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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Sep 30. 2020

조주기능사 취득기-2

추억은 쌓여 지식이 되었다.


책 구입과 동시에 정기 기능사 3회 필기에 등록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 발산역에서 걸어가면 5분 정도 걸린다. 

악명 높은 큐넷의 원서접수일 대기열, 추억의 수강신청 날이 생각나게 한다.


필기시험은 1과목 양주학개론, 2과목 주장관리개론, 3과목 접객영어로 나뉜다. 나름 3과목에서 총합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하게 된다. 꽤 고생하고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붙었던 기사 필기시험과 달리, 기능사 필기시험은 그냥 자기 전에 한번 쓱 읽으면 될 정도의 난이도이다. 진짜 고생은 실기부터.


여러 번 말했듯이 소주 2~3잔에 인간 신호등이 되는 알콜고자지만, 그래서 술에 대한 로망과 지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 필기는 새로 산 교재가 아까울 정도로 대충 보고 끝냈다. 


근데 다 맞지는 못했다.


필기 발표 후 이제 진짜 실전을 준비해야되는 상황, 굳이 학원까지 다니면서 준비하고 싶진 않았다. 왠지 비용이 아깝게 생각되기도 했고 조리기능사와는 달리 독학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겐 유튜브라는 좋은 가정교사가 있다.


I am a bartender 채널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실기시험은 총 40개의 칵테일 중에 3개가 무작위로 배정된 후, 7분 내에 3개를 모두 완성해서 내놓으면 된다. 어떤 칵테일이 나올지 알 수 없으므로 40개 칵테일의 레시피를 모두 외우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3개 중에 한 개라도 만들지 못하면 실격 처리가 된다. 또한 3개 칵테일 중 2가지 이상의 '만드는 방법'이 잘못되면 그것도 바로 실격이 된다. 


1. 각 칵테일은 그에 맞는 조주기법(빌딩, 스터링, 셰이킹, 블렌딩, 플로팅)이 있다.

2. 각 칵테일은 그에 맞는 기주(베이스)가 있다(진, 럼, 보드카, 위스키, 브랜디, 데킬라, 와인, 전통주, 리큐르)

3. 각 칵테일은 그에 맞는 글라스가 있다(콜린스, 올드패션, 칵테일, 하이볼, 필스너, 사워, 소서, 샴페인, 쉐리, 리큐르).

4. 각 칵테일은 그에 맞는 가니쉬(장식)가 있다(슬라이스 레몬, 웨지 레몬, 소금 및 설탕 리밍, 사과, 오렌지, 체리, 올리브, 파인애플)


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 40개 칵테일의 레시피를 모두 외우는 것은 엄청나게 고역이다. 다행히도 나에겐 이 레시피를 외우는 것이 딱히 힘든 일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보았던 매체들을 떠올리면 자연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삶의 경험만으로도 지식은 축적된다.



어렸을 적, 큰집에 놀러 갈 때마다 2층 서재에 틀어박혀 보았던 책이 있으니, 바로 80년대 요리책이었던 <삼성 가정요리 시리즈>였다.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요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꽤 잘 만들어졌었던 이 책은 불행하게도 지방에서 성장하고 있는 90년대의 어린이가 절대 맛보지 못할 음식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라는 게 이것을 말하는 것. 


30년 후, 이 아이는 답답해서 내가 만든다를 시전하게 됩니다.


이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바로 '칵테일과 과실주'였다.

32번책 칵테일과 과실주, 인터넷에서도 구할 수가 없어 무척 아쉽다.


초등학교에 방금 들어간 어린이가 요리책을 탐독하는 게 첫 번째 별난 일이라면, 그중에서도 '칵테일과 과실주'만 책이 닳도록 본 점이 두 번째 별난 일이라고 하겠다. 어릴 때는 콜라, 사이다 등 모든 음료수를 참 좋아하고 많이 마셨는데 아마 색다른 음료를 다룬 책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본 칵테일 중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핑크 레이디(Pink Lady)>

드라이진 - 1과 1/2온스

그레나딘 시럽 - 1티스푼

우유 - 1온스

그리고 계란 흰자.


초등학교 저학년 언저리인 어린이가 드라이진과 그레나딘 시럽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검색을 하기에는 당시는 인터넷도 없던 시대다. 그때 느꼈던 건 어떻게 계란이 음료수에 들어갈 수 있을까, 들어갔다면 과연 어떤 맛이 날까. 이렇게 색이 예쁜 음료수를 한번 먹어보고 싶다. 이런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른이 된 지금, 모든 재료를 다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들어보지 않았다.  



<드라이 마티니(Dry martini)>

드라이진 - 2온스

드라이 베르무트 - 1/3온스

가니쉬는 올리브.


당시에도 007 시리즈는 재밌었다. 거기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즐겨 마시는 게 바로 마티니, 사실 본드가 마시는 것은 정통 드라이진 마티니가 아닌 보드카 마티니지만 영화 히어로가 마시는 거 하나만으로도 꽤 로망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처음 맛 본 마티니의 맛은.. 로망은 로망으로 남을 때가 제일 좋았다.



마티니는 주당들에게도 적응하기 꽤 힘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비틀 베일리'에서 장군은 항상 마티니를 마신다. 이때부터 어떤 맛이 나는지 항상 궁금했었다. '셜리템플' 이라는 논알콜 칵테일의 이름도 이때 처음 알았다.


