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분석을 통한 현상 파악 - 주역
철학의 제1목적은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동양, 서양의 각각 진리에 대한 접근하는 방법론의 차이는 명확하다. 수천 년간 서구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이성을 매개로 한 인과율에 의해 구축되어 끊임없이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 본질을 탐구했고, 동양은 인간 중심의 진리탐구와 인간이 진리를 행하는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 숨겨진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동서양 구분 없이 동일하나, 그 방법이 다른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인간은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다 이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성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매개채가 필요했는데, 인간은 그렇게 언어와 문자를 발명해냈다.
서양 고대 철학이 '존재' 즉 '본질'에 대한 추구에 전념했다면(외부지향), 근대 철학은 추구에 전념하는 인간 존재를 추구했다(내부지향). 여기서 후기 철학은 존재와 사유를 연결하는 '언어'에 집중한다.
서양 철학의 발전은 이성과 경험의 끊임없는 변증법 속에서 이루어졌고, 언어 사용에 대한 탐구는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후기 철학에 이르러서야 진행되었다. 후기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그동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무리해서 표현하려다 보니 언어의 불완전성 안에서 진리를 왜곡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가족 유사성'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같은 언어 표현도 공통적으로 생각되는 특성을 공유할 뿐,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철학 전체에서 인간 사유의 수단으로 쓰인 언어에 대해 후기 철학부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언어와 문자에 대한 한계의 인식은 고대 중국 철학부터 이루어졌다.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자면,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고,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도의 참된 이름이 될 수 없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노자
애초에 진리를 설명할 수단은 언어와 문자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표현된 진리는 불완전하므로 도리어 진리를 왜곡시킬 위험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은 인간이 금수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이지만, 진리를 나타냄에 있어 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언론의 행태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따라서 여러 보도를 읽고 행간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상징'을 제시한다. 상징은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내면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주역 연구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인과율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합리론적 세계관이 구축된 현대 사회(동서양 모두)에는 적용하기 애매한 개념이다.
글로써는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성인은 상징체를 만들어서 뜻을 완전하게 표현하였다.
상징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여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분명 언어가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는 있지만,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상징이 언어보다 뛰어난 점은 인간의 무의식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프로이트에 이르러서야 무의식에 대한 영역을 분석하였는데, 이미 주역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표상했던 것이다. 수천 년간 서양 철학 세계의 기틀이 되었던 인과율과 대비되는 비인과적 관계, 즉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칼 융에 의해 만들어졌다(실제로 융은 주역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이 인과율과 인간 의식에 얽매인 서구 철학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의 한계, 상징, 철학 등을 언급하여 굳이 복잡하게 설명한 이유는 결국 기존에 언급한 '갈등의 원인'에 대한 추가 설명에 다름 아니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서양 후기 철학의 분석 이전에 이미 고대 중국에서 이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듯이, 인간 중심적인 자연관과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야기한 위기에 대한 극복도 기존에 제시된 자연관을 해법으로 해서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본인의 관심분야는 서양 철학이고, 동양 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 다만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고심했던 주제에 대해 동양 철학에서 답을 제시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서로에 대한 상호보완 없이 갈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빅데이터의 발전은 개인의 검색 선호도를 분석하여 취향에 맞는 언론 기사와 정보만을 제공한다. 네티즌들은 자기가 선호하는 커뮤니티에 상주하면서 그 폐쇄성을 더욱 강화한다. 이는 타 집단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성으로 나타나고 오프라인에까지 발현되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합리주의에 기반한 이러한 갈등 양상에 대해 융은 이렇게 말했다.
"합리주의는 수많은 상징과 관념을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했다. 근대인들은 합리주의가 얼마나 자신을 정신적 지하세계로 내모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옛 성인들과 학자들은 이미 해답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의 인간, 그리고 그에 대한 의지이다. 애초에 동양에서 나고 자란 우리가 동양의 사유체계를 통한 갈등 해결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기에 합리주의는 이미 세계 전체 의식을 지배하였고, 이에 대한 모순 해결은 아직도 요원한 것만 같다. 철학의 문제점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게 현상에 대한 분석과 해결 방안의 제시도 가능하지만, 그 가능성이 요원하기만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