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의 드넓은 포도밭 속 에어비앤비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술자리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사람들과 함께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게 맞겠다. 처음 와인에 빠진 계기는 단순했다. 당시 좋아하던 사람이 와인 업계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와 말 한 번 섞어보려고 입문했더랬다. 포도 품종부터 주요 와인 산지 등 와인에 관한 정보는 너무나도 방대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가장 효과적인 와인 공부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최대한 많은 종류의 와인들을 마셔보는 것. 계속해서 마시다 보면 나에게 맞는 와인이 생기기 마련이다. 리쿼샵에 가면 많은 와인들 중 유독 손이 가는 와인. 나에게 있어 그런 와인은 바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프랑스 보졸레, 그리고 이탈리아 끼안티 클라시코다. 와인 무식자였을 때부터 그거 고르면 실패하지 않는다고 얘기해준 과거의 남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계속해서 그 와인을 고르곤 한다. 워낙 유명한 산지이기도 하고.
그 형제와 나는 결국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대신 나는 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취향 리스트에 와인이 추가되면서 그 뒤로 여행지를 고를 때 평소 가고 싶던 와인 산지를 하나씩 정복하는 기쁨을 누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탈렌보쉬(Stellenbosch)와 미국 나파밸리(Napa Valley),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 포르투갈 포르투(Porto) 등을 여행하며 와이너리 투어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이다음에는 적포도주의 끝판왕인 프랑스 보르도(Bordeaux)로 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프랑스 남부 지역을 여행하기로 결심하고 제일 먼저 고심해서 고른 것은 바로 에어비앤비 숙소였다.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일정 면적 이상의 자체 포도밭을 가진 와이너리 이름에 샤또(Château)라는 명칭이 붙는데, 원래 이 샤또는 프랑스어로 '성(Castle)'을 뜻한다. 보르도 지역에만 수천여 개의 샤또가 있고, 대부분 이 샤또들은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포도나무 덩굴들과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저택. 나는 그런 '포도밭 속 에어비앤비'에 머물고 싶었다.
2주 동안 우리의 여행 경로는 프랑스 니스(Nice)를 시작으로,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아비뇽(Avignon), 아를(Arles), 몽펠리에(Montpellier), 피레네(Pyrénées), 툴루즈(Toulouse), 생떼밀리옹(Saint-Émilion), 그리고 대단원의 마지막 장인 보르도에서 끝이 난다. 무려 1,250km가량의 여행길이었다.
자동차 여행의 좋은 점은 관광객들에게 덜 알려진 매력적이고 정겨운 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머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경이로운 풍경이 보일 때마다 언제든 즉흥적으로 차를 세워 감상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 특히나 남부 프랑스의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 풍경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나 혼자서 독박 운전을 해야만 했던 것. 함께 여행길에 오른 친구가 둘이었는데, J는 싱가포르에 살아서 운전대 위치가 반대라 익숙하지 않았고 L은 운전은커녕 아예 면허조차 없었다.
우리는 매일 평균 두 병 가량의 와인을 마셨다. 낮에는 운전해야 했기 때문에 자제할 수밖에 없었고, 저녁에 에어비앤비로 돌아와 하루를 랩업하며 까마시곤 했다. 집에서 마시니 편하기도 했고, 만취해 고주망태가 되어도 큰 일날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루 종일 갈증 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들이켰고, 와인 두 병은 금세 동이 났다. 보통 한 병을 까면, L이 100ml 정도만 마시고 나머지 650ml는 나와 J가 모두 해치웠다.
내가 운전병이었다면 L은 재정회계병, 그리고 J는 취사병이었다. 매우 조화롭고 흡족한 역할 분담이었다. 덕분에 에어비앤비 부엌은 온전히 J의 공간이었다. 새로운 집에 도착하면 그는 제일 먼저 부엌으로 향했고, 찬장을 죄다 열며 세간 살림이 어떤 게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보통 우리는 점심을 사 먹고 아침과 저녁을 집에서 해 먹었는데, 하루 일정을 소화하고 귀가하기 전 마트에 들러 저녁 장을 푸짐하게 보는 시간은 늘 행복했다. 오늘은 J가 어떤 요리를 해줄까. 그 요리에는 어떤 와인이 어울릴까.
와인을 좋아하면 식탁이 더욱 풍성해진다. 와인을 사랑하는 J는 그날 산 와인에 따라 어떤 음식이 어울리겠다 바로 판단하고 요리하는 것인지, 아니면 얻어걸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의 요리와 와인은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니스에서 그가 만든 양갈비 스테이크와 2016년 빈티지의 메독(L'Intendant Louis Médoc 2016)은 아직도 입안에서 맛과 향이 맴도는 듯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동네 정육점에는 가죽만 갓 벗겨 눈알은 그대로 남아있는 토끼부터 사슴, 양, 오리, 소, 돼지 등 J의 요리 욕구를 자극하는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즐비했다. 덕분에 나와 L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양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열흘 동안 먹고 마시며 남부 프랑스를 횡단했고, 드디어 마지막 대망의 목적지인 보르도에 도착했다. 보르도 시내는 꽤 번화한 모습이었다. 사실 생떼밀리옹처럼 포도밭만이 즐비한 시골마을인 줄로만 알았는데, 차도 많이 다니고, 현대미술관도 있고, 세련된 레스토랑도 넘쳤다. 우리는 보르도 시 외곽인 생제르배(Saint-Gervais)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숙소를 구했다.
