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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니마니모 Jun 05. 2020

경찰관은 말했다. "그게 위협이 되나요?"

믿었던 것들의 배신

  요새 무척이나 바빠서, 물론 핑계일 수도 있지만, 글을 쓸 짬을 도무지 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지난 달 새로 시작한 일에 적응도 해야 하고 매주 이어지는 팟캐스트에 섭외, 녹음, 편집까지 하면서 개인적인 인터뷰 촬영도 준비해야 했다. 와중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위한 연락과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을 덜 자더라도 깨어 있는 시간에 많은 것을 하려고 했고, 점점 메신저보다는 전화로 의사소통 하고 이동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자 노력하게 됐다. 요즈음의 생활에 가장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역시 에어팟이 아닐까 싶다.






  어제도 녹음을 하고 친구와 팟캐스트 회의를 하며 집에 돌아오다가, 친구가 내리고 나선 또다른 전화를 받고 전화를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도착해 또 전화를 하면서 그제서야 어질러진 집을 치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피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역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침 일곱시 오십분쯤 집 앞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어제 매운 것을 저녁에 급하게 먹어서 그랬는지 속도 좋지 않았고, 약국에서 피로회복 세트를 만 원이나 주고 사마셔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몸뚱아리 때문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 상태가 좋지 않은 때였다.

                                              

  여전히 소중한 에어팟을 꽂고 멍하니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내 시야에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한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중앙차로 버스 정류장의 맨 끝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아주 세고 힘차게 도로를 향해 내던졌다. 아직 담겼던 것을 채 반도 안 마신 것 같은 플라스틱 아이스 용기였다. 갈색 음료와 플라스틱 용기가 도로에 부딪히는 소리가 챙 하고 나뒹굴었다. 차가 지나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어떤 차주가 느닷없이 그것들을 맞았더라면 싸움이 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좋았으련만, 그사람은 별안간 내가 있던 쪽을 쳐다봤다. 소름이 돋았다. 휘휘 주변을 둘러보니 넓고 긴 중앙차로의 반대편 끝, 그러니까 횡단 보도가 가까운 내가 있던 쪽에는 나까지 여자만 셋 있었다. 내가 느꼈던 설명 못할 감정을 나만 느끼고 있었을까? 절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는 실실거리고 웃으면서 한 손을 바지 한 가운데에 넣었다. 고개를 돌리면서 봤기에 제발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바랐지만 내 눈은 정확하게 본 것이 맞았다. 심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뛰면서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고 끝에 입사한 회사가 정신과 전문 병원이라서, 매일 보는 것이 경찰에 잡혀 온 정신질환자라는 것도, 신고하겠다는 생각에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인상착의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내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아니었는지 몰라도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몸이 얼어붙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알려주는 전광판을 쳐다보는 척 힐끔힐끔 그를 쳐다봤다.


키는 175-180cm 정도에 건장한 체격, 가무잡잡한 얼굴,
분홍색과 남색의 굵은 줄무늬 반팔 티셔츠에
아마도 남색이었던 것 같은 반바지.


  반바지의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내가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멀리서도 눈에 띌 만한 인상착의를 기억하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너무 충격 받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한 채 112를 눌렀다. 신호음이 연결되는 짧은 순간, 그는 나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에게만 천만다행하게도 바로 그 때 내가 탈 버스가 도착했고 동시에 112에서 전화를 받았다.


띡- 어른입니다.
달칵-


  여자 경찰관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친절했던 그녀의 첫마디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대한 침착하게 느껴지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류장 이름을 말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뚝- 끊겼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에어팟이 버스에 타면서 전화연결을 끊어낸 것이다.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재빨리 다시 누른 112는 남자 경찰관이었다. 역시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내가 방금 본 것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여기 OOO 정류장이고요. 지금 분홍색과 남색 줄무늬 티를 입은 이상한 남자가 있어서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의아하다는 듯) 그 남자가 무슨 행동을 했나요?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 지금 바지 속에 손 넣고 여자들 보면서 실실거리고 웃고 있고, 음료수 컵도 도로로 던졌구요...정신적으로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게 위협이 되나요?"

"...? 네, 위협적인데요..."

"알겠습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라고 하셨죠?"

