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물든 단풍을 예찬하려던 것이 하루 밤 사이에 설경 예찬으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부엌 창에서는 멀리 남산 자락을 지나가는 한양도성의 담장이 고층 아파트들 사이로 약간 보인다. 며칠 전에는 그 성곽의 담장 위로 노란 은행나무가 보이더니 어제는 비로소 빨간 단풍나무도 보이기 시작한다. 예년보다 2 주일은 늦게 단풍이 든 것 같다. 이제야 남산의 붉은 단풍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나 보다 하고 이번주 목요일에는 남산을 걸어 보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전날인 수요일부터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 첫눈은 순식간에 폭설로 변했다.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이 딴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색동저고리의 소녀가 하룻밤 자고 나니 밤사이에 은발의 할머니로 변해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아파트에서 보이는 앞산과 뒤 편의 쌈지공원은 어제만 해도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화려했는데 오늘 아침 새하얀 은색으로 변하여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제 하루 종일 내린 폭설이 117년 만에 처음 맞는 11월의 폭설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연달아 들어오는 폭설경보와 사고, 피해소식에 모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우리의 단풍구경 계획은 눈구경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눈 덮인 남산길을 오늘 올라가서 눈구경을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어 오늘의 행선지는 경복궁으로 바뀐다. 눈 덮인 고궁을 거닌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예상치 못한 폭설로 인해 궁궐이나 왕릉을 오늘 임시 폐쇄한다는 뉴스가 떴다. 이런?!
그럼에도 우리는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만난다. 모두 열명이 모였는데 한 친구는 미국에서 왔다는 열한 살짜리 손녀딸까지 데리고 왔다. 어제 하루종일 내리고 새벽까지 오던 눈은 다행히 아침에 그쳤고 낮 기온도 영상을 예고하고 구름까지 비켜가며 파란 하늘을 드러내준다.
전철역에서 나와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으나 궁궐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문밖에 있는 박물관 앞마당에서만 사진을 찍느라고 모두들 분주하다. 아마 눈구경을 처음 해보는 동남아나 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눈이 두껍게 쌓인 궁궐 지붕과 배경의 눈 덮인 북악산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경복궁 안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는 입구에 있는 고궁박물관 안으로 우선 들어간다. 고궁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예전에는 한 때 국립박물관 역할도 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주로 조선 왕실에 관련된 문화재를 보존하고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다.
오늘은 마침 <궁중음식: 공경과 나눔의 밥상>이라고 궁중음식에 관한 특별전이 열린다고 하니 재미있을 것 같다.
전시장은 전국의 진미가 궁궐에 모여 준비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수라간의 주방도구들, 식기, 소반 그리고 만들어진 음식들의 상차림(수라상, 잔치상, 안주상, 제향상 등)의 모형들이 그림과 글 그리고 영상자료와 함께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옛날 임금님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나 식사를 하셨다니 식자재 들여오는 사옹원과 수라간에서 음식 만들고 나르는 나인과 하인들이 수고가 많았겠다.
특별전시실 외에도 상설전시실에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대의 왕실 생활을 보여주는 유산들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
고궁박물관에서 나오니 바깥공기가 상쾌하다. 이제는 경복궁 둘레를 바깥쪽으로 걸어서 한 바퀴 돌려고 한다. 우선 효자로를 따라서 북악산을 바라보며 경복궁 돌담 옆길로 청와대 방향으로 간다. 돌담 위 기와에 쌓인 눈이 녹아 낙숫물이 되어 떨어진다. 길이 질척거리기는 하지만 얼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돌담길 도중에 만난 영추문은 굳게 잠겨 있다. 효자로에서 청와대로로 구부러지는 길모퉁이에서 빨간 단풍나무 한 그루를 만났는데 나뭇가지를 무겁게 덮은 흰 눈이 빨간색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청와대 건너편으로 청와대 앞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가을에 아름다운 가로수길로 유명한데 걸어서 와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어쩌다가 차를 타고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오래되어 굵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가로수 길과 그 옆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돌담길에 낙엽과 눈이 쌓여 더욱 운치 있다. 그리고 쌓인 눈 위에 내려앉은 빨간 단풍잎들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단풍잎들을 뿌려서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경복궁의 북쪽 문인 신무문도 지나서 계속 돌담을 돌아가니 건너편으로는 삼청동과 북촌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민속박물관 입구가 나타난다.
경복궁 돌담길 걷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길 건너 현대미술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북촌으로 올라가 식당을 찾아보기로 한다. 머릿속에 미리 점찍어 놓았던 칼국수 집 앞에 가니 대기줄이 너무 길다. 그래서 계속 북촌길을 가다가 화동의 정독도서관 오거리에서 우측의 아트선재센터 앞으로 난 길로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으니 좁은 골목 입구에 식당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메뉴가 다양한 한식집이다. 좁은 골목 끝에 들어앉은 막다른 집인데 외관은 허름해 보이지만 음식 맛이 좋고 종업원도 아주 친절하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니 요즘 말로 가성비 좋은 식당이다.
모두 그득한 상차림으로 만족하게 점심을 먹고 나와 덕성여고 앞을 지나고 지난여름에 다녀갔던 공예박물관도 지나서 안국사거리에 이른다. 오늘은 손녀 데려 온 친구가 커피를 사겠다고 해서 사양하지 않고 감사하며 모두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간다.
카페에서 나오니 길 위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이는데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늘 걸은 걸음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어서 지하철역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왔더니 그제야 만보가 꽉 찼다.
2024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