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면서 날씨도 쌀쌀해졌다. 냉방기 가동을 중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방 난방기 버튼을 누르게 되니 예전에 어느 선배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며 실감이 된다. 즉 “인간이 자기 체온 만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며칠 안 된다”라고 말이다. 그 당시 사무실에서는 늦여름까지 선풍기를 돌렸고 초가을 들어서서 선풍기를 치우고 나면 곧 석유난로가 등장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요즘이 걷기 좋은 최상의 계절이다.
오늘은 지난주에 갔던 동구릉에 이어서 또 구리로 향한다. 지난여름 개통한 지하철 8호선(별내선) 덕분에 걸을 곳이 늘었기 때문이다.
구리의 장자호수공원역 6번 출구에 열네 명이 모였다. 청명한 가을날을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 있겠지? 일본과 미국에서 잠시 귀국하여 오늘 참가하겠다던 두 친구들이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 왔는데도 숫자가 적지 않다.
역에서 나오니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곧 장자호수, 장자못이 나타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자호수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 오는 장자못 설화가 깃들어 있다. 옛날에 인색한 장자[부자]가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쇠똥을 퍼주었다가 벌을 받아 살던 집이 물에 잠기고 그곳에 물이 고여 못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장자 며느리가 몰래 시주를 하므로 스님이 빠져나갈 길을 알려주려고 계속 앞만 보고 걸어가라 일렀으나 뒤에서 들리는 굉음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자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고 한다. 구약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설화를 미리 알고 왔더라면 며느리 바위를 한번 찾아보았을 텐데 다음에 올 때 찾아봐야겠다.
장자못은 하천처럼 좁고 길게 이어져서 남쪽으로 한강과 연결된다. 호수가를 따라 산책로와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는데 산책로는 벚나무 길로 그늘이 매우 아름답다. 내년에 벚꽃 필 때는 이 벚꽃길도 또 걸어봐야겠다.
이 공원에는 장미원이 두 곳이나 있는데 아직도 생생한 장미들이 꽤 많이 남아 피어있는 것을 보니 정성을 많이 들여 가꾸었나 보다. 장미원에서 보는 호수와 서울 쪽으로 아차산과 멀리 하남 지역 산들의 부드러운 능선들이 어울려 이루는 풍경이 정말 한 폭의 그림 같다.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는 장자호수공원으로 처음 와 보는 곳이고, 또 한 곳은 구리의 한강공원이다. 구리 한강공원은 가을이면 코스모스 축제로 유명한 곳인데 코로나 시절에는 몇 년 동안 코스모스 축제가 열리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올 가을의 코스모스 축제는 공식적으로 며칠 전에 끝났지만 꽃은 아직 한창이라고 동영상에 올랐다. 우리 모임에서도 몇 년 만에 코스모스를 보러 가는 것이다.
장자호수공원 둘레길의 반환점이 되는 벽천교라는 다리 앞에 이르니 구리 한강시민공원 코스모스 단지 가는 길이라고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안내 대로 길을 따라가서 고속도로 아래 토끼굴도 통과하고 코스모스길이라는 이름의 길을 걸어가다가 코스모스길 14번 길을 계속 따라가니 강변북로 아래로 또 한 번의 토끼굴 진입로가 나온다. 이 길은 지난여름에 우리가 수국을 보러 가면서 통과해 본 적 있다.
토끼굴을 빠져나오면 곧 구리한강공원이다. 주차장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코스모스 산책길로 가도록 되어 있는데 가는 길에 수국 터널도 지나가고 소나무 동산도 만난다. 수국 터널 안에 수국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바깥쪽 길에는 시든 수국 외에도 드문드문 아직 피어있는 수국이 남아있다. 수국은 여름에만 피는 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래 가을까지 피는 줄 몰랐다. 소나무 동산은 벌써 붉어진 댑싸리 화분들로 화려하게 둘러 싸여 있다.
코스모스 단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동쪽으로 멀어져 있어서 주차장에서부터 새로 개통되는 구리고덕대교를 향해 1 km 정도 걸어야 한다. 가족캠핑장을 지나고 한창 공사 중인 대교진입로 아래를 지나 강변을 따라가니 비로소 드넓은 코스모스꽃 벌판이 펼쳐진다. 오래간만에 환한 분홍색 코스모스 꽃밭에 들어서니 그 황홀함에 모두에게서 탄성만 나올 뿐이다. 어수선한 공사장 옆길을 참을성 있게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다만 넓은 꽃밭에서 코스모스를 실컷 즐기면서 산책은 할 수 있으나 쉬어 가면서 감상할 수 있는 쉼터는 보이지 않는다.
웬만큼 돌아보다가 아쉽지만 코스모스 꽃밭을 두고 떠나야 한다. 점심 때도 가까워졌으니 말이다. 이럴 땐 도시락이 좋은데 코스모스 옆에 앉아서 먹을 자리가 없으니 그것도 아쉽다. 코스모스 단지를 돌아 나오는 길에는 반대편에서 오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줄지어 들어오고 있다. 오늘은 평일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주말에는 얼마나 복잡할까? 과연 구리 한강 공원의 코스모스축제는 소문이 날 만하고 가을에는 꼭 와 볼만한 곳이다.
다시 장자호수공원길을 되돌아 나와 지하철역 부근으로 가서 식당을 찾는데 마침 우리가 모두 앉을 수 있는 적당한 덮밥집이 보인다. 우리가 잘 가는 별다방의 지점도 근처에 있으니 다행이다.
오늘은 공원을 두 군데나 걷느라고 평소 보다 좀 더 많이 걸었다. 15400보, 2시간 30분, 11.7km.
2024년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