.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거야."

"메뉴가 뭔데?"

"원래 먹던 대로 너 순댓국. 나 내장탕."


그리웠던 해장국 세트가 눈에 밟혔다. 본의 아니게 두 끼나 건너뛴 속은 배고프다 아우성치고 있었다. 은진은 한 손으로 빠르게 머리를 빗어 내리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뭐. 나쁘진 않네."

"나쁘지 않으면 집 몇 층인지 좀 알려줘. 나 너희 집 주차장이야."


핸드폰 건너편에서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이어 따뜻한 해장국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라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게 돌아오고 있다.


이미 한참 전에 마침표를 찍었던

우리 첫 번째 연애 소설의 끝에는 

작게 정갈한 글씨가 덧대어졌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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