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캥 Jun 09. 2020

인간이라 미안해-2

살아오면서 본 동물들의 잔혹사

아버지가 동물을 좋아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다만 기억도 희미하던 어린 시절, 큰집에 가면 '용'이라는 이름의 큰 개가 있었고(아마 믹스였을 게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쁜이'라는 이름의 스피츠를 2대째 키웠었다. 큰집에서야 마당에서 풀어놓고 키웠지만 우리 집은 동물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분위기도 아니었고, 당시 동물을 키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딱히 키우자고 조르자고 한 적도 없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땐 '뽀삐'라는 치와와를 키웠었다고 했는데 어느 날 마을 주변 푸세식 변기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어 엄청 우셨다는 얘기를 했다. 즉 동물을 키워본 경험은 있지만 딱히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은 부모님이었다. 

  

사진은 없지만 기억을 더듬어서 비슷한 이미지로 끌어온 이쁜이(모)와 이쁜이(녀)


1세대 이쁜이는 어린 나를 잘 따랐고, 개는 따르는 사람 앞에서 배를 보이고 눕고 가슴을 쓰다듬어 주는걸 좋아한다는 것도 이때쯤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귀여운 새끼도 꽤 여러 번 낳아 어린 마음에 참 기뻤던 기억이 난다. 1세대 이쁜이는 어린 손자 마음도 모른 채 어느 날 할아버지가 저 멀리 다른 집에 보내버렸는데 한두 달 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시 돌아와서 어린 마음에 큰 감동을 선사했다. 그렇게 돌아온 개와 우리 가족은 화목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가 아니라 이쁜이를 받았던 다른 집 아저씨가 찾으러 왔고 굳이 할아버지는 또 이쁜이를 돌려보내면서 그렇게 1세대 이쁜이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린 녀석,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구



200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어머니는 꽤나 우울하셨는지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고자 했다. 그렇게 요크셔 한 마리가 새 가족이 되었고 이 강아지와 10대, 20대, 그리고 30대 초반까지 같이 보내게 되었다.


처음 데려왔을 때,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


강아지의 시간은 빨리 흐른다. 점점 나이들어가는 모습


떠나던 해 조용한 산책. 단지 한 바퀴 산책도 쉽지 않았다.


한 번도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은 못해봤기 때문에 강아지를 기른다는 것은 꽤 파격적이었다. 일단 이름부터 지어야 했다. 2002년 당시에 케이블 TV에서 한창 시트콤 '프렌즈'를 재밌게 볼 때였고, 암놈이긴 하지만 제일 정감이 가는 '조이'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How you doin?


조이는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군대와 어학연수 때문에 집을 오래 비웠을 때도 건강하게 기다려주었고, 대학원과 백수 시절을 거쳐 직장인이 될 때까지 내 삶의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 항상 곁에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도 못 본 전 여자친구들을 실제로 본 것도 조이가 유일하다. 그렇게 정말 오랫동안 나와 같이 지내던 어느 날, 2015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 장례준비를 할 때 조이는 어디서 뭔가를 잘못 먹고 탈이 났는지 거의 2주가 넘게 식음을 전폐했다. 입원을 시키고 약을 주사하는데도 눈에 띄게 말라가며 사료 한알 먹지 않아 정말 곧 죽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기운을 차려 한시름 놓았던 적이 있었다. 근데 그때부터 뭔가 기력을 소진한 느낌, 조이는 그렇게 1년을 더 살았다. 


어느 금요일 밤, 조이를 목욕시켰는데 입에서 평소 나지 않던 냄새가 났다. 늙은 강아지의 입냄새야 뭐 익숙해서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상황인데 그날따라 한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소름끼치는 냄새가 났다. 아마 그때쯤에 맘 속 깊은 곳에선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것. 
다음 날, 토요일 밤, 자정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 자기 집에서 자고있던 조이는 갑자기 처음 들어보는 소리로 깽깽 짖으며 울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으레 있는 경계성 짖음이다 싶었을 텐데 그날따라 우는 소리가 너무 특이해서 잠을 물리치고 방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인지 보았다. "조이야 왜그래" 하는 순간, 16살짜리 강아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며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축 늘어진 몸을 안자마자 든 생각은 언젠간 올 줄 알았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 생각보다 차분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 진짜로 네가 죽으려는 거구나.  


강아지를 떠나보낸 지 벌써 4년이 가까워간다. 차라리 백수 시절일 때는 같이 시간이라도 많이 보냈었지, 취업 후에 9 to 6를 강아지 혼자 집에 놔둔다는 건 정말 못할 짓이었다. 너무나도 심한 짓이었다. 더욱이 죽기 1년 전부터는 당직근무에 투입되어 주 1회씩 밤새 혼자 둘 때도 있었다. 오전에 서둘러 퇴근하고 왔을 때 반기는 것은 주인을 오랫동안 기다린 개의 반가운 모습이 아닌, 그저 기운없이 자기 집에 누워 자고있는 늙은 개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다. 


