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예레반 (3.26)
오전 7시 예레반에 도착했다. 기차역 앞엔 택시 몇 대뿐, 다니는 사람도, 문 연 가게도 없이 고요했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한 어스름한 시간이라 확실하진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 같았다. 예레반 기차역의 외관은 고풍스럽고 멋있었다. 아마 기차나 전철은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 지어졌을 수도 있겠다. 아르메니아는 경제가 좋지 않지만, 수도인 예레반에 모든 물질적 문화적 투자를 몰빵한 탓에, 예레반 만은 여느 풍요로운 유럽의 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기차역은 왠지 그런 예레반의 상징 같다.
기차역을 나가면 바로 앞에 지하철 Sassountsi David 역이 있다. 숙소가 있는 Yeritasardakan역까지 3 정류장 거리다. 예레반에는 1개 지하철 노선이 있고, 역이 그리 많지는 않다. 2호선은 짓고 있는 중인 것 같다. 기차역 내에 환전소 유무를 알 수 없어서 트빌리시에서 미리 조금 환전을 해 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만약 환전소가 있었다고 해도, 그 시간엔 모든 곳이 문을 닫은 상태여서 환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메트로 표지판을 따라 지하통로를 걸으면서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의구심이 가득 들 때쯤 지하철역 입구가 나왔다. 매표소 점원에게 현금을 주고 장난감 동전처럼 생긴 주황색 반투명 플라스틱 토큰을 받았다. 지하철 개찰구의 구멍에 토큰을 집어넣으면 문이 열리고, 토큰이 다시 나오지는 않았다. 전철이 길지 않아서 요금이 동일한 듯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하철 역에는 무료 와이파이가 제공됐다. 지금껏 여행했던 어떤 나라에서도 대중교통에 공공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곳을 본 적이 없어서 반신반의했는데 잘 됐다. 빵빵 터지는 공공 와이파이는 서울만의 문화적 혜택인지 알았거늘.. 조지아를 떠난 후 심카드 부제로 연락이 끊겨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별부터 넣었다.
Sassountsi David 역은 서울의 1호선처럼 지상철이었다. 서울의 월요일 오전 7시라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어딜 가도 북적일 텐데, 예레반의 아침은 천천히 시작하는 것 같았다. 지하철 안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짧은 지하철 여행을 뒤로하고 Yeritasardakan역에서 내렸다. 이 역은 트빌리시의 지하철 역처럼 소련 시절 지하철 양식 그대로였다. 방공호 겸용으로 굉장히 깊고 천장이 둥근 모양이었다. 예레반에서 가장 번화한 오페라 극장 인근인데도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숙소 체크인은 12시부터지만,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시간인지라 이르게 체크인할 수 있을지 기대를 가지고 숙소로 이동했다.
어린 호스트 두 명이 친절히 반겨줬다. 아직 청소 등이 남아서 바로 체크인을 할 수는 없지만 휴게실에서 쉬고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호스텔은 한 건물의 4,5층 두 층을 쓰는 작은 호스텔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위층인 5층엔 대부분이 인도인들이었다. 가끔 한 호스텔에 유독 한 국가의 사람들이 많은 경우가 있는데, 그 나라 여행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모여든 케이스다. 아마도 이 호스텔은 인도인들에게 알려졌나 보다. 잠시 후 체크인을 하고 10인 도미토리 내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우리 방에도 인도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내 옆 자리인데 시크교도인지 보라색 큼지막한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여행기간 중 동양인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방에는 인도인 2명 외에도 동남아 계통의 두 분, 젊은 동아시아 남성 1명이 있었다. 동아시아 남성은 아마도 중국인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날이 아웃하는 날인지 한참 짐을 싸고 있었다.
10인실이긴 했지만 방도 큰 편이고 침대도 넓고 깨끗해서 이번 여행의 숙소를 통틀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기차에서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좀 쉴 생각으로 씻고 침대에 앉아서 앞으로 어딜 다닐지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떠나려고 짐을 싸거나, 나가기 위해 씻고 옷을 입거나 부산한 분위기였다.
나는 여기서 시크교도를 처음 봤다. 잘 때도 터번을 쓰고 잤는지 버섯 같은 큰 터번 아래엔 얼굴 전체에 수염이 빼곡했다. 외출을 위해 터번을 풀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데, 어딜 씻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머리를 감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부터 그의 길고 긴 외출 준비가 시작됐는데 우선 수염에 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후, 스카프 같은 것으로 얼굴을 환자처럼 꽁꽁 싸매고는 드라이기로 싸맨 수염을 말려서 고정시켰다. 한참 뒤 스카프를 풀자 수염은 얼굴에 밀착돼 깔끔한 모양이 됐다. 수염 정돈도 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머리 정돈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했다. 등 중간 정도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한참 빗질한 후, 목을 꺾어서 한쪽으로 머리카락을 모으고, 2미터는 되는 듯 한 긴 터번을 어떻게 잘 머리와 함께 엮어서 동그랗게 말았다. 머리가 긴 사람들이 머리를 한대 묶을 때도 미묘하게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어서 여러 번 묶게 되는 것처럼, 터번도 맘에 안 들게 말리는 모양이 있는 건지, 터번 한 번 감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걸 여러 번 풀었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수염 고정하는 것도, 터번 두르는 것도 큰 움직임이 필요해서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매무새를 단장했다. 터번 두르는 것도 처음 봤지만, 저렇게 긴 시간 꾸밈 노동을 하는 남성을 본 것도 처음이라 재밌게 구경했다. 평상복을 입고 잤는지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던 그는 약 4-50분을 수염과 머리단장을 한 뒤 신발만 갈아 신고 숙소를 나갔다. 이제는 해가 중천에 있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햇빛을 보러 이 도시 저 도시를 돌고 돌다 드디어 예레반에서 화창한 날을 맞이했다. 나도 얼른 햇빛을 쐬러 나갈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