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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팔 Jan 21. 2020

Who am I?

지금 내 모습을 진정한 내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우선 숨부터 크게 한 번 쉬어볼까요?"


"후우...... 그 일이 일어난 다음부터 종일 제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 느낌을 받았군요. 어떤 부분이 이상하던가요?"


"......"


"생각이 안 나시면 생각이 나시는 부분부터 말씀하셔도 돼요. 어떤 부분이 제일 이상했나요?"


"......"


"심진희 님. 그럼... 우리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보는 게 어떨까요? 오늘 오시는 길에 점심은 드시고 오셨어요?"


"네... 점심 먹고 왔어요. 주신 약도 먹었어요."


"그렇군요. 잘하셨어요. 혹시 약 먹고 나서 그때 불편하셨던 증상들이 또 있었던 적 있나요?"


"...... 그게...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동호는 사실을 마주하려 하는 환자를 다독이며 찬찬히 이야기를 곱씹었다. 더듬더듬 말을 이으면서도 입을 꽉 다물 때마다 환자의 눈에서 처절한 절규가 쏟아졌다. 동호는 티슈를 놓아주고는 찬찬히 기다렸다. 환자가 말을 할 때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환자를 이 지경까지 몰아간 범인이 무엇인지 찾아 나섰다.




"오늘도 얘기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말씀하시지 못한 부분은 다음에 얘기해주셔도 돼요."


"...... 네."


"느끼는 바를 모두 얘기해주시면 좋겠지만, 혹여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하게 어떠한 상황에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혹은 오늘 기분이나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뭐든 찬찬히 그대로 얘기해주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 번 실천해보세요."


"네......"




 동호는 환자를 내보낸 후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외상환자의 경우에는 살짝 까진 정도면 드레싱을 하고, 심하게 다쳤으면 검사를 통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제가 맡은 정신과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떤 이유로 다쳤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 치료를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환자가 무의식에서 내뱉은 아픈 말을 들여다보고 치료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제 일이었다.


 동호는 '심진희'라고 쓰여있는 차트를 볼펜 끝으로 몇 번 두들기다 이내 무겁게 덮었다. 환자는 아직 트라우마와 전혀 연관이 없는 일상생활을 말하는 것조차 꺼렸다. 환자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은 원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표면상으로 보이는 불안증세와 불면증 그리고 몇 가지 추가 증세를 더 적은 게 다일 뿐이었다. 환자가 힘겹게 더듬더듬 이어가는 말처럼 차트 기록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환자가 계속 극복하려는 의지를 다지고 병원을 방문해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오늘도 모두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저물어갔다.








 오후 진료까지 끝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찬 바람이 볼을 세게 휩쓸고 지나갔다. 동호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환자들에게 들은 울음을 흘려보냈다. 그래야 내일 또 다른 환자의 울음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저는 항상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익숙한 카페에 들러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수제 밀크티와 동희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샀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양손에 선물을 하나씩 들어 집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와 동희는 거실에 나란히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항상 욕을 하면서도 드라마를 꿋꿋이 시청하는 두 모녀의 모습이 너무 닮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왔어? 어! 그거 내 거지!"


"왔니? 또 뭘 사 왔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밀크티만 사려다가 저게 또 셈 낼 게 뻔해서 동희 케이크도 하나 샀어요."


"뭔데? 뭔데?! 나 치즈나 초코!"


"그래. 치즈다. 가져가. 이건 어머니 드리고. 어머니 저녁에 카페인은 안 좋으니 내일 점심에 드세요."


"그래. 고맙다. 이 카페는 배달되면 좋을 텐데 아직 배달이 안 돼서 항상 안타까워."


"제가 이렇게 사 오면 되죠. 뭘."


"고마워! 오빠 최고!"


"이럴 때만 오빠지. 저 먼저 씻을게요."


"그래. 냉장고에 네가 좋아하는 반찬 가득 넣어놨다. 골라 먹어."


"네."




 동호는 제 방문을 닫고 코트와 목도리를 벗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었다. 윗옷을 벗고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으려는데 별안간 나타난 찬호가 나타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동호가 시계를 풀며 흘끗 거울 너머 찬호를 바라보다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거울에 비치는 찬호의 얼굴에는 이미 성이 가득했다.




"내 건? 넌 왜 나는 항상 신경을 안 써?"


"넌 좋아하지도 않잖아."


"네가 어떻게 알아! 안 좋아해도 갑자기 먹고 싶을 수 있잖아! 일도 못하면서 밥만 축내는 새끼가 하는 일이 그렇지."


"너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내가 밖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알기나 해?"


"내가 알 게 뭐야. 있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죄인가."


"그리고 누가 일을 못 해. 그건 네가 그런 거겠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면서."


"진짜 너는 정이 안가. 재수 없고 가증스러운 새끼."




동호는 찬호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와 동희는 나란히 치즈케이크 조각을 나눠 먹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조각 케이크도 두 조각 이상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여니 제일 먼저 제가 좋아하는 고사리무침과 빨갛게 무친 도라지가 보였다. 조용히 웃으며 반찬들을 한 접시에 적당히 덜어내고 밥을 펐다. 고소한 미역국 냄새가 식욕을 조금 떨어뜨렸다. 국을 들여다보며 망설이다 이내 미지근한 국을 조금 펐다.




"야. 나 미역국 싫어. 먹지 마."


"......"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 좀 해. 이 새끼야!"


"......"




 동호는 찬호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그를 무시한 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내내 찬호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티브이에서 소리 지르는 소리와 기이한 불협화음을 냈다. 이제는 이 생활이 조금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동호는 늘 그랬듯이, 누구에게도 찬호에 대한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저는 항상 의젓한 첫째이자 한 병원을 책임지는 정신과 의사였다.




