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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Jun 03. 2021

30분 뒤 몽마르트 언덕에서 만나.

비가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꾸륵꾸륵한 구름이 잔뜩 머리 위로 몰려왔다. 일기예보에서는 소나기라고 했는데 쉬이 그칠 비는 아닌 듯했다. 아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제습기를 켰다. 곧이어 거실 한쪽에 늘어놓은 빨래를 확인했다. 건조대 위에 눅눅한 습기가 가득했다. 잘 마르라고 곱게 널어놓았더니 되레 집안의 습기를 다 잡아먹은 것 같았다. 내일 출근 전에 빨래 다시 돌려야겠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주방으로 발을 돌려 작은 양은냄비를 꺼냈다. 정수기 물을 대충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스위치를 돌리니 약간의 가스 냄새와 함께 물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평온한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찬장에서 라면을 꺼냈다. 매번 주말에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재료를 사놓아도, 막상 아침에 일어나면 만사가 귀찮았다. 라면을 뜯고 냄비에 스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빨갛고 평온한 물은 아직 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쿠르르릉. 갑자기 내리친 천둥에 정신이 번쩍 반쯤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라면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손만 정신을 차려 라면을 끓는물에 퐁당 넣었다. 까먹었던 후레이크도 같이 넣곤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꾹 눌렀다. 손끝에 바글거리는 진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주방 안쪽에 작은 창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비 냄새가 라면 냄새와 섞였다. 3분 뒤, 비바람이 섞인 라면이 끓여졌다.


라면 냄비와 김치통을 양손에 들고 자연스럽게 TV 앞에 앉았다. 소파 앞에 털썩 앉아 소파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리모컨을 더듬거렸다. 겨우 닿은 리모컨을 잡아 전원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어제 보다 만 드라마가 재방송하고 있었다. 눈은 티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으로는 라면을 후후 불었다. 코에 뜨거운 김이 닿기도 전에 라면과 같이 입으로 들이마셨다. 콜록콜록. 매번 왜 물 떠오는 걸 잊어버리는 걸까. 라면을 오물거리며 다시 물을 떠 왔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공간에 되려 사람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라면 건더기를 깨끗이 건져 먹고 나니 애매한 배고픔이 남았다. 밥을 먹을까 말까. 냉장고에 남은 밥이 있었나? 몇 번 배를 두들기다가 어제 먹다 남은 치킨이 생각났다. 탄수화물을 먹었으니 단백질도 먹어야지. 기적의 논리가 밥을 건너뛰게 만들었다. 몇 조각 남은 양념치킨을 깨끗이 발라 먹으니 식탁에는 꼭 닭볶음탕을 먹은 듯한 잔해만 남았다.


식탁을 깔끔히 치우고 나니 인제야 핸드폰을 들어 너의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 배경화면에는 언제나 그렇듯 다른 시침과 같은 분침이 규칙적으로 돌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났구나. 벌써 자려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네 번호를 눌렀다. 페이스타임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초조해졌다. 그냥 문자를 남길 걸 그랬나 하는 사이 연결음이 끊어졌다.


"잤어?"

"아니. 아직 안 잤어. 전화할 거 같아서."

"미안. 어제가 마감이어서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괜찮아. 몇 시에 잤어?"

"6시"

"너 그대로 여기와도 되겠다. LA 시차에 적응할 필요 없겠는데?"


달콤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혼이 나는데도 실없이 웃었다. 밥을 먹었냐는 안부 인사에 라면과 치킨을 먹었다 답했더니 세상 부러운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양념치킨을 먹으려면 차로 20분 넘게 가야 한다는 푸념은 덤이었다.


"이제 자야지. 늦었다."

"내일 조금 늦게 나가도 돼서 더 통화해도 돼."

"그러고 또 커피 드럼통으로 들이마시지 말고."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조막만 한 손으로 큰 텀블러를 잡고 마시는데 그럼. 기억에 남지. 그게 몇 밀리라고?"

"710밀리"

"기본 사이즈 딱 2배네. 어휴."


이번에는 나에게 잔소리 턴이 넘어왔다. 이때다 싶어 다음 턴을 넘길 즈음에도 턴을 넘기지 않았다.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가운지, LA 날씨는 어떠한지 등 매번 물었던 것도 다시 물어보았다. 몇 번을 확인해도 볼 수 없으니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거기 날씨는 어때?"

"여긴 비와. 소나기라더니 그칠 것처럼 보이진 않네."

"어! 여기도 비 와! 그럼 오늘 산책하러 가?"

"그러지 뭐. 오늘은 어디로 갈까?"

"음.... 몽마르트 언덕 어때?"

"제3국. 좋지. 그럼 30분 뒤에 몽마르트 언덕에서 봐."

"응. 잘 자. 거기서 봐."


같은 날씨인 날에 우리는 꼭 산책을 나섰다. 어느 날은 런던으로, 어느 날은 싱가폴로. 오늘은 몽마르트 언덕이었다. 서로 비슷한 하늘 아래 누워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누였다. 나는 눅눅한 침대 대신 폭신한 3인용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배는 부르고 전화기 너머에선 서서히 잠드는 네 숨소리가 들렸다. 낮잠 들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내쉬니 조금씩 빗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30분 뒤에는 반가운 얼굴이 몽마르트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다. 엄청나게 큰 텀블러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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