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쯤 하는 연례행사가 있으니 대형서점의 다이어리 코너에 가서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사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다이어리를 주지만 좀 더 작은 사이즈가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조직 안에서 사는 일상에 작은 특별함을 스스로 더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신경 쓰는 기분도 들어서 그렇다.
다이어리 이외에도 연초까진 쭉 일기를 썼다. 직장생활을 한 지가 5년 차쯤 되었을 때, 너무나도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점점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과는 비슷할지언정 감정은 매일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소한 행동과 사건까지 기록해나갔던 일기장이 1년 반쯤 지나자 감정을 배설하고 토해내는 또 하나의 화장실이 되어버렸다. 물론 재미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즐겨 쓰는 문장과 단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의도적으로 다르게 표현하려고 시도하면서 하나의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야근을 한 날도 쓰고, 해외여행을 간 날도 쓰고, 출장을 간 날도 쓰고 뭐랄까. 어딜 가든 간에 하나의 역사를 늘 대동하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늘 삶이 즐겁고 새로운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기록으로도 풀지 못할 응어리가 있고 때로는 시간만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있다는 것, 매일 이러한 것을 기록하는 것은 괜히 감정을 글로 토로하여 스스로 흉터를 만들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한번 쓴 일기는 웬만해선 다시 읽지 않지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스스로 남겨 다시 회상하게 될 여지를 남기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1년 반의 시간차가 있는 일기의 모습, 기록이 계속될수록 지탱하고 있는 무언가가 하나씩 빠지는 느낌이다.
조현병을 앓았던 루이스 웨인의 고양이 그림, 병세가 심각해질수록 그림도 난해해진다.
나 자신을 힘든 병을 앓았던 웨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중2병을 앓기엔 나이도 너무 많이 들었고, 다만 이러한 사소한 글씨체의 변화를 시작으로 나의 일상이 안 좋은 방향으로 하나하나 바뀌어가는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 적잖이 꺼림칙하다. 그래서 연초부터 일기를 쓰지 않고 있다. 처음으로 집을 사서 독립을 하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진행하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의 느낌과 설렘은 맘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인사발령으로 거지같은 근무여건에 던져졌을 때도 그 감정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이 회의, 무력감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 사랑할 뻔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렇게 올해도 내 삶에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기록하지 않고 있다.
내가 느꼈던 그런 복잡한 감정을 글로 옮겨 넣는 과정은 분명 의미가 있었던 일이었겠지만 때로는 기록으로 그것을 영원히 새겨놓는 것 보다는, 현실의 감정에 좀 더 충실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통해 무뎌지게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