"OOO 정류장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짧은 대화 중간에도 에어팟은 자꾸만 연결해제를 시도했고 조용했던 출근길의 버스 안에서 내 목소리는 크게만 들렸다. 서둘러 에어팟만 빼고 휴대폰으로 대화하려하니 미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에어팟은 다시금 블루투스 재연결을 시도했고, 나와 경찰관의 대화는 자꾸만 끊겼다. 그래서 당시에는 대화의 내용에 충격을 받거나 어이가 없기보다는, 나의 신고가 장난으로 들리지 않게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하는데 집중을 했다. 그럼에도 많은 것을 빼먹었고 제대로 신고하지 못했다는 것은 끊고서야 깨달았지만,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받은 문자를 보니 안심은 되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아주 많이 이상했다.


  두려움을 느꼈으니 나에게 위협적이었던 것은 100% 확실하다.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을 다하고 별별 대응책을 생각했으니까. 출근해서 만난 동기이자 여자인 선생님에게도 말하니, 분명 위협적이었을 거라며 새된 소리를 내면서 지은 표정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그 경찰관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분명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아해했다. 대체 왜 이런 것을 신고하는 걸까, 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느꼈다. "그게 위협이 되나요?" 딱 한 문장에서 그의 맥이 탁 풀리고 편안해지는 감정이 느껴져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상황을 곱씹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어떻게 했으면 나았을까, 고민했다. 내가 이랬으면 좋았을텐데, 무엇이 문제일까, 라는 생각은 자칫 자책하게 될 수 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함이라면 필요하고 중요한 생각이 된다. 언젠가부터 자책을 하며 시간을 버리기 보다는 발전적인 방향을 고민하기로 했다. 나는 과연 어떻게 했다면 더 좋았을까? 무엇이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만들었을까?




※ 무엇이 문제였을까, 예상 문제를 나열하고 답변을 해보았다.


1. '바지 속에'라는 단어의 뜻이 모호했고 정보가 부족했다.

가장 유력한 문제였지 않을까 싶다. 경찰관은 '바지 속'이라는 말을 주머니로 생각했을 수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여자들을 보며 웃고 있다는 말은 언뜻 생각하기에 별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 전달될 수 있다. 게다가 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은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 '바지 한 가운데에 손을 넣고 성기를 잡고 있는 것 같다. 한 손으로 성기를 잡고 여자들을 보면서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혹은 '자위를 하는 것 같다. 성추행의 소지가 있다.'라고 과장해서 말했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2. 나의 어조나 말투가 급박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말을 제대로 전하려 했던 나의 노력은, 이른 시간이기에 출근 직후거나 퇴근 직전이었을지 모르는 한 사람의 직업인에게, 급박한 상황을 위주로 돌아가는 직업인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신고였을지도 모른다.

→ 글쎄, 급박하게 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3. 나의 말에 신빙성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지만 잠시 이런 생각도 했다.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정신전문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간호사인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주취자이거나 정신증적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속히 와서 조사를 해봐달라.' 물론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곱씹어보면서 생각한 것이기에 당시에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ㅠㅠ


4. 기타 등등

장난전화가 많기 때문에, 에어팟으로 인한 불통 전화라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침에 그런 일이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알아들었음에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아서(이것은 너무 최악의 경우라 상상하고 싶지 않다.), 다른 더 급한 출동건이 있어서 나가려다가 받은 통화라서... 등등등







  세상 모든 문제는 내가 예민한 걸까, 라고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이 나만의 문제가 되고 세상은 평온해진다. 내가 예민하건 말건 문제는 문제이고 사실은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캐치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경우도 많아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하튼 문제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전조증상 또는 첫 문제가 나타났을 때 바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직업인으로서 그 경찰관의 태도는 사실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한 사람의 신고자로서 정말 절실했기에 전화했던 것인데 저렇게만 질문해 준 것이 이제와서 아쉽다. 그의 짧은 질문에 나도 저렇게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맞다. 변명맞다...) 그래서 '조금'만 실망스러운 것이다. 나도 잘한 것은 없고 내 직업 또한 이런 지탄을 받는, 받기 쉬운 직업이기 때문에.



오늘 일을 겪으면서 신고하는 방법도 배워야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멋진 경찰관 아버지 덕분에 부족하나마 신고 정신만은 투철했던 것인지도.


살면서 배워야 할 것은 왜 끊임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일까. 근본적인 의문을 또 한번 품으면서, 원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다음에 유사한 상황을 또 마주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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