"국 식었으면 다시 한번 데워 먹으렴!"


"아니에요. 적당히 따뜻해서 먹기 좋아요."




 동호가 국을 후루룩 들이마셨다. 묵묵한 표정이지만 손은 재빠르게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미역국과 뜨끈한 밥이 입 안에서 어우러져 기분이 노곤 노곤했다. 그 기분 좋음을 조금 더 음미하려는 찰나, 찬호가 앞에서 턱을 괸 채 비죽 웃었다.




"...... 진짜 가증스러운 새끼. 너 엄청 뜨거운 국 아니면 먹기 싫어하잖아."


"조용히 해. 시끄러워."




 동호가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한마디 내던졌다. 동호는 찬호의 이런 면이 너무 싫었다. 속속들이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임에도 오늘따라 지겨웠다. 언제쯤 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동호는 찬호를 마주할 때마다 제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 무의미해짐을 느꼈다.




"오빠. 뭐라고?"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동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동희에게 웃어 보이며 마저 남은 밥을 먹었다. 오늘 병원에서 받은 울음이 아직 모두 비워지지 않았는지, 뱃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미적미적 몇 숟갈 더 밥을 뜨다가 이내 숟가락을 내려놨다. 동호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남은 음식들을 털어 넣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엄마와 동희는 티브이에 넋을 놓고 있었다. 간단히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왔다. 동호는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찬호에게 속삭이듯 경고했다. 




"너. 다른 사람들 있을 때는 말 걸지 말라고 했지?"


"허. 웃기네. 이 새끼. 가족 앞에서도 말 걸지 말라고?"


"내 가족이지 네 가족이 아니야."


"언제까지 부정할 거야. 네 뒤를 봐봐."




 동호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신 이를 악물고 찬호를 째려보았다. 동호는 그 따가운 눈빛에 호기롭게 웃었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왜. 이젠 거울 보는 것도 싫어?"


"시끄러워. 그만 입 다물어."


"항상 그 말뿐이지 넌. 나를 입 다물게 할 재주도 없는 새끼가."




 동호는 애써 찬호의 말을 무시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옆에 처박힌 화장실 거울에는 먼지가 약간 쌓여있었다. 찬호는 회색빛 화장실 타일을 보며 이를 닦았다. 찬호는 화장실까지 뒤따라 들어와 낮에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쏟아냈다.




"야. 근데 너 오늘 심진희 환자 차트 거의 진전이 없더라?"


"...... 후."


"그런데도 네가 의사야? 의사는 개뿔. 환자 케어는커녕 제정신도 케어 못하는 주제에."


"난 환자에게도 나에게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넌 좀 꺼져!"




동호는 찬호를 향해 들고 있던 칫솔을 내던졌다. 칫솔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욕실 바닥에 처박혔다. 찬호는 씩 웃는 얼굴 그대로 제 뒤에 서 있었다.





"그래. 너는 언제나 환자에겐 최선이었지. 근데 너한테도 최선이었어?"


"......"


"그 외면이 뭉쳐서 나를 만들어 냈지. 아니야? 넌 아마 나까지 외면하진 못할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진짜가 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그게 말이 되는지 아닌지는 해보면 알지. 너 어제 뭐 했어?"


"어제는 일요일이었으니 당연히 집에 있었지."


"집에만 있었어?"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럼 어제 네 카드는 누가 썼을까."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제 종일 집에 있었는, "




 동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설마.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몸 전체를 잠식했다. 재빨리 입을 헹구어내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핸드폰을 찾아 헤맸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잠금해제를 하려 했지만 떨리는 손이 말썽이었다. 잠시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핸드폰 잠금화면을 해제했다. 그리곤 바로 메시지 함을 뒤졌다. 메시지 함을 확인한 동호는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거. 술집에서 쓴 카드내역. 누가 쓴 거야?"


"......"


"너 간경화 가족력 때문에 술 안 먹잖아. 우와. 근데 술집에서 이렇게 돈을 많이 썼어?"


"...... 도대체, 이게, "


"크크큭. 누가 쓴 거야 동호야? 아니, 이제 네 이름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어. 이제... 널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핸드폰에는 동호가 쓰지 않은 술집 내역과 편의점, 백화점에서 긁은 듯한 5개의 카드 내역이 연달아 있었다. 일요일에 쓴 금액의 합계는 보통 사람이 결제했다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금액대였다. 그리고 동호는 이러한 사치를 부리지 않는 성격일뿐더러, 저는 어제 종일 집에 있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크크크큭. 바깥에 나가보니 재미있더라. 이렇게 좋은 걸 왜 안 하고 살았어."


"......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그럼. 네가 한 게 아니고 내가, 내가 한 거야. 네 카드 잘 썼어. 아니, 이제 내 카드인가?"




 동호는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려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제 얼굴이 찬호처럼 웃고 있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핸드폰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검은 바탕에 그려진 제 얼굴은 이제 제 것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호탕하게 웃는 찬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 맴돌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나는 최동호야. 최찬호가 아니라고.


그런데 정말 찬호가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럼 이제 저 핸드폰은 누구 것이지?


저 지갑에 있는 카드는 누구 거야?


난...... 누구지?


도대체 난 누구야?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임의로 지어졌으며,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드문 일이기에 그저 소설로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내 모습을 진정한 내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혹여 누군가의 바람을 대신해 살고 있진 않은가.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만약 꿈이 있다면, 내 꿈이 다치지 않고 더 성장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찬 바람이 꽤 매섭게 부는 겨울입니다.

오늘도 모두가 아프지 않고 평온히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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