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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Mar 31. 2020

인간의 감각과 경험

냄새 얘기에서 시작하는 철학 이야기, 거기에 정치얘기 살짝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숨죽이고 집에 있는 와중에도 봄은 찾아왔다.


밖을 돌아다니기는 겁나지만 하늘은 한없이 맑다. 봄꽃이 온화한 빛깔로 펼쳐진 낮은 산뜻하고, 창문을 열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서 정겨운 향기가 느껴진다.


봄의 향기를 맡으면서 내가 맡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현재 나의 직업은 폐기물을 사용 가능한 연료로 바꾸는 일이다(정말 쉽게 표현하면).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전문적인 공정 개념들은 그냥 넘어가자.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더러운 물을 자원으로 바꾸는 업무에 종사한다. 보람을 느끼냐고? 또는 더러움을 느끼냐고? 사실 별 생각은 없다. 과거 전담 업무에 애정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고 하게 놔두지도 않는 게 현실이니. 새로 입양한 강아지에게 애정을 가지고 심혈을 기울여 빗질을 해봤자 개장수가 개를 바꿔버리면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그것이 자꾸 반복되면? 그래 결국 이것이 직업이고 이것이 직장이구나. 이제야 학창 시절에 유난히 학생들에게 정을 안 붙이던 선생님들이 이해되었다. 정을 잃는 상처를 피하고자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일 수도. 좋아 푸념은 여기까지.


확 그냥


여러 냄새를 맡으며 살아가는 동안 비위가 강해지는 일상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좋은 향을 느끼며 사는 것의 행복을 깨달았다. 과거 평범하디 평범한 연상의 여인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향기가 떠오른다. 코로 느끼는 향이 본인의 선호와 완벽히 일치하게 되면, 소리를 듣는 귀에 상대와 나누는 대화에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의미를 부여하여 교감하게 된다. 그 교감은 어쩌면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다. 감각에 의해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건지 아님 사랑에 의해 감각이 발달하게 되는 건지.


4년 전, 키우던 강아지가 죽던 날의 상황만큼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그날 맡은 냄새였다.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지만 아침부터 강아지에게 풍기던 냄새는 16년간 키우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였다. 그동안 오줌 냄새, 똥냄새, 발바닥에서 나는(은근히 중독되는) 쿰쿰한 냄새, 털에서 나는 몸 냄새 등 모든 냄새를 느끼며 같이 살아왔지만 그 날 맡았던 이질적인 냄새에서 강아지의 죽음을 직감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어두운 냄새, 전혀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맡기에는 꽤 까다로웠던, 역겨움과 무서움의 그 중간점.


보고 싶은 우리 강아지, 지금도 그 냄새를 기억한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할아버지, 할머니 염을 참관할 때 피부의 차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몸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 생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알코올의 냄새는 차가워져 버린 시신의 생전 이전 모습까지 지워버릴 기세였다. 눈을 뜨고 입을 맞출 수 없어 눈을 감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온기는 결국 유골함을 안고 있을 때뿐이었고, 그때의 은은한 향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린 조카들에게선 흡사 어린 강아지의 배에서 나는 냄새가 날 때도 있고, 어머니의 숨에서는 사랑스러우면서도 감출 수 없는 노인 냄새가 난다. 나에게도 땀이 삭고 입이 마른 홀아비 냄새가 나겠지. 만약 인간에게 언어라는 우수한 소통 수단이 없었다면 여느 다른 동물들처럼 냄새로 대화를 주고받지 않을까?



군대 시절, 군견병으로 복무하며 셰퍼드들을 훈련시켰다. 추적 훈련에서는 땅을 지그시 밟으면서 이동하여 발자국을 남기고 숨으면, 견이(개라고 부르지 않았다) 발자국 냄새를 맡으면서 족적을 추적한다. 그 발자국에는 발자국의 임자가 이동하며 남기는 흔적(옷의 체취, 각질, 호흡)을 모두 포함한다. 후각이 인간의 몇만 배나 되니 가능한 일이다. 반면 군견은 가장 독살하기 쉬운 동물에 속하는데, 햄 조각에 독을 섞어주면 날름 받아먹고 죽어버릴 때가 많다. 가장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도 본능에 의해 그 감각을 활용하지 못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사기를 당할 때가 있고, 이성에게 빠져 마음을 모두 바쳤을 때야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이성에서 우러난 심사숙고가 아닌 직감을 통해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기하게 그런 사람들 중에는 성공한 사례들이 많다(물론 사기당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생각을 안한 건 아니겠지만...).


인간의 직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리고 경험은 감각에서 나온다. 고루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얘기로 가보면,


1. 인간은 감각을 통해 사물을 분별하게 되고 기억을 형성하게 된다.

2. 기억이 쌓여 경험이 된다. 경험을 통해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3. 경험이 쌓여 일정한 대상에 대해 보편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여기서 기술이 나온다.


경험에 의해 보편적인 판단을 더 거친 후에야 인간은 현상에 대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경험론이 정립되었으며, 경험을 막 시작하기 직전 인간의 상태를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고 부른다.


어디서 많이들 들어봤을 거여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선호하며, 이는 과학적 사고를 토대로 발전한 첨단 시대인 현재의 패러다임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경험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으며, 자신의 감각을 과신하다 보면 앞서 말한 독 먹는 군견처럼 회복할 수 없는 길로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경험하지 않고도 사유를 통해 충분히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합리론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기원을 올라가자면 플라톤까지 올라가야 되니 글을 줄여야겠다. 철학 전공자들도 많은데 말이 많아졌다가는 자칫 내가 스노브라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으니. 이것도 (별 신용이 가지 않는) 나의 경험에 의해 알아낸 사실이다.


이 반 컵의 물을 '복지'라고 생각하면 현재 국내 정세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쟁도 진리의 기원을 가지고 다투는 철학의 일부분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반 컵의 물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객관적 사실'임을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다수일 수도, 소수일 수도, 그리고 단 한 사람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겁먹지 마라. 객관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결국 주관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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