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부여할 때, 오직 일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아휴직을 하며 아들이 초등학교에 적응하려는 고군분투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 소중했던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 전 아들보다 제가 더 긴장하고, 학기가 시작하고 적응을 어려워하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저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 나갔습니다. 학교에서 충분히 놀지 못했던 아들은 하교 후 더 많은 놀이를 요청했고, 현실로 도피하기 위해 책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싣어나르고 하교 후에는 카페로, 놀이터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아주 천천히 적응해 갔고, 여름날이 되어서야 태권도에서 사귄 친구와 집 앞 놀이터에서 뛰어놀더군요. 이 모습을 아내와 함께 지켜보며 남몰래 기뻐하기도 했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시력이 나빠져 갑자기 일찍 안경을 껴야 했을 때는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렇게 시력이 나빠지는 일에도 마음이 무너지는데 학교폭력이나 더 큰 어려움을 만나는 아이들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힘이 들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휴직 기간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성장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볼 때 기쁨입니다. 누군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에는 손해와 고통이 따를 것 같지만 기쁨이 함께합니다.
이제 학교로 돌아가면 다시 학생들을 만날 텐데, 아이들의 성장과 고통의 순간에 함께할 준비를 합니다.
바로 자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자녀만큼 사랑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아이들의 어려움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순간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크게 볼 때 큰 기쁨일지 모릅니다.
그 안에서 저는 삶의 의미와 가치들을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