보르도 시내를 끼고 흐르는 가론 강(Garonne)과 그 위에 흐르는 도르도뉴 강(Dordogne)이 합류하면서 지롱드 강(Gironde)이 되는데, 이 지롱드 강은 보르도 와인의 원천으로서 산지들을 훑고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 나간다. 생제르배는 지롱드 강을 기준으로 오른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가론 강도 건너고, 도르도뉴 강도 건너 저 윗동네로 30분가량 운전해서 가면 나오는 정말 작은 동네.
당시 에어비앤비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드넓은 포도밭 너머로 15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름다운 고성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우리에게 다가왔고,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슈퍼호스트인 클라우딘(Claudine)과 그녀의 두 딸 안느(Anne), 마리(Marie)가 운영하고 있는 샤또 데자라스(Château des Arras). 본래 군사 요새로 쓰였던 이 성은 18세기에 한 귀족의 집으로 쓰이다가, 1899년부터는 호지에(Rozier) 가문이 와이너리를 경영하면서 지금까지 그 가업이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와인은 오랜 전통을 지니며 세대를 거듭해 계승되어 오는 가업이다. 그만큼 많은 열정과 노하우를 요하는 분야이며, 그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세 모녀가 직접 기르고 생산한 포도주를 테이스팅 해 볼 수 있었는데, 장녀인 마리는 샤또 데자라스 와인의 특징은 어떠한지, 어떤 포도 품종이 주력인지 우리에게 매우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화이트 와인의 라벨 디자인에 그려진 강아지가 가족의 반려견인 가이아(Gaïa)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함께.
마리의 동생 안느는 와인 전공자로, 주중에는 메독 지역의 한 와이너리에서 일을 하고 주말이면 가족의 와이너리로 돌아와 일손을 보탠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남성이 더 많은 와인 업계에서 여성 생산자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 그들을 통해 느껴졌다.
성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중세시대로 타임슬립해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구와 벽화, 고서, 찻잔 등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움은 요즘 나오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지낼 방은 성의 2층 왼쪽 날개 부분에 있었는데, 1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나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가 났다. 이 소리마저도 어찌나 낭만적이던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침대의 원목 프레임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데, 그 침대에서 잠을 청하니 나 자신이 꼭 중세시대의 귀부인가 된 것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의 아름다운 포도밭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이 고성에서의 모든 경험은 일 인당 하룻밤 단돈 40유로가 채 되지 않았다. 믿어지는가?
이 에어비앤비에는 부엌이 따로 없어 저녁을 해결하고 들어가야만 했는데, 생제르배에는 사실 이렇다 할 식당이나 카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옆 동네인 상트앙드레드큐브자크(Saint-André-de-Cubzac)에서 종종 외식을 했다. 그중 프랑스-일본 퓨전 음식을 선보이는 이노모토 테이블(La Table d' Inomoto)은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으로, 셋이 함께 하는 여행의 마지막 식사로 손색 없었고 매우 훌륭했다. 나가사키 출신의 세이지 이노모토(Seiji Inomoto) 셰프가 재해석해 만드는 프랑스 요리는 굉장히 실험적인 외양이었지만, 혀끝에서 친숙하면서도 조화로운 밸런스의 맛이 느껴졌다. 매일 메뉴가 바뀌며, 스타터와 생선 혹은 고기 요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저트까지 코스로 즐길 수 있다. 물론 알라카르트(A La Carte)로도 주문이 가능하다.
부엌이 없는 대신 에어비앤비에서 아침식사를 제공해 줬는데, 아침잠 많은 내가 눈이 절로 떠질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호스트가 직접 기른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이 식탁 위에 올라온다. 특히 갓 구운 크루아상에 호스트가 만든 무화과 잼을 발라 먹을 때 나의 미간은 자꾸만 좁혀지고 입에선 ‘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매일 아침마다 울면서 무화과 잼을 싹싹 긁어먹었더니, 보르도를 떠나는 날 마리가 우리에게 잼 한 통씩을 건네주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서울로 돌아와 그 잼을 빵에 발라 먹을 때마다 작지만 따뜻했던 마을 생제르배와 샤또 데자라스의 포도밭을 추억했고, 잼이 동났을 때 그제야 여행이 끝난 기분이었다.
고급 와인의 대명사, 샤토 마고(Château Margaux)가 있는 마고 지역을 비롯해 보르도 포도밭 사이로 신나게 달리다가 멋진 성이 나타나면 차를 세워 구경했다. 샤또나 와인샵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 둘 쟁여 두던 와인이 어느새 동이 나면서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끝을 향해갔다. 프랑스 남부 지역을 횡단하느라 보르도에 좀 더 오래 있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하루 일찍 떠나는 J를 배웅하기 위해 보르도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들어서니 우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포도나무. 역시 모르도가 와인의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공항에마저 포도밭이 있다니. 보여주기 식인가 싶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이긴 했지만, 해마다 소량의 와인은 생산할 수 있지 않을까. 보르도 공항 라벨이 붙은 와인을 상상하니 재미있다.
J는 싱가포르 집으로, 나와 L은 또 다른 여행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며 이렇게 우리의 포도주 마시는 여행이 끝이 났다. 이다음에 다시 보르도에 간다면,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에 오래 머물며 종일 취해 있고 싶다. 그땐 내가 운전대를 잡진 않을 거다.