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예레반 (3.26)
예레반은 거리에 꽃이 많고, 공사 중인 곳이 많고, 공원과 조각상이 많다. 또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들이 많고, 늦은 밤에도 안전하다. 적당히 사람이 많고, 적당히 지저분하고 깨끗하고, 적당히 편리한 도시. 예레반에서 첫날은 바람도 적고 햇살이 참 좋은 날이었다. 예레반은 작은 도시고, 관광 거리가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도시 안에서의 작은 여유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 아기자기한 도시가 꽤 마음에 들 것 같다. 웬만한 관광 명소는 걸어서 다닐 수 있고, 버스 노선도 잘 된 편이다.
숙소를 나와 관공서와 고급 호텔들이 모인 공화국 광장에 가서 'I love Yerevan' 사진 한 장 찍어주고, 곳곳에 비치된 급수대 근처에서 빵 먹고 물 마시며 쉬고 햇빛 쬐고 오후를 그렇게 느적이 시작했다. 작은 도시 예레반에도 몇 개의 랜드마크가 있는데, 공화국 광장의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 '오페라 극장' 그리고 'Kaskad-캐스케이드'다. 캐스케이드는 독특한 구조의 높은 계단 건물로 내 외부에 박물관과 조각품 등이 배치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캐스케이드 앞 쪽에 조각 공원과 공원을 감싸고 있는 가게와 상점들로 작은 광장을 이루고 있다. 조각 공원에는 전 세계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돼있는데, 한국인 작가 '지용호'님의 작품도 전시돼있다.
지용호 작가는 일명 '폐타이어 조각가'라고 불리는데, 폐타이어 조각을 덧붙여 동물의 근육과 역동성을 표현한 작가다. 캐스케이드에는 이 기법으로 만든 커다란 사자상이 있다. 최근 서울 한강변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놓인 여러 조각품들 중에도 지용호 작가의 작품이 있다. 한강 철교 밑 특별한 설명 하나 없이 시커먼 형상의 거대한 북극곰 조형물이 놓여 있는데, 밤에 강변을 찾은 시민들이 검은 형상에 많이 놀라서 철거 요청 민원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캐스케이드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맹수의 역동적인 묘사가 참 인상 깊어서 국뽕 없이도 그곳의 많은 조각품들 중 단연 인상 깊었는데, 그런 멋진 작품이 엉뚱한 곳에 놓여 철거를 논하게 됐다니 참 유감이다.
캐스케이드는 계단 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직접 올라갈 수 있다. 평평한 예레반에서 캐스케이드가 놓인 지대가 높은 편이라, 계단을 다 오르면 예레반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저 멀리 하얗게 눈이 쌓인 아라라트산도 볼 수 있다.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며 캐스케이드 꼭대기에 이르렀다. 꼭대기에는 50주년 기념탑 (Memorial of the 50th anniversary)이 있다.
1915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안 270명이 오스만 제국 당국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1923년까지 약 150만 명의 아르메니안이 살해당하는데, 현대에 들어와서 최초의 대학살이자 유대인 홀로 코스트 다음으로 많은 사망자를 낸 학살이지만 터키는 아직도 이 사건을 '학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기념탐은 대학살로 죽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67년에 세워졌고 매년 4월 24일에 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다 '아르메니안의 영혼'이라는 아라라트산을 또 터키에게 뺏겼으니. 아르메니아는 여러모로 우리나라를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강대국에 낀 약소국의 분노와 설움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역사가 단죄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밝히고자 하는 피해자의 권력에 좌우되는 게 실상이다. 학살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아르메니아의 노력을 지지하고 터키의 사죄를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숙소 바로 앞엔 좀 큰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는데, 24시간 운영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문 연 가게가 많으면 경제가 좋지 못한 것이라는데 정말일까? 비단 이 가게뿐만이 아니라, 밤늦게까지 문 연 가게가 많았고, 숙소 인근 오페라 극장도 밤늦게까지 공연 스케줄이 있어서 자정이 넘은 시간도 예레반의 거리는 북적였다. 마트 구경을 실컷 하고 간식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귀가했다. 예레반에 머무는 동안 이 슈퍼마켓에 출퇴근 도장을 찍었다. 예레반에서의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