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조지아 여행기-14

14. 예레반 (3.27)

by Loc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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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지에서 현재 상황과 기분을 간략하게 적어 한국의 우리 집 주소로 엽서를 부친다. 엽서는 체감상 2주 정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여행에서 귀국 후 정신은 아직 여행지에서 다 돌아오지 못하고, 그리움의 잔열이 남아 있을 때 과거의 나로부터 엽서를 받게 된다. 지금껏 여행지에서 부친 엽서들의 내용은 대부분 피곤함과 다양한 고초가 담겨있다. 여행이 길어지다 보면 피로가 누적되고, 아무래도 여행 초반만큼 쌩쌩하게 다니기가 힘들다. 나 스스로 결정하고 온 여행이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나 자신에게 우는 소리를 잔뜩 써서 부치게 된다. 단순히 관광지 엽서와 소인이 찍힌 우표를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숙소 인근에 우체국이 두 곳 있어서 가까운 곳을 먼저 갔는데 약간 살벌한 분위기에 창구도 전당포 같이 막혀있고 엽서는 보이지도 않고 어디다가 물어봐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소심하게 쭈뼛거리다 나와버렸다. 좀 더 용기 내서 다른 우체국을 방문했는데 손님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까의 실패로 선뜻 창구 직원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서성이는데, 한 직원분이 손짓으로 불렀다. 엽서 얘기를 하자 서랍에서 한 4-5개 정도의 엽서를 꺼내 고르게 했다. 짧게 편지를 써서 다시 창구로 가져가 엽서를 부쳤다. 오늘 하고자 한 일 하나를 완수했다.



그 뒤로는 딱히 계획이 없어서 마트에서 군것질을 사서 공원으로 향했다. 예레반의 대부분의 공공 공원들은 무료 와이파이가 제공됐다. 공공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곳도 잘 없지만, 있던 곳도 30분 제한 등 기준이 있거나, 복장 터지게 느렸던 기억뿐인데, 예레반의 와이파이는 별도의 제한도 없고 빠르기까지 했다. 덕분에 예레반에 머무는 동안은 유심칩이 없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예레반 도시 곳곳에는 인물 조각상이 많았다. 대부분 청동류의 금속으로 제작됐는데, 인물 표현이 독특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실사와 가까운 인물이 아니라 디자인적으로 디폼을 많이 한 캐릭터적인 묘사의 인물 조각상으로 개성 있고 조금은 우울한 느낌이기도 했다. 개성 있는 조각상과 활기 넘치는 공원이 예레반을 젊은 예술 도시의 이미지를 줬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크로키 북에 조각상 모사를 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다른 벤치의 중동 남자 무리 중 한 사람이 내가 앉은 벤치로 왔다. 대뜸 뭐하냐 혼자 왔냐를 묻는데, 이런 질문은 불쾌한 상황의 시발점일 때가 많아서 잔뜩 경계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에는 뭐하냐 같이 놀자고 한다. 조지아에선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 사람들도 아르메니아 인은 아니고 여행 온 이란 사람들이라고 한다. 무관심과 단답으로 일관하자 한국과 이란의 축구 경기 때문에 이란을 싫어하는 거냐고 농담을 했다. 나는 축구에 관심이 아예 없는 터라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후에 검색해보니 이란의 연관 검색어가 '침대축구'일 정도였다. 뭐만 하면 드러누워서 파울을 얻어내는 식의 경기를 많이 하나 본데, 자국민이 저걸 농담으로 할 정도면 단순히 상대편으로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텔레그램 알려달라, 스카이프 알려달라 거절을 거듭해도 떠나질 않길래 결국은 내가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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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반 골목골목을 쏘다니다가 숙소로 일찍 귀가했다. 숙소 앞 마트에 들러 저녁 끼니로 때울 빵 치즈 등을 사다가 같은 방에 머물고 있는 필리핀 분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저녁으로 해먹을 파스타 재료를 사러 왔다고 했다. 지금 우리 방에 함께 머물고 있는 베트남계 캐나다인 할아버지가 내일 체크아웃이라 저녁을 한 끼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이 숙소에 오래 머물렀던 걸까? 숙소로 귀가해 나는 주방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는데 위층에 머물고 있는 인도인 가족들이 어마어마한 식재료들을 들고 주방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저녁을 다 먹고 숙소 내 침대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 화장실을 가던 중 보니 아직도 주방은 인도인에 점령된 상태였고, 마트에서 만난 필리핀 분은 주방 사용이 언제 끝날지 주방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안에선 무슨 인도요리를 하는지 인도 향신료 냄새와 연기가 자욱하고, 필리핀 분의 물음에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제스처와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호스텔의 주방은 최대한 짧게 배려하면서 사용해야 되는데, 3시간이 넘게 그러고 있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1도 없는 것이다. 또 한참이 지나 10시가 넘은 시각, 필리핀 분은 그제야 요리를 하고 계셨다. 캐나다 할아버지가 내일 떠나므로 남은 식재료들을 다 털어야 해서 각종 재료들을 넣고 요리 중이었는데, 펜네에 토마토소스와 크림이 들어갈 로제 파스타였다. 또 무슨 향신료에 볶아진 고기와 납작한 빵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음식의 많은 양을 보여주며 나도 부담 없이 같이 앉아서 먹길 권했고, 주방에 들른 우리 방의 독일 남자에게도 권해서 우리는 같이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필리핀 분의 이름은 '렘마'. 떠나는 캐나다 여행자에게 밥을 해주신다길래 두 사람이 원래 친분이 있는 줄 알았는데, 둘은 여기 숙소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우리 방 모두와 늘 인사하고 짧게 대화하는 등 외향적 성격에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으려 빵과 치즈로 일찌감치 먹었건만, 그녀의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늦은 시간에 고기며 파스타를 푸지게 먹고 말았다.


DSC05655.JPG 예레반의 우체국.
DSC05665.JPG 예레반의 십자가 비석. 중세부터 전해진 기독교 유물로 돌을 깎아 만든다.
DSC05669.JPG 최근에도 십자가 비석은 장인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DSC05674.JPG 예레반의 다양한 조각상들.
DSC05681.JPG 멋진 조각상.
DSC05689.JPG 예레반의 랜드마크이자 서민들의 광장인 오페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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