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몹쓸 것.
기억은 참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
헤어졌다는 말도 참 무색할 정도였으니 관계가 끊겼다고 표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사랑을 한 건지, 왜곡된 감정을 가졌던 건지, 이날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이유 또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기 때문일 테다.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인지 이 관계가 끊기고 난 후, 인생에서 에너지를 어디에 쏟아야 하는 건지, 모든 것의 선택 기준은 어디에 둬야 하는 건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나를 잃고 중심을 잃고 의존적인 사람이 돼있었다. 한심했다.
그걸 찾아가려고 조금씩 나를 부추겨보는데, 여전히 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열 살은 족히 많은 선배가 고구마를 까먹으며 내게 물었다. “이제 연락은 안 와? 생각은 안 나고?”
그럴 리가. 생각이 안 날 리가. “그럴 리가요 선배.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는 걸요. 어쩔 수가 없어요. 어제는 이런 거 때문에 생각이 났는데 얼마나 짜증 난지 아세요?”
그럼. “오래 만나면 그게 문제지. 여기도 저기도 같이 안 가본 데가 없고 같이 안 해본 게 없잖아.”
그러니까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선배님.
근데 사실 더 큰 괴로움은 장소, 물건, 상황이 주는 오버랩보단 공허에서 오는 옛 기억에서 비롯된다.
그냥 가만히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나면 밤새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화를 보다가도 갑자기 생각나면 또 옛 사진을 뒤적이고 있다. 대사까지 외울 것 같은 영상은 수천번도 더 돌려본 것 같다.
이젠 하도 많이 봐서 남이 된 그와 착 달라붙어 찍은 사진을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가 않을 정도다.
추억을 곱씹으려 해도 그냥 전부 자세하게 기억이 나니 추억할 맛도 안 난다.
그러니까 난 그냥 이유 없이 그 비현실 같았던 순간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다. (대체 그런 욕구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참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지. 이렇게 허송세월 보낸다니까?
그렇게 기억을 꺼내서 뭘 하겠다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데 왜 이러고 앉아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항상 상처 받았던 기억을 애써 곱씹으며 마음속으로 ‘쓰레기 새끼’를 열 번 외친 후 억지로 그 사진 창을 닫으려 노력한다.
아니 그러니까!
이렇듯 저렇듯 기억은 참 몹쓸 것이다.
좋은 기억이면 쓸데없이 자꾸 꺼내게 되니 몹쓸 것이고, 나쁜 기억이면 상기될 때마다 또다시 상처를 받으니 몹쓸 것이다.
인간에게 왜 이런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 건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금붕어였으면 한결 나았을 것을.
아, 정말.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기억을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기술. 어디에 없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