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트빌리시 - 예레반 (3.25-26)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예레반을 가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건 버스인데, 배차가 많아서 언제든지 바로 출발할 수 있다. 기차를 타고 바투미에서 트빌리시에 도착했을 때 점심시간 정도가 됐는데, 그때 버스를 타면 저녁이 다 돼서 예레반에 내릴 것 같았다. 비행기든 버스든 밤에 낯선 도시에 내리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불안 초조하게 숙소를 찾아 헤매는 게 싫어서 피하고 싶다.
그래서 밤에 기차를 타서 아침에 내리는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야간열차는 약 11시간이 소요되는데, 버스보다 4-5시간은 더 걸리고 시설도 좋은 편이 아니라 이용객이 적어 하루에 딱 한 대 운행한다고 한다. 영어 한마디 없는 버스 터미널 여기저기를 헤메 어렵게 기차표를 예매했다. 기차는 저녁 8시에 트빌리시에서 출발에서 아침 7시에 예레반에 도착하는 코스였다. 기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배낭이 무거워서 어디 돌아다닐 여력이 못됐다. 기차역 인근에서 밥 먹고, 차 마시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트빌리시에 입국하며 산 핸드폰 유심칩은 조지아 통신사에서 판매하는 거라 조지아에서만 쓸 수 있었다. 국경을 넘으면 그때부턴 인터넷이 안 되는 상황이라 인터넷으로 해둬야 할 것, 알아둬야 할 것들을 미리 정리했다. 어플로 숙소 예약을 하고,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찾아가는 길을 구글로 상세하게 학습했다.
무료한 시간을 억지로 꾸역꾸역 보내고, 기차 시간에 맞춰 역으로 왔다. 기차를 밤 세 탈 예정이라 간단히 세수와 양치 등을 하고 싶었는데 기차역 내부엔 공공 화장실이 없었다. 세상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만큼 무료 화장실이 많고 깨끗한 나라는 없다. 조지아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공공 화장실은 아예 없다시피 하고, 간혹 가다 유료 화장실이 있는데 시설은 나쁜 편이다. 식당이나 카페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게 가장 괜찮은 선택이다. 기차역 안에 큰 카페가 있는데 그 안에 유료 화장실이 있었다. 요금은 0.5라리 약 250원. 큰 금액은 아니지만, 한국인으로서 화장실을 돈 내고 쓴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나는 세수하고, 양치질까지 했으니 그래도 남는 장사 한 셈이다.
기차는 굉장히 짧은 4량짜리 기차였다. 겉만 봐도 이미 굉장히 낡았는데 안은 더 낡았다. 소련 시절 모델인 듯, 내부의 각종 글씨들은 모두 러시아어였고, 전체적으로 붉은색의 색감에 각 량의 문은 두꺼운 나무문이었다. 복도를 두고 한쪽은 한 면에 1,2층에 침대가 두 면이 마주 보는 형식으로 침대 4개가 한 세트로 묶여있고, 한쪽은 의자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이 기차를 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1 량의 절반도 차지 않아 보였다. 칸이 많이 남으니 일행 수에 맞춰 자리를 정해줘서, 나는 4 자리 세트를 혼자 사용했다.
기차 내부의 백열등은 불이 들어와도 껌껌했다. 출발하기 전 차장이 와서 여권을 확인했다. 중간에 국경을 넘는 거라 여권이 꼭 필요해서 소지하고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듯했다. 차장은 고불고불한 백발 머리에, 빵모자를 쓰고 풍채가 넉넉한 할아버지였다. 기차에는 대부분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들이고 여행객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다 일행 없이 혼자 탄 사람은 나뿐이라 그런지 차장 할아버지는 내가 좀 신경 쓰이는 듯했다. 주기적으로 손님들을 살피러 왔다 갔다 하는데, ' 미스 파크, 오케이?'를 물어봐 주었다(여권의 내 성이 Park 인 것을 보고). 후에 잠도 안 오고 창밖만 보고 멍 때리고 있자 아르메니아 여행 지도와 가이드 북 같은 거도 보라고 가져다주시고. 소소하지만 따뜻한 기억이다.
기차를 탈 때 이미 늦은 저녁이긴 했지만, 곧 완전히 밤이 됐다. 차장 할아버지는 침대 커버와 모포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이런 모포는 더러울 거란 생각에 잘 쓰지 않는데, 빳빳하게 세탁되어 있고 깨끗한 냄새가 났다. 한참 달리던 기차는 밤 11시경 조지아 국경을 넘으며 한 번 정차하고, 잠시 후 아르메니아 출입국 관리소에서 두 번째로 정차했다. 살벌한 분위기의 군인들이 우르르 기차에 타서 금지 물건이 있는지 묻고, 가방을 열어서 확인했다. 승객들의 여권을 전부 걷어간 뒤 도장을 찍어서 나눠 줬는데, 비자가 필요한 국가의 사람이 있었는지, 승객 중 몇은 내려서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우리나라도 아르메니아 무비자 입국이 되기 전에는 입국 시 출입국 관리소에서 비자 비용을 내고 서류를 작성한 뒤 입국했다고 한다. 대기시간이 한참 길어져 1시간 이상 정차해있다가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승객들이 하나 둘 잠들고, 창 밖은 껌껌해서 물인지 땅인지 분간이 안 가고. 은하철도 999를 타고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아르메니아 영토에 들어서면서 이제 핸드폰도 끊기고 한참 수첩에 이것저것 낙서를 하다가 잠을 청했다. 눈만 감고 있었는지 잠이 들긴 했었는지 비몽사몽 한 간에 저 멀리 아라라트 산의 윤곽이 보였다. 열악하고 힘든 야간열차의 낭만이라면 일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아르메니안 민족의 성지며 영혼이라는 아라라트 산. 그런 산이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어서 아르메니안들에겐 아픈 곳이다. 터키는 이 코카서스 일대의 막강한 강대국으로 주변 국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국가 중에서도 가장 약소국이라 많은 핍박을 받아왔고, 그중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주도한 오스만 튀르크의 터키에 대한 감정이 가장 좋지 않다. 게다가 본인들 영혼의 중심인 산마저 빼앗겼으니 깊은 원한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노아의 방주가 끝내 도달한 곳이 아라라트 산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저런 생각들 중 기차는 길고 긴 운행의 종착지에 천천히 다다랐다. 11시간이 걸려 드디어 예레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