블러디 메리(좌)와 프레리 오이스터(우)


<블러디 메리>

보드카 - 1과 1/2온스

토마토 주스

그리고 소금, 후추, 우스터소스, 핫소스(!)


블러디 메리는 어릴 때도 많이 마시던 토마토 주스가 들어가서 익숙한 칵테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재료에 있었다. 음료에 조미료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다니! 게다가 핫소스? 어린 마음에 이것은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대체 무슨 맛이 나는 거지? 당시 토마토주스에 집에 있는 소금, 후추를 넣어볼까 생각도 했지만(우스터소스와 핫소스는 없었다. 타바스코 소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이후이다) 엄마한테 등짝을 맞을 거 같아서 포기했다. 성인이 된 후 직접 만들어 먹어본 결과, 음 생각보다 먹을만했었다.


퓨처라마에서 벤더가 마시는 장면을 봤을 때 너무 반가웠다!


<프레리 오이스터>

계란 노른자 1개

우스터소스, 토마토케첩 1티스푼

식초, 후추 약간


이 괴악한 레시피의 칵테일은 어렸을 때 최고의 충격이었다. 다른 칵테일과 달리 술이 들어가지 않았고, 게다가 저 책에 레시피만 달랑 쓰여있었을 뿐 사진은 있지도 않았다. 성인이 돼서 알게 된 것은 이것은 굴의 식감을 재현해내기 위한 해장용 칵테일이라는 것. 음, 그냥 굴을 먹는 게 나을 것 같다.


술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어렸을 때에는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아쉬운 점은 모든 것을 아는 부모님도 뜬금없이 "마티니는 무슨 맛이에요?"같은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접할 일도, 방법도 없었으니 말이지). 당시는 격동의 1990년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도 없고 책에서만 보던 문물을 접하기엔 나의 고향은 그야말로 논길을 걸어 등하교를 하던 지방 중의 지방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그것을 견디는 것도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A1 소스와 초콜릿 푸딩


A1소스를 처음 맛 본건 사촌 형네 집에서였다. 요리를 좋아했던 사촌 형이 구운 닭고기에 이 소스를 내어줬는데  찍어먹는 거라고는 케첩과 마요네즈밖에 몰랐던 알파벳 A도 못 읽는 10살도 안된 어린이에게 A1의 강렬한 맛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이게 뭐냐고 묻는 나에게 사촌 형은 '소스, 소스'라는 말만 반복했고, 집에 간 후 '엄마 소스 사줘 소스'라고 말했지만 당연히 어머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수입상가가 아닌 일반 슈퍼마켓에선 살 수도 없던 물건이었다.
푸딩도 마찬가지다. 만화책이나 요리책에서만 보던 푸딩을 우연히 집에서 떨어진 큰 슈퍼마켓에서 보게 되었고 사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이 푸딩을 사기 위해 20분을 넘게 걸어 여러 번 갔지만 없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때 했던 생각은 '서울에서는 팔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 그 이후로 푸딩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10년이 넘게 지나 cj 쁘띠첼에서 푸딩을 낸 이후였다. 이때부터 지방에 사는 서러움이 사무치기 시작했는지도.



그렇게 기존에 알고 있었던 칵테일에 더해, 다소 생소했던 전통주와 리큐르 베이스의 칵테일도 모두 암기했다. 암기는 끝났으니 이제 실전 연습 후 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할 시간, 틈틈이 혼자 만들며 연습을 했지만 뭔가 긴장감이 부족했다. 


인터넷에서 구한 레시피를 카드로 만들어 공부했다.


직접 시간을 재서 시험을 해 보았다. 물론 진짜 술을 쓰긴 아까우니까 빈 물병 몇 개에 멋대로 이름을 붙인 후 사용했다. 정말 시험장에 들어왔다고 스스로 감정을 몰입한 후 자신있게 카드를 무작위로 3장을 뽑은 후 조주를 시작했다.  그러자,


머릿속이 하얗게 됨과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실전 연습을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있게 암기를 마치고 입으로 술술 나오던 레시피가 초시계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까맣게 잊혔다. 정신을 가다듬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간을 다시 세팅한 후 다시 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치열한 연습의 현장. 대충 40개의 레시피를 '물로만' 다 만들었을 때, 부엌은 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한번 해본 가락이 생기니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시험을 이틀 앞두고 친구들(이라고 적고 시험 대상이라고 부른다)을 초대했다. 그때 고향에 놀러왔던 그 멤버들이다.


저녁을 대충 먹인 후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진짜 술로 연습했던 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아깝지 않게 이 술들을 모두 마셔준 친구들은 큰 행운이었다.


40중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갖춘 칵테일은 20개 정도 됐지만, 10개를 넘은 시점부터 녹초가 되어버렸다.


친구들이 무작위로 카드를 뽑으면 내가 그대로 만드는 방식으로 모의 시험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갈수록 손이 무거워지고 땀이 났다.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거지만 실제 바텐더의 일은 정말 고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개의 칵테일을 3~4번 완성하고나니 평균 1분 정도가 남았다. 모의시험은 성공적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정말 흔치 않은 경험이었을 게다. 바에서 한잔에 만원 언저리를 주고 먹는 칵테일을 거의 반강제로 계속 공급받았으니 말이다. 서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시험을 이틀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자, 이젠 시험만 남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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