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이제 가나보다 했더니 가던 길을 잃어버리고 되돌아온 것 같다. 벌써 9월 중순이고 추석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폭염과 열대야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일기예보에 비소식이 있으니 기온이 좀 내려가려나 모르겠다.
비 예보도 있으므로 오늘은 비가 많이 오면 실내에서도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 가족공원이다. 두 곳은 나란히 이웃하고 있어서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날씨에 따라 즉석에서 한 곳을 선택해서 걸을 수 있어 우리가 날씨 좋지 않은 날 즐겨 찾아 걷는 곳이다.
중앙박물관은 지하철역에서도 가깝고 마침 고미술에 관한 기획전시회도 열리고 있으니 비가 와도 갈 곳을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매주 만나는 시간에 이촌역 박물관 가는 길 출구 앞에서 만난다. 아홉 명이다. 모두 모였을 때 아직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의 발길은 우선 자연스럽게 숲이 있는 가족공원을 향하여 박물관 오솔길로 들어선다. 오솔길에 오르면 곧 아래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나타난다. 박물관 정문 옆으로 큰 길가에 있는 연못인데 수련이 피어있고 연못 주변에는 여러 그루의 오래된 배롱나무 고목들이 에워싸고 있고 여름 내내 붉게 피어서 산책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던 배롱나무꽃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연못가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탁 트인 정문 광장이 나온다. 광장 앞 중앙에는 좀 전에 보던 연못보다 훨씬 큰 연못이 있다. 정자가 있는 연못 뒤로 우람한 박물관의 전시관 건물과 그 뒤로 남산, 서울타워가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룬다. 왼쪽으로 연못을 보며 앞으로 걸으면 울창한 소나무 숲길에 들어선다. 인물 석상들도 드문드문 서있고 절터의 주춧돌도 보이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석조물 정원이라고 이정표가 있고 곧 많은 불탑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른다. 여기는 전국 여러 곳에서 온 석탑들이 전시되어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마치 우리가 돌탑과 붉은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진 사찰 안에서 걷고 있는 것 같다. 석조물정원을 지나면 여기서 야외박물관은 끝나고 곧 용산 가족 공원이 나오는데 그 사이에 미르폭포라는 인공폭포가 있어 주변에 물안개까지 피어나며 운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용산가족공원은 도심 속의 근린공원으로 경의중앙선 철길 건너편 한강변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의 뒷마당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타 지역에서 온 시민들의 부러움을 사는 공원이다. 벚나무길이 둘러싼 큰 연못에서는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현대적인 설치 미술 조각품들이 서 있는 푸른 잔디마당과 나지막한 언덕을 덮은 나무숲은 방금 내리기 시작한 가랑비에 더욱 푸른색으로 빛난다. 비 예보 때문인지 공원에는 거니는 사람도 적고 매우 조용하다. 한적한 공원에서 빈 정자 하나를 발견하고 쉬어가기로 한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니 모두들 쉽게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공원 정자에서 충분히 쉰 다음에 이번에는 박물관 쪽으로 다시 돌아가서 박물관 정원을 걸어보기로 한다. 박물관의 뒤쪽 후원은 봄부터 매화, 산수유, 진달래, 살구꽃, 철쭉, 모란, 작약까지 차례로 피고 여름에 배롱나무꽃도 피어서 가까이 산다면 매일 와서 걷고 싶은 곳이다. 박물관 후원을 둘러보고 이곳 작은 연못의 수련도 감상한 다음, 전시관 건물 가운데 높은 계단을 통과하여 다시 중앙에 있는 큰 연못, 거울못 옆으로 내려가니 점심시간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네 곳의 식당이 있었으나 두 군데는 오늘 영업을 하지 않는다. 푸드 코트가 있지만 학생 단체들이 많아서 매우 붐빌 것 같다. 남은 한 곳, 연못가의 거울못식당으로 들어간다. 마침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에 빈 좌석이 있어 모두 환호한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밖에는 내리던 가랑비가 장대비로 바뀐다. 우리는 운치 있게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이탈리아 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린다. 거울못식당은 아주 분위기가 좋은 양식당이다.
기분 좋게 점심을 끝낸 후 브레이크 타임에 맞추어 식당을 나가려는데 아직도 거센 빗줄기가 계속된다. 그런데 나오면서 옆을 보니 식당 앞으로 테라스에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비 막을 지붕도 있지 않은가!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에 더 앉아 있다가 떠나자는 누군가의 의견에 모두들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결국 평소 보다 좀 늦은 시간에 해산한다.
용산 가족공원이 넓어 보이긴 했어도 박물관 정원을 포함해서 공원 두 군데를 걸은 셈인데도 채 두 시간이 안 걸렸고 만보 조금 넘게 걸었다.
2024년 9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