내가 다시 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1. 일단 직업이 없어야 하고, 2. 그러려면 로또가 되든 코인이 되든 일 안하고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추어야 하고, 3. 무조건 두 마리 이상을 키워 서로를 바라보며 살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키우지 않는다는 얘기, 난 일반인이기 때문에 동물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난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키우지 않을 것이다. 



2005년, 군대에 입대한 이튿날, 거지같은 기분 와중에도 정신은 차려야 했고 주특기병을 선발하는 시간이었다. 


"운전면허증 1종 손들어"

"사회에서 테니스나 골프 한사람 손들어"


군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대충 운전병이나 CP병을 선발하는 과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지 않고 버티다가 아무 데나 배치되는 것보다는, 여기서 손을 들어 선발되는 것이 그나마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 자대배치는 100% 랜덤으로 공평하게 되니까 걱정 말라는 장교의 홍보가 있었는데, 막상 자대배치 받고보니 낙하산으로 온 놈 투성이었다. 애초에 군대에서 공정함과 정의라는 걸 기대해선 안된다. 


아무튼 운전병이든 테니스병(쳐본 적도 없다)이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어서 될 확률이 희박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들리는 명령.


"사회에서 동물 관련 업종이나, 동물 관련 전공인 사람 손들어"


바로 저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무작정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내 전공은 토목환경공학부의 환경공학과, 동물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군바리들이 뭘 알겠냐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


"무슨 일을 했었나?"

"저는 K대(축산으로 유명하다)에서 동물생명환경공학(이런과 없다)을 전공해서 기초 생물학(D 맞았다)을 배웠고, 동물에 관심이 많아 집에서도 기르고 있습니다."


한 문장에 진실이라고는 1g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딱히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날도 더운 여름에 맘에 걸리는 건 없었다. 그렇게 군견병이 되었고 2년 동안 군견들을 돌보면서 나름 힘들지 않게 군생활을 했었다. 개와 구별이 안 가는 사람들이 좀 많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셰퍼드는 생각보다 귀엽다. 


2년간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알통구보(이 시간에 개밥을 줘야 되니까)


 말년 때 어느 날, 부대에 높으신 분이 왔었고 모든 군견병들은 각자 개들을 말뚝에 묶어놓은 채 강연에 참석했다. 강연이 끝났을 때 우리가 본 광경은 말뚝에 묶여있던 개가 목이 매달린 채로 죽어있는 광경이었다. 말뚝은 약 3m 정도 되는 높이의 언덕에 있었는데 개가 별생각 없이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버린 것이다. 이 일은 예상외로 그냥 묻혔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은폐하면 끝이었다. 하긴 사람도 죽으면 은폐하는 곳인데 동물이야 뭐 무슨 문제가 되겠어. 부를 땐 국가의 자식, 죽으면 너의 자식.

 

당시의 일기


이밖에도 어린이날에 애들을 초대해서 홍보한답시고 민간인들을 잔뜩 불렀다가 강아지들이 집단 폐사한 일, 타 부대에서 개를 패서 죽여 데리고 온 일, 훈련 중 개를 잃어버려 끝내 찾지 못한 일(개 잃어버린 놈은 따로 있는데 휴가는 내가 잘렸다), 그리고 훈련 중에 수도 없이 두들겨 맞는 개들, 동물과 같이 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죄 없는 동물들이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부끄럽기만 한 그때 그 시절.

 

그 시절의 부대를 아는 자는 이제 훌쩍 줄었다. 시간이 워낙 많이 지난 데다가 진급에 성공할 놈도 별로 없어서.



길을 걷다 보면 산책을 하고있는 개들이 많이 보인다. 각박한 세상에 어려운 일이지만 속으로는 만나는 개들마다 멈추어 앉아 한 마리씩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다. 가끔씩은 유튜브로 강아지들 영상을 멍하니 볼 때도 있다. 그렇게 사랑스럽지만 챙겨주기 어렵기 때문에 키우고 싶지 않다. 애석한 일이다.



지난 글의 Epilogue.)

    

작업을 곧 시작한다는 말에 서둘러 퇴근하고 집에 도착했다. 이미 비둘기 집을 철거되었고, 침입 방지용 철망 설치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작업하는 아저씨에게 비둘기 알은 어찌 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집을 잠깐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돈을 지불하고 아저씨가 떠날 때까지 묻지 않았다. 슈뢰딩거의 알이라고나 할까. 뻔히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게다. 


작업중인 비둘기 아저씨(편의상 이렇게 불렀다)


철망 설치가 완료되고도 비둘기들은 이삼일을 더 주변을 배회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내게 복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래 인간이라 미안해, 이렇게라도 분노를 표현하렴. 근데 나도 살아야 되지 않겠니 이제 곧 폭염이 온단 말이다.


실시간으로 똥이 늘어간다.


오래 살아라 인간, 지옥이 있다면 거기에서 만나자구.

끝.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이라 미안해-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