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투미-트빌리시 (3.24-25)
조금씩 추적추적 오던 비는 점점 거세졌다. 비가 내리면서 기온도 많이 떨어져서 카즈베기의 날씨가 떠올랐다. 우산을 쓰고 숙소 주변 교회에 잠깐 들러 구경하고, 시장에 가서 과일 몇 개 사고.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와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바투미에 온 건 날씨에 대한 기대감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는데, 일기예보 상 며칠이 지나도 이런 오락가락 날씨가 계속될 전망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관광이나 이동이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런 날씨가 계속되면 기분마저 울적해지는 게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이런 날씨라면 더 볼 것도 없이 바투미도 내일 당장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조지아 어느 도시를 찾아봐도 향후 날씨가 좋을 예정인 곳이 없었다. 이번 여행은 어째서 비싼 돈 주고라도 성수기에 가야만 하는지를 뼛속 깊이 배우는 시간이었다. 여행 오기 전 대충 짜 뒀던 계획은 다 접어야 했다. 북쪽은 눈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오락가락하고 햇빛 구경하기 힘든 동유럽 날씨였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할 남쪽 도시들을 탐색하다가 아르메니아까지 아주 내려가버리는 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아르메니아 예레반은 조지아에 비해 기온도 높고, 날씨도 좋을 예정이었다. 비 구름 하나 없이 쭉 햇빛만 쨍쨍한 일기예보를 보니 그것만으로 이미 기분이 좋았다. 결국 날씨 하나만 보고 예레반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조지아는 기차가 있긴 하지만 그리 발달하진 못했는데, 바투미에는 기차역이 있었다. 하절기에는 바투미에서 예레반까지 쭉 가는 기차가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트빌리시까지만 운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버스와 기차가 있다면 난 웬만하면 기차를 선택하겠다. 바투미까지 올 때 장기간 버스가 너무 힘들기도 했고, 트빌리시에서 예레반까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갈 생각이라 어차피 기차 터미널에 가야 했다. 배낭이 무겁기 때문에 시내에서도 최대한 덜 움직이는 노선으로 다니고 싶었다. 대신 기차가 자주 있진 않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체크아웃할 거라 리셉션에 말해놓고 일찌감치 누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밤늦게까지 부엌에서 신나게 노는 사람들, 옆 방 들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잘 수는 없었다.
어제 낮부터 내린 비는, 이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오전 6:30분에 숙소에서 나왔다. 비가 오는 터라 완전히 깜깜한 밤이었고, 빗줄기가 꽤 거셌기 때문에 비옷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바투미를 떠나기로 마음먹긴 잘했다고 생각하며 택시를 찾아 길을 재촉했다. 전날 알아본 바에 의하면,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택시를 이용해서 역에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택시 바가지가 성행한다고 한다. 그래서 타기 전에 가격 흥정을 꼭 하고 타란다. 거리로 봤을 때 10라리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 정도 가격으로 흥정을 하라고 조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큰길에 나오자 택시 기사들이 따라오며 호객을 하는데 20라리를 부르고, 무시하고 가자 15라리를 부른다. 10라리? 그건 안된단다. ok 하고 다른 택시를 찾아 떠나려 하자 10라리에 태워주겠다고 타라고 손짓한다. 사실 여행 다니면서 택시는 거의 타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할 시간이라면 이른 아침이거나 늦은 밤인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 잘 알기도 힘든 낯선 도시에서 택시기사를 전적으로 믿어야만 하는 이 상황 자체가 공포스럽다.
다행히 역에는 제대로 도착했는데, 10라리 지폐가 없어 50라리 라리 지폐를 내밀자, 자기도 돈이 없다며 30 라리만 거슬러주겠다고 하더니, 이젠 20라리 주기로 하지 않았냐며 헛소리를 했다. 40라리는 절대 거슬러 줄 의향이 없어 보여서 지폐를 바꿔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고 기차역 안에 들어왔다. 매점에서 물을 사고 지폐를 교환하려고 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거슬러 줄 지폐가 없어서 50라리는 안 받겠다는 것이다. 아.. 조지아에서 환전할 땐 꼭 작은 단위로만 환전받길 권유한다. 다급한 마음에 주변의 기차 대기 손님들에게 지폐를 바꿔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다녔는데, 한 중년 부부가 고맙게도 주머니와 지갑을 다 털어서 50라리를 교환해줬다. 아.. 감사한 분들.
바꾼 지폐를 가지고 택시 기사에게 갔는데, 10라리를 내밀자 아주 방방 뛰고 불같이 화를 내더니 급기야 내 손에 든 돈을 뺏어가려고 했다. 덩치가 산만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굉장히 무서웠지만, 으슥한 곳이거나 단둘이 있는 상황은 아니라 나도 절대로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그런 작은 소란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택시기사는 (아마도) 욕을 욕을 쏟아내더니 결국은 돈 뺏는 걸 포기하고 10라리만 받고 떠났다. 억지로 버텨 바가지를 모면하긴 했지만, 이런 무력 다툼이 너무 공포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여행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황이었는데 조지아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도와주기 위해 나서는 타입은 아니었다.
좀 기다려 매표창구가 열리고, 여권을 제시하고 기차표를 구매했다. 기차는 예상외로 너무나 반짝이는 최신식이었다. 1,2층으로 나눠져 있고,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3자리, 2자리 총 5자리였다. 내부고 좌석이고 깨끗하고 밝았다. 연안을 따라 달리던 기차는 흑해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바투미를 떠났다. 분명한 건 조지아의 자연은 너무 아름답다. 날이 개고, 햇빛이 비추는 그날의 풍광들을 잊지 못한다. 아침 그 난리로 드리운 마음의 그늘은, 기차 안에서 본 아름다운 광경들에 맑게 갰다. 이런 햇빛이 있다면 앞으로 남은 여행은 재밌고 즐거운 일만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