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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를 위한 해명

'위대한 개츠비' 에 가려진 시대의 한계

by knokno

새해를 맞아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들춰보기 시작하면서, 미국 문학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반가웠던 것은 <위대한 개츠비>. 처음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필수 도서일 정도로 글 자체로도 명문이고 시대상을 꿰뚫는, 더욱이 작가 또한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 갔기 때문에 더 신화 같은 작품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들이 으레 그렇지 않은가? 처음 읽을 때와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을 때 느낌이 전혀 다르다. 나는 이 책을 이번에 세 번째로 읽은 것인데, 처음에는 작품에 흐르는 시대의 역동성과 허무함을 느꼈고 두 번째에는 뛰어난 문체에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위대한' 개츠비에 가려진 다른 인물들에게 흥미로움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새삼스럽게 개츠비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야 함이 마땅하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더 강한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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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5년 전 개츠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신비가 무르익은 그녀의 집, 아름다운 침실과 광채가 쏟아지는 계단, 시들지 않을 것 같은 꽃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은 사랑의 영원을 속삭였다. 얼마 뒤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개츠비는 프랑스로 떠났으며, 데이지는 그를 기다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녀는 그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보장받을 선택을 해야 했고,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츠비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옥스퍼드에서 허둥지둥하는 사이, 데이지는 다시 사교계에 발을 내디뎠고, 하루에 대여섯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그 중 만난 톰 뷰캐넌은 데이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인생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캐러웨이의 집에서 개츠비와 재회했을 때, 비록 개츠비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긴 했어도 데이지는 5년 전 루이빌의 부잣집 딸이 아니었다. 시간의 공백은 그녀를 이스트에그 대저택의 여주인이자 톰 뷰캐넌의 아내, 한 아이의 어머니로 만들었으며, 어떤 비열한 진실을 마주한 후에도 그것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법을 배우게 했다. 그녀는 이제 사회의 흐름에 적응해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그녀가 이 흐름에 저항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관없는 누군가에게 경멸하는 어조로 자신은 ‘세련’ 되었으며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고 중얼거리거나, 관계의 규칙을 깨지 않으면서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개츠비가 시계를 돌려 5년 전으로 그들의 관계를 되돌려놓을 것을 요구했을 때, 가장 난처해진 건 데이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유년 시절 열정과 기억을 가진 남자만큼이나, 현재의 생활 또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혼 생활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고 톰은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면서 데이지는 냄비니 부엌이니 빗자루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넓고 기다란 테이블에서 안심하며 칵테일을 마실 수 있었으며, 한때 사랑받고 있다는 의식과 기쁨 또한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개츠비의 말대로, 5년 간 있었던 일을 모두 부정하기에는 그것들이 너무 무거웠다.


개츠비가 비난받아야 할 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지난 5년을 데이지를 위한 헌신, 위대한 사랑의 헌신이라고 여기면서도, 데이지의 5년은 아무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재회한 뒤에도 개츠비에게 그녀는 여전히 루이빌에서 장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녀였던 것이다. 헤어진 동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살아남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고,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무로 되돌리려 한다. 이는 자신의 감정만을 토대로 상대도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독한 자기 기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무모함, 그 폭력성이야말로 개츠비를 더 ‘위대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데이지는 길가로 뛰어나온 윌슨 부인을 들이받고 이스트에그로 뺑소니를 친다. 며칠 뒤 윌슨이 주머니에 총을 쥔 채 톰을 찾으러 왔을 때, 그는 범인은 맞은편에 있다고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개츠비가 교통사고를 자신이 낸 것으로 하라는 말에 대해 거절도, 윌슨이 찾아왔을 때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고 자백하지도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고 경멸했던 시대와 사회의 장막에 숨어버리고, 남자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것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낙원의 이편>을 포함한 여러 작품들에서, 부유한 집안의 젊은 여성들이 이렇게 묘사되는 것은 그의 유년 시절 좋지 않은 경험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왜곡될 여지는 있어도, 당시의 여성들은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최우선 목표로 두지 않았을 것이다. 혹 누군가가 그것과 반대되는 삶을 열망하거나, 데이지처럼 도중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더라도,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인식이 그녀를 더욱 강하게 옭아맸을 것이다.


데이지를 기존에 씌워진 모든 혐의로부터 변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개츠비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올린 지위는 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글 속에서 그녀가 한 말들과 드러낸 감정들은 진심이기에, 조금은 그녀를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정함, 사랑의 열정, 기다림과 인내심… 이것보다 위대한 일이 어디 있을까? 개츠비를 기만하고 조롱한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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